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7 11:43최종 업데이트 20.06.2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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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희. 그는 1953년생으로 칠십을 바라보고 손주도 둔 나이건만, 지금도 전북 전주에서 '함씨네식품'의 대표로 열심히 뛰고 있다.
 
그는 '쥐눈이콩 마늘 청국장환'을 개발해 2007년에 229번째 '신지식 농업인장'이 되었고 2010년에는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얼마 전에는 원광대학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이 콩의 원산지임을 입증"하는 논문을 준비 중이다.
 
강연도 많이 했다. 농림부 농업연수원에서 '농업CEO의 경영철학'을, 중앙공무원 교육원에서는 고위정책과정 특강을 했다. 총경들을 대상으로 '토종콩 세계화프로젝트'를 7년 동안 강의했고 평가 점수도 최고일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그녀를 누님, 누님하고 따르는 총경들이 생겼고 명예경감직도 수여받았다.
 
이런 그의 이력을 보면, 도전하는 여성CEO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를 진취적인 기업가라고만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는 콩식품 사업가이면서 '국산콩 광복군'이다. 그가 스스로 얘기하듯 '유관순'을 이어가는 함정희, 아니 '함관순'이다. 
 

함씨네 식품의 대표 함정희 그는 수입콩으로부터 국산콩의 광복운동을 하고 있다. ⓒ 민병래

 
그는 2001년 가을 '콩독립군'이 되었다. 전주시청에서 고려대 안학수 박사의 초청 강연이 있었는데 "GMO콩이 1990년대 중반부터 무분별하게 수입되어 우리 식탁과 건강을 망친다. 더더욱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배로 운송되는 과정이 길어 많은 방부제 등이 첨가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그는 남편과 함께 콩가공식품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취급하는 원료 대부분이 수입콩이었다. 대형 마트를 비롯 전북대, 한솔제지 등 큰 거래처가 많았다. 직원 10명이 2교대로 근무했고 수금할 때는 돈을 세기가 바쁠 정도였다.
 
강연이 끝나고 전주시청을 빠져나오면서 함정희는 고민에 빠졌다. GMO콩에 스며든 글리포세이트가 발암물질이며 인체의 호르몬 계통을 교란할 수 있다는 것, 인체 안전성에 대한 검증은 물론 시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왔다.
 
시청에서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 바람이 을씨년스러웠다. 정겨웠던 전주시내 거리는 온통 검푸른 아스팔트와 회색 시멘트뿐이었다. 어디선가 차가운 가을 비 한 방울이 목덜미에 파고 들어왔다.
 
갑자기 '좋은 콩 식품'을 만든다는 자부심이 뿌리째 흔들렸다. 그 강연 내용이 맞다면 내가 전주시민들에게 해가 될 수 있는 두부를 팔고 돈을 벌었다는 건가? 우리 아이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고개를 어떻게 들지? 돌아가는 내내 가슴 한편이 아릴 정도로 질문이 올라왔다.
 
'오직' 국산콩 선언

얼마 후인 10월 21일 함정희는 국산콩만으로 두부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가장 먼저 대형마트를 찾아가 "수입콩 제품을 납품할 수 없으니 계약을 해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구매담당과장은 "지금 이마트에 들어오려고 줄 서 있는데 농담하세요?"라며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술서'를 써주고서야 겨우 계약을 해지 받았다.
 
함정희는 내친 김에 한솔제지 같은 주요 거래처도 동종업체들에 '권리금' 없이 넘겨주었다. 그렇게 거래처 정리가 다 된 후에야 남편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남편은 당시 전주시 수입콩업자들의 협의체인 전북연식품조합의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나라도 못하고 대기업도 못하는데 당신 너무한 거 아니야? 각시 잘못 만나서 탄탄한 거래처를 다 잃어버리네, 이게 우리 아버지 때부터 50년 가업이여 50년!"
 
남편은 함정희에게 읍소도 하고 이혼 서류도 내밀었다. 아이들을 붙잡고 엄마를 정신병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하소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수입콩이 kg당 600원이었고 국산콩은 6000원 내외였다. 50kg 한 포대 기준으로 하면 3만원과 30만원이었다. 이때 함정희 공장은 하루에 50kg 30포대를 쓰고 있었으니 국산콩으로 바꾸면 원가가 껑충 오르는 셈이었다.
 
