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6 19:47최종 업데이트 20.08.16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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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촌 농악단 전 단장 정인삼 선생. ⓒ 양한박사

     
정인삼이 한국민속촌 농악단을 떠난 것은 지난해인 2019년. 1974년 창단 때부터 단장을 맡았으니 46년간 몸담았던 직장이며 무대였다. 상쇠이자 맏형으로 농악단을 이끌었던 정인삼. '농악의 대부'라는 그가 민속촌 마당에서 반 백년 동안 나섰던 공연 횟수는 얼마나 될까? 함께 신명을 나누며 어우러졌던 관객 수는 헤아릴 수나 있을까?
 
그런데 한국민속촌에서 "공연물을 유행에 맞게 개편한다"는 방침을 세움에 따라 그는 지난날을 추억으로 묻고 정든 곳을 떠나야만 했다. '농악의 올곧은 계승자'라 불리는 정인삼. 농악을 위해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은 그다. 정인삼은 언젠가 농악단이 부활할 것이라 믿으며 지금도 하루하루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농악사관학교를 만들다

"단장님, 애들이 도망갔는데요?"
"뭐?! 또?"
 
정인삼은 지난 밤 공연 준비를 다듬느라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몸은 무겁지만 부단장의 화급한 목소리에 잠이 퍼뜩 깼다. 기숙사 창문에는 초겨울이라고 밤 사이에 서리꽃이 가득했다. 서둘러 단원들 방으로 건너가 보니 짐까지 싹 빠졌다.
 
한국민속촌은 1974년 개장할 때 농악단 창단에 큰 공을 들였다. 농악이 민속예술의 상징이고 야외 공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5명 정도는 돼야 할 단원을 모으는 게 쉽지 않았다. 당시 농악꾼들은 농사일을 하며 마을 행사 때나 기예를 선보이는 정도여서 전업 단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때 정인삼이 주도해 1974년 9월1일 전주농고 출신으로 농악부를 창단, 한국민속촌에 들어가 농악단이 출범할 수 있었다.
 
정인삼은 1942년생으로 전북 임실 백련리에서 태어났다. 150마지기나 되는 논을 갖고 있던 그의 집 외양간에는 마을 행사 때 쓰는 징·꽹과리·북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해마다 섣달이 되면 마을 장정들이 사랑방에 모여, 정월 대보름 행사에 쓸 고깔이나 깃발을 새로 만들고 악기를 손보며 장단을 맞추곤 했다. 정인삼은 갓난쟁이 때부터 이런 장면을 보며 자랐다.
 
커서 전주농고에 진학한 그는 대처 전주에서 태평양 가극단과 여성국악단의 공연을 즐겨 구경하며 춤과 노래의 세계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자연스레 학교에서 무용부·삼현부·창악부(나중에는 농악부로 통합)가 있는 '농촌예술반'에 가입했다. 여기서 그는 '삼현육각' 소리에 사로잡혔다. 고향 마을에서 어릴 적 들었던 장단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징과 북소리는 심장을 뛰게 만들었고 피리 소리는 몸을 휘감았다. 안개속을 걷는 듯 비단 길을 밟는 듯했다. 
 
농악부를 주도하던 정인삼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고 싶었다. 1965년 서울 덕수궁에서 열리는 대회에 맞춰 후배 최배현, 임한섭과 함께 꽹과리의 명인 박남석(부안 줄포면), 장구의 명인 이명식(정읍군 영원면), 장성 전재성 선생을 찾아가 지도를 부탁했다.
 
명인들을 모실 학교 예산이 없었는데도 그들은 정인삼과 학생들이 기특하다고 추수가 끝나자 기꺼이 전주로 왔다. 정인삼은 기숙사 방 한칸을 비워서 선생들을 모시고 밥은 옆의 하숙집에서 준비했다. 세 분 선생은 막걸리 한 말, 소주 댓 병을 작은 항아리에 부어두고 배추김치 한 보시기와 젓가락 하나만 있으면 그저 만족해하며 열심히 기예를 전승해줬다.
 
선생들은 "각각 지대로 치는데 남의 것을 잡아먹지 말고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잘 때도 배 우에다 열 손꾸락 대고 장구 쳐봐라, 덩 다다 궁다구구, 덩 다다 궁다구구... 이러쿠롬"하면서 가르쳐주었다. 명인들 지도 덕에 전주농고 농악부는 일취월장해 전북대표로 참가한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이런 전주농고 농악부 출신들을 이끌고 정인삼은 74년 11월 6일 한국민속촌 농악단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민속촌에서, 단장을 과장급으로 대우하고 단원들에게 해마다 호봉 승급을 약속했지만 단원들은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당시 민속촌이 있던 용인군 보라리는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오지였고, 저녁 공연과 주말 공연을 하며 기숙사 생활까지 해야 하니 매우 답답해 했다. 그래서 단원을 훈련시키고 호흡을 맞춰 놓으면 오래 견디지 못하고 일부는 내빼 달아났다.
 
