20.05.18 09:05최종 업데이트 20.05.1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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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스의 심판(Judgment of Paris) 하면 일반적으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목동 파리스가 판결을 내리는 그리스 신화를 떠올릴 테다. 하지만 하루 종일 와인 생각인 이들은 1976년 5월 24일에 있었던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이 떠오를 테다. 콧구멍이 훤히 보일 정도로 치솟은 프랑스 와인의 콧대가 미국 와인의 스트레이트 한 방에 주저앉은 날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와인 상인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는 미국 독립 200주년인 1976년에 자신을 포함한 11명의 와인 전문가를 모아 파리에서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의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했다. 테스트에 참가한 이들의 면면은 대단해서, 그 유명한 로마네 콩티의 공동 소유주 오베르 드 빌렌(Aubert de Villaine)을 비롯해 프랑스 와인 및 요식업계의 명망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두 번의 테스트가 진행됐다. 첫째는 프랑스 화이트 와인(4병) VS 미국 화이트 와인(6병), 둘째는 프랑스 레드 와인(4병) VS 미국 레드 와인(6병)이었다.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11명 중에 주최 측 2명을 제외한 프랑스인 9명의 채점 결과를 합산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화이트와 레드 모두 미국 와인이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행사를 주최한 스퍼리어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파리의 심판 화이트 와인 순위 1976년 5월 24일에 벌어진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미국 화이트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 위키피디아

 

파리의 심판 레드 와인 순위 1976년 5월 24일에 벌어진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 미국 레드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 위키피디아

 
얼마나 충격적이고 당황스러웠는지, 블라인드 테스트에 참가한 와인 평론가 오데뜨 칸(Odette Kahn)은 격분해서 자신의 채점 용지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며, 이후 시음회 행사가 부적절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흥미롭게도 오데뜨 칸이 최고점수를 준 레드 와인은 바로 1위를 차지한 미국 와인 스택스 립 와인 셀라(Stag's Leap Wine Cellars)였다.
 
음식 문화에 대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프랑스에서는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테스트 결과에 대한 다양한 흠집내기가 있었으며, 그중 하나가 프랑스 와인은 오래 숙성되어야 진가를 드러낸다는 주장이었다.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을 오랫동안 숙성해서 비교하면 결과가 다를 거라는 얘기다.
 
'파리의 심판' 30주년인 2006년 5월 24일. 역시 스티븐 스퍼리어의 기획으로 미국에서 9명, 영국에서 9명씩 최고의 와인 전문가들이 모여서 1976년 5월 24일과 동일한 레드 와인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했다. 추가로 30년 숙성된 상태에서 기량을 겨룬 것이다. 결과는 미국 와인의 압승. 무려 1위부터 5위까지 미국 와인이 쓸어버렸다. 30년 숙성되니 오히려 미국 와인이 전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
 

파리의 심판 30년 후 레드 와인 순위 미국 와인의 압승. 무려 1위부터 5위까지 미국 와인이 쓸어버렸다. ⓒ 위키피디아

 
선입견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만약 라벨을 공개한 상태로 테스트가 진행됐다면 미국 와인이 두 번 모두 승리했을지 의문이다. 와인만 그런 게 아니다. 바이올린 연주자라면 대부분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최고의 악기로 치며 선망한다. 17~18세기 이탈리아 최고의 악기 장인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제작한 바이올린들을 일컫는데, 비싼 것은 하나에 수십억 원씩 한다. 그런데 수천만 원대 현대 바이올린에게 블라인드 테스트로 패배했다(물론 둘 다 비싸다).
 
나는 '파리의 심판'에 출전한 레드 와인 열 병 중 일곱 병을 마셔보았다(물론 빈티지는 다르다). 블라인드 테스트도 아니고 같은 날 한꺼번에 마신 것도 아니지만, 마침 파리의 심판 날도 다가오고 하니 나름 순위를 매겨보고 싶었다. 시음 당시의 느낌을 가까스로 떠올리며 양국의 참전용사들을 평가했다. 그렇게 결정한 지극히 개인적인 순위는 다음과 같다.