남편의 반대에 맞서 함정희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대학에 다니던 두 딸은 "우리 밥벌이가 다른 사람의 건강을 해쳐서는 안된다"며 선뜻 엄마를 지지했다. 자식들도 연대한 농성 덕에 남편은 "자네 뜻대로 한번 해보소"하고 한 발 물러섰다.
 
난관은 많았다. 수입콩이 들어오면서 국산콩 재배 농가가 많이 없어서 국산콩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함정희는 호남농업시험장을 찾아갔다. 거기서 박호기 박사의 도움으로 이 시험장에 콩 종자를 납품하는 고창의 김복성을 소개받았다. 그는 풍산 콩나물콩 종자도 기르고 있었다. 또 장엽콩과 황금콩을 기르는 진영호, 쥐눈이콩을 기르는 안성의 오세철, 유기농 1호로 새농민상을 받은 김제의 한강희, 정읍의 은재익 등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우리 콩 종자를 보존하고 제대로 기르는 콩독립군들을 만났다.
 

함씨네 밥상에서 함정희 전주 한옥마을에서 콩식품 전문점 함씨네 밥상을 3년간 운영했다. ⓒ 민병래

 
포기각서를 쓰다

이들로부터 국산콩을 받긴 했는데 정작 난관은 판로였다. 당시 두부 한 모 가격이 보통 700~800원 수준이었는데 국산콩 두부는 4000원이 넘었다. 함정희의 가상한 뜻은 이해할지 몰라도 이 '금값' 두부를 사먹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출이 곤두박질, 위기는 빠르게 다가왔다. 자금난이 오자 남편은 다시 수입콩을 하자고, 병행해도 되지 않냐고 함정희를 설득했다.
 
그러자 함정희는 마침 주차장 부지를 물색하던 인근 동사무소에 공장 부지 백 평을 팔아 돈을 만들었다. 이때도 남편과는 상의 없이 저질렀다. 남편은 "네 뜻이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무시할 수 있냐"고 공장의 집기를 내던지고 불같이 화를 냈다.
 
함정희는 다시 아이들과 가출했다. 애들은 아빠 입장에서 서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믿는다, 그러면 성공하고 승리한다며 함정희를 외려 격려해 줬다.

그때 추석을 앞두고 있었는데 공교롭게 전주에서 일가족 변사사건이 있었다. 남편은 혹시 "우리 가족이 잘못되었나?" 놀라며 함정희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함정희는 다시 귀가해서 국산콩 만들기를 계속했지만 판매는 개선되지 않았고 경영은 위기였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2003년 4월 15일 '포기각서', 함정희는 아래 글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함정희 본인은 남편 박성기가 운영하던 수입 콩 두부 제조를 중지하고 국산토종 콩 두부 제조를 고집하여 막대한 재산상 손해와 남편 박성기의 사회적 명예를 실추시키고 사회생활 활동을 고립시켰으므로 이에 전적으로 책임지고 6월 30일까지 판로가 확보되지 않고 판매가능성이 없으면 함정희는 손을 뗀다.

만약 약속을 어길 시 그간 모든 손해에 대한 민사상, 형사상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게 받겠음을 각서합니다. (단, 남편 박성기는 6월30일 되기 이전에 아내에 대한 원망, 불평을 하면 각서는 무효임)
 
딱 한 달 반의 유예기간이 있는 휴전 협정이었다. 사실 함정희도 자포자기하는 마음이었다. 단가가 안 맞으니 학교급식과 같은 기관 거래처를 뚫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각서 만기일이 다가오던 6월 19일, 남편이 배달을 갔다 왔는데 공장 정화배수장치가 서 버렸다. 24시간 가동해야 하는 시설이어서 남편이 그 장치를 고친다고 손을 밀어넣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계가 돌아가면서 장갑이 빨려 들어가 손가락 두 개가 으스러지고 말았다.
 
남편은 우석대병원에서 꼬박 한 달을 치료받고 7월 20일 퇴원했다. 집게와 중지를 잃어버린 손을 함정희는 마주할 수가 없었다. 모두 자신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 탓에 불행이 온 것 같았다. 각서에서 약속한 6월 30일도 이미 훌쩍 넘긴 상태였다.

콩의 꽃말은 언젠가 올 행복 

이제 그만 깃발을 내리려는 찰나, 100여 개 점포를 가진 유기농유통업체 초록마을에서 납품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막 숨이 넘어가려는 때에 산소호흡기가 찾아온 것이다. 2016년에는 'BUY 전주업체'로 선정돼 함정희가 만든 콩제품이 전주 시내 30~40군데 학교에 급식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조금씩 국산콩 식품의 판로가 열린 것이다.
 