그래서 정인삼은 공연보다 농악단을 유지하고 결원을 채워나가는 게 더 주된 업무가 되다시피했다. 나중에는 도망가면 도망가는 대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뜻이 없다면 붙잡아놔도 언젠가는 떠날 몸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이날도 부단장은 단원들을 찾아나서겠다고 했지만 정인삼은 그를 만류했다.
 
전국 농업고등학교를 찾아다니다
 
"용인에서 고흥까지 내려오신다구요, 여기가 땅끝 마을인데..."
"네, 보수도 차비도 필요없습니다. 농악에 관심있는 학생들을 모아주시면 됩니다."
 
전남 고흥농고 교장과 통화를 마치고 정인삼은 연습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농악반 결성을 돕고 지도하겠다는데 "무얼 그렇게까지 하냐"는 태도였다. 정인삼은 전국의 농업학교와 상업학교에 전화를 걸어, 민속촌 농악단 단장인데 농악부 창단을 돕겠으니 학생들을 모아달라고 통 사정을 했다. 
 
그렇게 농악부를 만들어내고 연습을 도우면서 뜻과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민속촌 농악단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해서 한국민속촌 농악단을 '농악사관학교'로 일궈냈다. 그는 단원들의 대학 진학도 도왔다. 예술대학들을 찾아다니며 농악단 단원으로 1년 활동하면 입학할 수 있게끔 (요즘 말로) '산학협력'을 맺었다. 이 대학 진학 방안이 어린 단원들에게 희망을 주면서 농악단이 자리 잡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가장 큰 애로는 농악단 단장을 하면서 전국의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시간, 경비, 교통수단 모두 쉽지 않았다. 74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이 되었지만 용인에서 가까운 서산이나 금산 같은 충청도 지역조차 하루 길이었다. 또 월급이 많지 않은 처지에서 모두 자기 돈을 들이자니 그의 통장은 늘 잔고 부족이었고 집 한 채 마련은 그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정인삼 선생. ⓒ 양한박사

 
정인삼은 잃어버린 우리 농악과 민속놀이 복원에 앞장서기도 했다. 1993년에 충남결성 농요를 찾아나설 때는 동네 노인들이 모두 농요의 대가여서 즐겁게 작업했다. 1994년에는 대전 부사동 칙석놀이를, 2003년에는 대전 서정동(문창동) 엿장수놀이를 복원했다. 그는 복원된 놀이를 민속촌으로 가지고 왔다. 되살린 민속놀이를 선보일 때는 관객들이 집중할 수 있게 시간을 줄였다. 그가 명인들과 함께 복원한 호남우도(김제, 정읍, 나주)의 농악은 사흘이 넘는 대작이었다. 이것도 여덟 시간 내외로 재구성했다.
     
이런 경험 덕에 정인삼의 연출 능력 또한 성장해, 1986년 아시안게임 개회식에서 '고놀이', 1988년 서울올림픽 폐회식에서 '우정'이라는 작품의 감독을 맡았다. '고놀이'는 은광여고 800명, 수도공고 450명, 성동공고 700명, 서산농고 50명이 참여해 만든 역동적인 작품이었다. 당시 '고놀이'는 문화예술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88 서울올림픽'에서 재연되기도 했다.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다
 
"황선진이 어디 있어?"
 
경찰서 정보과 형사라는 이들이 구두를 신은 채 민속촌 연습실로 들어와 다짜고짜 정인삼을 몰아세웠다. 단원들은 연습을 멈춘 채 어찌할 줄 몰랐다. 대학생 풍물패 지도가 기어이 사달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던 그는 대학 풍물패 결성까지 거들었다. 수원에 있던 서울농대생들이 직접 민속촌으로 와서 연습하고 지도를 받았다. 그런데 75년 4월 2일 서울농대에서 열린 '박정희 정권 규탄대회'에서 김상진이 양심선언문을 읽다가 할복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추도식이 열리는데, 서울대 72학번 황선진이 이때 쓰일 상여가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민속극가면연구회 회장으로 정인삼에게 농악 지도를 받고 있던 터였다. 황선진의 부탁을 정인삼은 흔쾌히 들어줬고, 5월 22일 열린 추도식에서 그 상여가는 분위기를 주도했다. 결국 추도식을 이끈 그는 경찰에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지난 사연을 얘기하는 정인삼. 한평생, 농악인생 굴곡많은 삶이다. ⓒ 민병래

