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9 19:35최종 업데이트 20.05.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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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된 한족 마을을 찾아갔다. 중국 구이저우성의 구이양시에서 남서쪽으로 안순시로 가는 길에 있는 티엔룽툰바오(天龍屯堡) 마을이다.

명나라 주원장이 원나라의 잔존 세력인 양왕을 쫓기 위해 30만 대군을 이곳까지 파견했다. 그 병사들은 가족까지 데리고 왔는데 임무를 수행하면서 마을을 이루며 살게 되었다. 역사책에서 배웠던 둔전병(屯田兵), 군사 요충지에 주둔하면서 농사를 짓다가 유사시에는 전투에 나가는 병농일치의 동네다.
 

좁은 마을 골목길, 마치 집들이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 ⓒ 막걸리학교

 
마을 집들은 단단한 판석들을 쌓아서 지었다. 지붕도 넓적한 판석들로 덮여 있다. 집들이 마치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집과 집 사이의 골목길은 유난히 좁았다. 적들이 한 줄로 공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두었다. 돌집에는 창문이 나 있어, 방어하기 좋게 했다.
 
마을 광장에 들어서자 역다(驛茶)가 있다. 군사 요충지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역참도 생겼다. 마을 여성 둘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차를 따라준다. 그런데 그들의 차림새가 독특하다. 이마를 하얀 머리띠로 가렸다. 이마가 너무 넓어 물어보니, 혼인한 여자의 징표라고 했다.
 

역다가 있는 마을 광장에서 차를 내주는 마을 여자들. ⓒ 막걸리학교

 
혼인한 날에 머리털을 뽑는데, 아파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이마가 넓어야 미인이라고 덧붙였지만, 그것은 억지 논리다. 혹여 다른 남자들이 탐을 낼까 봐,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이 부인들을 밉게 만들어 둔 게 분명하다. 이마가 넓은 게 예쁘다면, 처녀 시절부터 머리를 뽑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이 그치고 둔전병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그대로 남아 있는 관습들이 또 있다. 길가에서 마을 여성들이 직접 만든 신발을 판다. 600년 전에 터 잡던 그 시절부터 행해진 전통탈 연행, 띠시(地戱)가 있다. 띠시를 보려고 공연장인 연무당(演武堂)을 찾아갔다.

연무당은 천장 높고 마당 넓은 집이었고, 따로 단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았다. 무대에는 연행에 사용되는 탈들이 걸려 있다. 등장 인물들은 탈을 쓰고 등에 깃발을 꽂고 북 장단에 맞춰 서로 다투고 겨뤘다. 띠시는 경극을 닮아 목소리가 피리 소리처럼 가늘고 높게 울려퍼졌다. 삼국지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띠시 탈춤이 귀신을 추방하고 전염병을 물리친다고 했다.

연행이 끝나고 험상궂은 가면을 벗으니, 순박한 마을 촌로의 얼굴이 드러났다. 띠시를 한 지가 50년이 되었다고 한다. 공연이 끝났으니 술을 한 잔 마시자고 한다. 그이를 따라 술을 받으러 마을 양조장을 찾아갔다.
 
쌀로 술을 빚는 곳이었다. 간판에 순미주(純米酒), 나미주(糯米酒), 미주(米酒)가 적혀 있다. 나미는 찹쌀이다. 중국에서 이름난 술들은 대부분 수수나 잡곡이 섞여 있는데, 쌀술이라니 신기했다. 길가의 작은 매장에는 술 항아리가 있고, 항아리 속에는 독한 기운의 소주가 들어 있었다. 술은 국자로 떠서 팔았다. 매장 안쪽에는 살림집이 있어서 아이가 놀고 있었다.

대문으로 들어가니 마당 옆에 양조 공간이 있었다. 벽돌로 쌓은 두 개의 화덕이 있는데, 한 곳에서는 목통에서 고두밥을 쪘다. 가운데가 움푹한 번철에 목통을 올리고 목통 안에 채반을 넣고 쌀을 담아 찐다. 찐 밥은 바로 옆의 타일 바닥에 쏟고 물을 부어 식힌다.