● 1위 샤토 무통 로칠드(Château Mouton-Rothschild) 2005
(시음일: 2016년 12월 24일)

 

샤토 무통 로칠드(Chateau Mouton-Rothschild) 2005 ⓒ 고정미

 

샤토 무통 로칠드 2005 프랑스 보르도의 지롱드강 좌안 지역을 대표하는 '5대 샤토'중 하나다. 2005년은 보르도의 포도 작황이 상당히 좋았던 해이기도 하다. ⓒ 임승수

 
프랑스 보르도의 지롱드강 좌안 지역을 대표하는 '5대 샤토'중 하나다. 2005년은 보르도의 포도 작황이 상당히 좋았던 해이기도 하다. 시음적기 초입이라 다소 거친 타닌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질감이 매끄러워서 꽤 놀랐다. 이 와인 덕분에 밸런스가 뛰어난 와인은 마치 생수처럼 투명한 느낌이 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2위 샤토 오 브리옹(Château Haut-Brion) 2007
(시음일: 2015년 11월 5일)


 

샤토 오 브리옹(Chateau Haut-Brion) 2007 ⓒ 고정미

 

샤토 오 브리옹 2007 역시 ‘5대 샤토’중 하나다. 2007년 보르도의 작황은 좋지 않았지만 5대 샤토의 이름값은 했다. ⓒ 임승수

 
역시 '5대 샤토'중 하나다. 2007년 보르도의 작황은 좋지 않았지만 5대 샤토의 이름값은 했다. 당시 와인에 빠지고 딱 2개월 만이라 미숙한 탓에 브리딩도 충분히 못 하고 타닌이 거친 상태로 마셨다. 그럼에도 입안이 얼얼할 정도의 강렬함을 통해 잠재된 기량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 3위 스택스 립 와인 셀라 케스크 23(Stag's Leap Wine Cellars CASK 23) 2009 (시음일: 2016년 12월 3일)
 

스택스 립 와인 셀라 케스크 23(Stag's Leap Wine Cellars CASK 23) 2009 ⓒ 고정미

 

스택스 립 와인 셀라 케스크 23 2009 파리의 심판에서 우승한 스택스 립 와인 셀라의 대표 와인이다. ⓒ 임승수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는 1위였지만 나는 3위 주련다. 2016년은 한창 미국 나파밸리 와인에 빠졌던 시기라 이 와인보다 더 뛰어난 평가를 받는 나파밸리 와인을 여럿 마셨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크게 인상에 남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나름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 4위 샤토 레오빌 라스 까즈(Château Leoville Las Cases) 2006
(시음일: 2020년 4월 11일)

 

샤토 레오빌 라스 까즈(Chateau Leoville Las Cases) 2006 ⓒ 고정미

 

샤토 레오빌 라스 까즈 2006 프랑스 보르도의 생 줄리앙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이다. 지롱드강 좌안 와인 중에서 ‘5대 샤토’ 바로 아래 등급에 속할 정도로 높은 위상을 가진다. ⓒ 임승수

 
프랑스 보르도의 생 줄리앙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이다. 지롱드강 좌안 와인 중에서 '5대 샤토' 바로 아래 등급에 속할 정도로 높은 위상을 가진다. 하지만 생 줄리앙 지역의 상급 와인은 가성비를 고려했을 때 아쉽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차라리 절반 가격의 와인을 두 병 마시는 게 좋겠다 싶은 느낌? 그런 어정쩡함 때문에 순위 또한 어정쩡한 4위다.
 