 
서울대를 담당하던 서울 남부경찰서는 탐문수사 끝에 황선진이 민속촌 기숙사에 기거하며 정인삼에게 지원받았음을 알고 농악단을 급습한 것이다. 다행히 황선진은 형사들이 들이닥치기 전날 몸을 피해 체포를 면했다. 정인삼은 혹독한 심문에 시달리면서도 "민속연구에 필요하다고 해서 도와줬을 뿐"이라며 버텨냈다.    80년대 들어서도 정인삼은 황선진을 통해 연결된 고려대 등 각 대학 풍물패 지도를 계속했다. 배우던 대학생이 수배 신세가 되면 민속촌 기숙사로 와 은신을 청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정인삼은 순순히 받아주고 그 학생으로 하여금 저녁 공연 때 깃발이나 만장을 들게 해 감시의 눈을 피했다. 장구나 꽹꽈리는 기량이 일정 수준이 돼야 다른 단원들과 장단을 맞추지만 깃발이나 만장은 누구나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배자들이 잠자리가 없을 때는 용인 보바리 민속촌 기숙사가 임시나마 피할 수 있는 쉼터가 되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한국민속촌 내부에서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돌았고 정보기관에서는 잠복도 했다. 국립극장같은 곳에서 외부공연이 있는 날에는 시경 형사들이 탈의실까지 들어온 적도 있었다. 대동놀이인 농악은 예로부터 가난한 백성, 쫓기는 백성을 품어줬다. 농악은 무지랭이 농꾼들이 양반네들 학정에 맺힌 한을 푸는 놀이마당이다. 다른 연희들, 본산대놀이나 하회별신굿 탈놀이도 모두 양반을 풍자하는 서사가 담겨있다. 그래서 민속촌으로 찾아드는 제자들을 한 번도 내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모두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농악단이 재창단될 날을 준비하며
 
사연 많은 농악인생 50년. 정인삼도 이제 내일모레면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그는 지금도 새벽 4시 반이면 눈을 떠 민속촌 뒷산을 한 바퀴 돌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아침밥을 든든히 먹어 기운을 북돋우고 그 다음 연습장에 선다. 농악지존이라고, 우리 춤의 명인이라 하지만 하루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는 한 평생 농악과 살아오면서 세 분 선생을 통해 우리 전통춤과 민속춤을 익히고 전승해왔다. 전주농림고에서 만난 정형인 선생에게는 고째승무와 기본무를 배웠다. 그는 버들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 아니 흔들리는 듯한 춤사위가 진짜라고 했다. 20년은 추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승무의 몸짓은 학과 같아야 하고 백로를 닮아야 하거늘... 한 평생 묵은 먼지 탓인가 학은 저만치 멀리 있는 느낌이다.
     
박금슬 선생은 정인삼에게 춤의 기본을 다시 세워주었다. 그녀는 "세상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알아주면 그걸로 만족한다"며 30여 년 이상 명인들을 찾아다녀 우리 춤의 계보와 기본 동작을 정리한 인물이다. 정인삼은 그녀로부터 이론적 세례를 듬뿍 받았다.
 
조선의 마지막 춤꾼 이동안은 정인삼에게 소고춤과 진쇠춤 등을 가르쳤다. 화성재인청의 도대방(책임자)이었던 그의 기예는 정돈 되고 품격 있었다. 여기에 정인삼은 농악에서 익힌 북춤과 상쇠를 하며 익힌 쇳가락을 보태 조금 더 힘차고 격조 있는 춤사위를 만들어냈다.

 

한국민속촌 농악단 전 단장 정인삼 선생. ⓒ 양한박사

 
하루 다섯 시간 동안 이렇게 그는 농악의 악기와 더불어 세분 선생에게 전수받은 춤을 수련한다. 그야말로 가무악 일체다. 가락이 있어야 춤이 한 발자국 나가고 춤이 한 발자국 나가야 가락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수련이 끝나면 제자들 지도가 남아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6호이며 우리춤보존회 회장인 그는 농악과 민속춤, 제자들 사랑에 빠져 장가도 못 간 할아버지 총각이다. 그가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유별나다. 자신보다 훌륭한 제자를 배출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고, 다시 태어나면 자신이 지도한 제자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가 오늘도 민속촌 마당에서 다시금 농악단이 신명나게 뛰놀 날을, 또 정통민속춤의 신바람나는 향연이 펼쳐질 날을 꿈꾸면서 구슬땀을 흘릴 것이다. 어찌보면 그것은 꼭 민속촌 마당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다면 우리 산하 어딘들 어떠하리...
 