고두밥이 식으면 가루 누룩을 뿌려 섞고, 화덕 아래쪽으로 파 놓은 반지하 저장고의 술항아리에 담아둔다. 항아리에서 술이 발효되면, 번철에 양은 증류기를 얹고 그 안에 발효된 술을 넣고 증류한다. 순미주, 쌀술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증류주다.

이 양조장에서 흥미로운 광경을 보았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에도 양조장에 돼지우리가 함께 있는 곳이 있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뜻밖에 티엔룽툰바오(天龍屯堡)에서 말로만 듣던 양조장 돼지우리를 보았다. 증류하는 공간 바로 옆에 돼지우리가 있었다.
 

돼지를 기르는 마을 양조장, 주인이 서 있는 곳이 양조 공간이다. ⓒ 막걸리학교

 
하얗고 통통한 돼지들이 낯선 사람들이 보이자 울타리에 두 발을 올리고 꿀꿀거렸다. 주인이 와서 술지게미를 주자, 돼지들이 서로 달려들어 코를 박고 먹는데 머리가 안 보일 정도로 집중한다. 돼지들은 술지게미를 먹고 취해 잠들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술지게미를 찾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보면 살이 더 잘 찐다. 양조장은 술지게미를 멀리 내다 버릴 필요도 없어 좋다.

술을 받아 공연장이 있는 마을 복판으로 들어왔다. 수로가 흐르고 양옆으로 집들이 있는데, 수로 옆의 마을 식당에서 술판을 벌였다. 띠시를 함께 했던 동네 사람 너댓이 화덕이 있는 사각 탁자에 모였다. 안주는 토막낸 오이에 붉은 고추를 얹고, 잘박하게 돼지고기를 볶고 그 위에 붉은 고추를 뿌렸다.

쌀 증류주에서는 홍시향이 돌고, 물처럼 투명한데 독하다. 독한 기운을 가리려고 안주를 한 입 먹었는데, 안주가 오히려 더 맵다. 그 매운 맛을 가리려고 술을 마시니 이제는 술이 더 독하다. 혼이 나갈 정도로 혀가 얼얼했다.

중국에서 제일 술이 센 사람은 누구입니까? 띠시의 배우에게 물어보니, 삼국지의 관우를 꼽았다. 유비와 관우와 장비는 복사꽃 아래서 하늘에 술을 올리고 서로 술을 나누면서 죽을 때까지 변하지 말자고 의리를 맹세했다. 의리는 지켜졌지만, 모두 전쟁터에서 죽었다. 장비는 술을 너무 좋아하여,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부하 장달과 범강에게 살해되었다.

관우는 술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활용했다. 관우는 출전하기에 앞서 "데운 술을 한 잔 하라"는 조조의 권유를 물리치고,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오는데 어찌나 날래고 용맹했던지 그 술이 채 식기도 전이었다고 한다.

띠시의 배우가 붉은 관우의 가면과 검은 장비의 가면을 보여준다. 술이 확 깰 정도로 무섭다. 띠시의 마을 배우들은 술잔을 놓고 벌주 놀이도 했다. 묵찌빠를 닮았는데, 손을 내미는 방법이 가위바위보 말고도, 엄지만 내밀기도 하고, 검지만 접기도 한다.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오래된 고향 마을에서 사는 즐거움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나고 자란 집과 골목이 있고, 함께 살아온 동네 사람들이 있고, 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마시던 술이 있는 곳, 그곳이 살아서 도달할 수 있는 이상향이 아닐까. 명주가 별거던가, 한 공동체가 만들고 한 공동체가 오래도록 즐겨오면 그게 명주일 것이다.
 

600년 전에 병사들이 주둔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된 티엔룽툰바오. ⓒ 막걸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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