● 5위 샤토 몽로즈(Château Montrose) 2000
(시음일: 2019년 12월 8일)

 

샤토 몽로즈(Chateau Montrose) 2000 ⓒ 고정미

 

샤토 몽로즈 2000 프랑스 보르도 생 테스테프 지역의 넘버 투다(넘버 원은 샤또 꼬스 데스뚜르넬). 이 와인을 마시고 ‘타닌! 타닌! 타닌! 타닌!’이 떠올랐다. ⓒ 임승수

 
프랑스 보르도 생 테스테프 지역의 넘버 투다(넘버 원은 샤또 꼬스 데스뚜르넬). 이 와인을 마시고 '타닌! 타닌! 타닌! 타닌!'이 떠올랐다.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떫은 느낌이 강하다. 부드럽게 녹아든 상태로 마시고 싶다면 10년 이상 더 기다려야 한다. 1976년에는 샤토 무똥 로칠드에 이어 3위를 했지만, 거센 타닌이 부담스러운 나에겐 5위다.
 
● 6위 클로 뒤 발 카베르네 소비뇽(Clos Du Val Cabernet Sauvignon) 2016
(시음일: 2020년 3월 13일)

 

클로 뒤 발 카베르네 소비뇽(Clos Du Val Cabernet Sauvignon) 2016 ⓒ 고정미

 

클로 뒤 발 카베르네 소비뇽 2016 가성비가 뛰어난 나파밸리 와인. 나파밸리와 보르도의 중간쯤을 지향하는 느낌. ⓒ 임승수

 
가성비가 뛰어난 나파밸리 와인. 일반적으로 나파밸리 와인은 연유를 탄 듯한 느끼함 탓에 계속 마시다 보면 물리는데, 이놈은 그렇지 않아 좋다. 그렇다고 균형 잡힌 프랑스 보르도 느낌이냐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나파밸리와 보르도의 중간쯤을 지향하는 느낌. 호불호 크게 갈리지 않고 두루두루 사랑받을 스타일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라 6위.
 
● 7위 하이츠 셀라 카베르네 소비뇽(Heitz Cellar Cabernet Sauvignon) 2011
(시음일: 2016년 5월 16일)

 

하이츠 셀라 카베르네 소비뇽(Heitz Cellar Cabernet Sauvignon) 2011 ⓒ 고정미

 

하이츠 셀라 카베르네 소비뇽 2011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출신. 얘는 한마디로 박하다! ⓒ 임승수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출신. 얘는 한마디로 박하다! 그 박하 향이 나에게는 상당히 거슬렸다. 이 와인 엄청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어쩌겠는가? 나한테는 거북한 것을. 그래서 꼴찌 줬다. 참고로 파리의 심판에 참가한 와인은 윗급인 하이츠 셀라 마르타스 빈야드(Heitz Cellar 'Martha's Vineyard')이다. 아직 안 마셔봤는데 리뷰를 검색하니 얘도 박하 향이란다.
 
순위를 정하니 우습게도 (7위가 6위보다 비싼 것 빼고는) 대체로 가격순이다. 나에게는 가격 정보가 강한 선입견으로 작용하나 보다. 개털 주제에 무리해서 샀으니 기필코 맛있어야 한다는 강박 탓이려나? 만약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다면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다.
 
1976년 파리의 심판 채점표를 보면 그 대단하다는 전문가마다 순위가 들쭉날쭉하다. 예컨대 테스트 참가자인 미셸 도바(Michel Dovaz)는 최종 1위인 스택스 립 와인 셀라를 8위로 평가했다. 물론 와인 맛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얘기는 아니다.

저가 와인과 고급 와인은 혀만 있으면 누구나 단박에 구분할 만큼 차이가 확연하다. 하지만 파리의 심판 와인은 기본적으로 모두 고급 와인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와인은 가격 차이만큼 맛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래서 전문가도 취향에 따라 평가가 휙휙 달라진다.

이런 마당에 내 평가가 우연히(?) 가격순인 게 무슨 문제인가. 나는 가격에 민감한 속물적 혓바닥을 가졌나 보지 뭐. 그냥 내 혀에 충실하게 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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