못다 한 이야기

1. 삼현육각은 향피리 2·젓대 1·해금 1·북 1·장구 1로 구성되는 악기편성의 총칭이다. 이것이 삼현육각의 기본 편성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나발 2·피리 2·태평소 2의 편성도 삼현육각이다. 이런 편성을 육잡이 또는 육잽이라고 부른다. (출처:한겨레음악대사전)
 
2. 1965년 정인삼은 전국민속예술대회를 준비하면서 농악의 개인놀이와 호남우도농악의 전판을 모두 습득하게 된다. 또한 판소리 명창인 홍정택에게 판소리, 호적시나위의 명인인 방태진에게 호적시나위, 단소산조의 명인인 전추산에게 단소, 전주 민삼현의 피리로 유명한 최장복에게 피리를 배우면서 음악적 세계를 넓혔다.
 
3. 그가 발굴한 농악과 민속놀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금곡리농악, 용인시 백암면 용천리농악, 화성시 봉담면 내리농악, 광주시 광지원 농악, 포천가노농악, 용인시 기흥읍 서천리농악, 강화군 황정리농악,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농악, 이천시 대월 면 이천거북놀이, 고양시 송포동 송포호미걸이, 여주군 흔암리 쌍용거줄다리기, 강화용 두레질소리, 평택민요, 충남물페기농요, 충남 부여 용정리호상놀이, 충남 결성농요, 대전부사동칙석놀이, 대전 도안동 옹녀봉 기우제, 대전 목상동 들말두 레놀이, 대전 바니구 홰싸움놀이, 대전 버드내 보싸움놀이, 대전 서정동 엿장수 놀이, 정선농악, 원주매지농악, 충남 금산농악, 충남 서산시 웅소성리 호상놀이 등이다.
(출처: 경기고깔소고춤, 31쪽, 경기문화재연구원 발간)

4. 정인삼은 학생농악의 발전을 위해 많은 교육을 했다. 지역적으로 보면 경기도 수원여자고등학교, 금곡종합고등학교(금곡고등학교), 광주종합고등학교(광주중앙고등학교), 태성중학교, 수지중학교, 원삼중학교, 강원도 정선고등학교, 원주농업고등학교(영서고등학교), 충청남도 유성 농업고등학교(유성생명과학고), 서산농림고등학교(서산중앙고등학교), 연산상업고등학교(충남인터넷고등학교), 주산농업고등학교(주산산업고등학교), 공주농업고등학교(공주생명과학고), 충청북도는 금산농업고등학교(금산산업고등학교), 청주농업고등학교, 전라북도 전주농업고등학교(전주생명과학고), 광주농업고등학교(광주자연과학고) 등이다
 
5.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인삼이 이동안에게 배운 중요한 춤의 하나가 신칼대신무이다. 신칼대신무의 유래에 대한 문헌기록은 충분히 나와 있지는 않으나 구전에 의하면 아주 오래 전에 아왕이라는 임금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 임종에 이르니 그 딸인 공주가 하얀 지전을 단 신칼을 들고 춤을 추는데 아버지의 가시는 길에 잡귀의 침범을 막고 그 길을 닦아 명복을 비는 춤을 춘데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신칼대신무는 경기도 화성, 수원, 안성, 광교, 진안 지방에서 신칼을 상징하는 두 개의 신장대의 양 끝에 흰 창호지로 길게 한지를 잘라 이것을 양 끝에 소담하게 묶어 양손에 이 신칼을 들고 허공을 향해 던지며 받아들이는 춤으로 인간이 현실에서 다 못한 회한에 맺힌 원과 희구해온 삶을 춤으로써 펼치는 정신적인 세계로 창조해주는 중후하고 뜻 깊은 무용이다.
 
6. 이동안의 스승은 김인호다. 김인호는 전통춤의 풍요로운 보고였던 화성재인청 출신으로 전통춤과 음악, 줄타기 등 우리나라 전통 민속의 전반적인 기예를 지니고 있었으며 광대놀음 또한 능통한 예인이다. 김인호는 '김장량 할아버지', '북돌이 할아버지'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경기도 용인을 대표할 수 있는 예인이다. 김인호의 스승은 이날치이며, 1915년 광무대와 연흥사에 있던 '경성구파 배우조합'의 부조합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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