함정희는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8남매의 둘째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살에 전라북도 공무원이 되었다. 27살에 남편과 선을 봤는데 두부 공장을 한다는 얘기에 반했다. 평생 두부는 원없이 먹을 것 같아 결혼을 결심했다. 그만큼 함정희는 콩을 좋아했고 어려서는 콩자반 없이는 밥을 안 먹을 정도였다. 얼굴 모양도 둥글둥글 콩을 닮았다.
 

함씨네 밥상 장독대에서 함정희 함씨네 밥상을 운영할 때 모든 장을 직접 담궈 손님 상에 내놓았다. ⓒ 민병래

 
콩의 꽃말은 "언젠가 올 행복", 함정희는 이를 신념처럼 믿었다. 덕분에 여러 콩독립군을 만나고 좋은 거래처도 하나씩 만들어왔다. 이제는 본인 성을 따고 '다 함께 가자'는 뜻도 담아 '함씨네 식품'으로 상호도 바꿨다.

그리고 국산콩을 이용한 연구개발도 시작했다. 소기업이고 전통공법에만 의존했던 터라 두부 외 제품 개발은 꿈도 못꿨다. 그런 그를 대학으로, 연구개발로 이끈 게 막내아들이었다.
 
함정희는 46살이던 1998년에 막내를 가졌다. 시댁이나 남편은 노산이어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함정희는 잘 지켜냈다. 그리고 할머니같은 엄마가 아니라 자랑스런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54살에 기전대학 식품과학과에 야간으로 입학했다. 주경야독한 덕에 과 수석으로 장학금도 탔고 석사, 박사 공부를 이어갔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제품이 바로 '쥐눈이콩 마늘 청국장환'이다. 함정희는 한방에서 약콩으로 여기는 쥐눈이콩을 선택해 청국장을 만들었다. 그해 수확해서 10도 이하에서 신선하게 보관한 콩을 숨쉬는 솥단지에서 뭉근하게 7~8시간을 끓여낸다. 그리고 40도가 넘는 온돌방에서 훈훈한 기운으로 꼬박 3일을 띄운다.
 
이렇게 공을 들인 청국장에 마늘을 배합했다. 그런데 마늘을 갈아서 첨가하면 끈적거리는 현상 때문에 약품처리가 필수적이었다. 함정희는 약품이 들어가지 않은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마늘 성분을 5%에서 35%까지 다양하게 조절하면서 마침내 화학적 첨가 없이 '환'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노력으로 제조과정 특허와 함께 2007년 농림부 '신지식 농업인장'을 받게 되었다. 또 상온에서 '2년 보관가능' 허가까지 받았다. 

메주가 혼수품이던 우리 조상님들
 

그의 저서 '기적의 콩'에 사인하는 함정희 그는 54살에 야간대학에 들어가 식품학을 공부했다. ⓒ 민병래

 
콩은 우리나라와 만주일대가 원산지로 철기시대부터 재배됐다고 한다. 두만강(豆滿江)이라는 이름도 콩이 가득 찼다, 콩을 가득 실은 배가 온 강을 뒤덮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그 시절 메주가 혼수품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콩의 종자를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3000종, 중국은 6000종을 발굴 보존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정부 차원보다는 전남대 정규화 교수가 일생 동안 우리나라 산하의 콩종자를 찾아다니며 현재 7000종을 발굴 보존하고 있다. 함정희는 정규화 교수와도 손을 잡았다. 국산콩식품이 잘되려면 재배콩이 좋아야 하고 재배콩은 그 뿌리인 야생콩종자가 버텨줘야 하기 때문이다.

함정희는 2001년에 돌아갈 길을 끊어버렸다. 그의 말대로 수십억 이상을 '국산콩 독립'을 위해 쏟아부었고 남편을 포함 여섯 가족의 애환을 여기에 쏟아부었다. 콩은 자기희생을 통해 된장, 간장, 청국장같은 새로운 먹거리로 탄생한다. 이런 장류나 콩나물을 먹는 민족은 우리가 유일하다. 그러니 콩과 장류는 우리 역사와 함께 걸어온 셈이다.
 
함정희가 원하는 것은 '성공한 여류기업가'나 '독립군'이라는 칭호, 대통령 표창이 아니다. 콩을 뭉근하게 끓여내는 정성, 메주를 띄우면서 기다리는 마음, 거기에 바람을 포개어 넣고 햇빛 줄기를 담아낼 줄 알았던 지혜, 그것을 우리네 삶 속에서 되살리는게 그의 진정한 바람이다.

<못다 한 이야기>
 
1. 식품음료신문 2005년 4월 25일자에 따르면 당시 국내콩 수요량은 총 171만 톤이고 자급률은 8%인 13만 톤 내외다. 그 외에는 다 NonGMO와 GMO 수입콩이다. 현재 수입 GMO콩은 주로 콩기름에 쓰이고 나머지 식품에는 사용하지 않게 되어 있다. 수입 NonGMO 콩은 식용유 이외 장류, 두부 등 식품에 사용된다.
 
2001년도 이전에는 GMO식품의 분류, 관리,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나 분류가 미흡해서 2001년 함정희 공장에서는 NonGMO수입콩과 GMO수입콩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 현재 초록마을은 대상그룹의 계열사가 되었고 함씨네식품과는 거래가 중단된 상태다.
 
3.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사 ㈜하세에서 윤학렬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함씨네 식품' 함정희 대표의 토종콩 분투기를 영화로 제작 중이다. 2021년 칸 영화제에 출품할 예정이다.
 
4. 2018년 11월 22일 서울시 마포구 신촌 케이터틀에서 함씨네토종콩식품 함정희 대표가 대한민국 노벨재단으로부터 노벨생리의학상 대한민국 후보로 인증되어 인증패를 전달받은 바 있다.
 
5. 아쉽게 지금은 휴업 중이지만 함정희는 전주 한옥마을에서 콩음식전문점 함씨네 밥상을 3년간 운영했다. 앞으로는 우리 토종인 '앉은뱅이 밀'과 '국산유기농콩'으로 '콩국수음식점'을 선보여 우리밀도 지켜내고 건강한 먹거리를 보급하고자 한다.
 
이 앉은뱅이 밀은 이름대로 키가 50~80cm밖에 안되지만 수확량이 많고 병충해에 강하다. 이를 미국의 농학자 노먼 블로그가 '소노라64'로 개량, 멕시코에 보급했다. 이 종자로 멕시코는 밀수입국에서 밀수출국이 되었고 노먼 블로그는 식량증산과 녹색혁명을 이끈 공로로 197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앉은뱅이밀이 정작 우리나라에선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60년대에 값싼 밀이 들어오고 1982년 밀 수입자유화, 1984년에는 정부가 밀수매를 중단하면서 우리 밀은 거의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런데 진주에서 백관실이 금곡정미소를 하면서 우리 고유 종자 '앉은뱅이밀'을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함씨네 밥상은 비록 절반의 성공이었지만, '우리밀'과 '국산콩'을 결합한 '콩국수음식점'은 꼭 성공을 해내겠다는 마음을 벼리고 있다.
 
6. 안학수 교수와 함께 함정희에게 영향을 많이 미친 분으로 이경해 열사가 있다. 그는 전라북도 장수군 출신으로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WTO 반대집회를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농민운동가다. 함정희는 국산콩 독립선언을 한 이래 농민운동가 이경해의 묘소를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기일이면 참배를 한다. 이경해의 삶이 의미있게 다가와서다. 이전에는 존재조차 몰랐지만 콩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함씨네 밥상은 올 4월까지 3년을 운영했다 많은 이들의 아쉬움 속에서 문을 닫았다. ⓒ 민병래

 

<함씨네 밥상에 남긴 손님들의 이야기>

함씨네 밥상 방명록에는 수천명의 손님들이 남긴 이야기와 격려들이 있다. 함정희의 노력과 정성을 볼 수 있지만 아쉽게도 여기서는 일부만 소개한다. 지금은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함씨네 밥상 방명록은 여러권이 쌓여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얘기들이 많다. ⓒ 함씨네 밥상 제공

 

함씨네 밥상 방명록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얘기들이 많다. ⓒ 함씨네 밥상 제공

   

함씨네 밥상 방명록중에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얘기들이 많다. ⓒ 함씨네 밥상 제공

     

함씨네 밥상 방명록중에서 -전주시장의 사인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얘기들이 많다. ⓒ 함씨네 밥상 제공

       

함씨네 밥상 방명록중에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얘기들이 많다. ⓒ 함씨네 밥상 제공

   

함씨네 밥상 방명록중에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얘기들이 많다. ⓒ 함씨네 밥상 제공

  

함씨네 밥상 방명록중에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얘기들이 많다. ⓒ 함씨네 밥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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