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 20:29최종 업데이트 20.09.0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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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의 대결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냉혹한 정치 생리를 보여준다. 양국이 동맹을 맺은 것은, 백제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고 남쪽을 압박하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백제는 한강유역에서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신라보다 더 오래 이곳을 지배했다. 그래서 이곳에 대해서는 백제의 연고권이 더 단단했다. 성왕은 진흥왕과의 동맹을 발판으로 집권 29년차인 551년 이곳을 탈환했다. 이 상황은 한국 역사서보다 <일본서기>에 더 명확히 서술돼 있다.
 
이 해에 백제 성명왕(聖明王, 성왕)이 직접 자국과 2국(신라·가야)의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서 한성을 빼앗았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쳤다. 모두 6개 군(郡)의 땅을 회복했다.

왕조의 발상지를 되찾았으니 성왕의 기쁨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지인 진흥왕이 다른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어제의 동맹, 오늘의 적

중국은 서기 304년부터 5호 16국 시대(다섯 유목민에 의해 16국 명멸)의 혼란에 빠졌다가, 386년에 건국된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하면서 혼란이 다소 수습됐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예전처럼 중국을 향한 서진 정책을 밀어붙일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내놓은 카드가 장수태왕(태왕이 정식 표현) 때인 427년의 평양 천도다. 국가전략을 서진주의에서 남진주의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러자 백제·신라·가야는 위기에 봉착하게 됐고, 고구려의 압박으로부터 왕조를 유지하기도 벅찼다. 이런 속에서 성왕과 진흥왕은 단순히 왕조의 명맥을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왕조의 중흥을 이루겠다는 높은 목표 하에 손을 잡았다. 이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중흥을 꿈꿨지만, 고구려의 압박을 막겠다는 공통의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동지였다.

하지만 동지인 동시에 라이벌이었다.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관계였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제가 한강유역을 되찾은 지 2년 만의 일이다. 553년에 벌어진 이 사건을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편은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고 신주(新州)를 설치했다"는 말로 표현한다. 이 결과로 생겨난 것이 555년 북한산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서울 용산구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성왕이 뒤통수를 맞은 것은 군사력의 열세 때문이 아니었다. 진흥왕을 철석 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진흥왕은 가만히 백제의 뒤를 기습해서 백제의 신(新)점령지를 탈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병부령 이사부가 지금의 충청도 동북부로 출병하는 한편, 대아찬 거칠부가 구진·비태·탐지·비서·노부·서력부·비차부·미진부 등 장군 여덟 명을 거느리고 죽령(충북과 경북의 접점) 이북으로 출병했다. 백제는 이것을 동맹에 의한 출병으로 판단하고 매우 환영했다.

성왕은 신라를 일단 진정시킬 목적으로 자기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 <백제본기>는 "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갔다"는 짤막한 문장으로 이 사실을 알려준다. 딸을 시집보낸 성왕은 '사위'에 대한 복수전에 나섰다. 시집보낸 지 10개월만의 일이다.

성왕의 딸이 시집간 것은 553년의 음력 10월이고 성왕이 복수전에 나선 것은 554년의 음력 7월이다. 이 사이에 윤11월이 있었다. 그래서 두 사건의 간격은 10개월이다. 이 복수전은 성왕이 신라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했다가 목숨을 잃는 것으로 끝맺음하게 된다. 성왕과 진흥왕의 라이벌 대결은 백제의 영토 상실과 성왕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중국 땅까지 지배했던 백제

이로 인해 백제가 잃고 신라가 얻은 것은 매우 컸다. 이에 관한 한국사 교과서들의 서술은 비슷하다. 일례로, 2019년 11월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동아출판의 <고등학교 한국사>는 진흥왕의 업적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이후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도 손에 넣었다. 또한 대가야를 정복하는 한편,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런 서술에 따르면, 동맹 파기로 백제가 잃은 것은 한강유역이고 신라가 얻은 것은 한강유역에 더해 대가야와 함경도까지다. 하지만 이 같은 서술은 동맹 파기로 인한 결과를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성왕이 잃은 것과 진흥왕이 얻은 것이 훨씬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백제는 탐라와 더불어 해상 강국이었다.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도 그 때문이다. 백제는 근초고왕·근구수왕이 있었던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후반까지 북경 위쪽인 요서 지방을 지배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5세기 후반에도 중국 진출에 성공했다.

5호 16국 시대에 이어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전환됐다. 대혼란기였던 5호 16국 때와 달리 남북조 시대에는 남중국과 북중국에 원칙상 각각 1개의 왕조가 있었다. 이 시기의 남중국을 지배한 왕조 중 하나가 제나라(479~502)다. 제나라의 역사를 담은 <남제서>의 백제열전에 성왕의 전전(前前) 임금인 동성왕(재위 479~501)이 495년에 보낸 국서가 인용돼 있다.

국서에 따르면, 백제는 490년에 북중국의 북위로부터 침공을 당했다. 하지만 도리어 역습을 가해 북위를 패퇴시켰다. 이로 인해 "바닷물이 들끓듯"했다고 동성왕은 국서에서 말했다. 서해상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백제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고 북위의 잔존 병력을 계속 추격했다. 그 뒤의 결과를 국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기회를 틈타 쫓아가서 베니, 시체가 들판을 붉게 만들었습니다.

서해상에서 북위 군대를 격파한 뒤 계속 추격해서 들판을 붉게 만들었다고 했다. 이는 백제군이 북위 땅에 상륙해 승리를 거뒀음을 의미한다. 그 후의 상황을 기록한 당나라 역사서 <구당서>의 동이열전은 백제 영토를 설명하면서 "서쪽으로는 바다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며"라고 말했다.
 
월주는 상하이 근처 절강성(저장성)에 있었다. 이는 동성왕의 군대가 월주까지 갔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이 부대가 중국 본토에 상륙해 영토를 차지했으며 그 후에 백제 군대가 월주를 차지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상고사>는 위의 <구당서> 기록을 인용하는 대목에서 "조선 역사에서 바다 건너에 영토를 둔 때는 백제 근구수왕과 동성대왕의 두 시대뿐"이라며 "<문헌비고>에서 '월나라왕 구천의 옛 도읍을 둘러싼 수천 리가 다 백제 땅'이라고 한 것도 이것을 가리킨다", "<만주원류고>에서 '금주·의주·애혼 등지가 다 백제'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동성왕 때 확보한 중국 땅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신채호는 그 시점을 동성왕의 다음다음인 성왕 때로 추정한다. <조선상고사>는 이렇게 말한다.
 
백제는 이 같은 해외 식민지들을 언제 잃었을까? 성왕 초년에 고구려에 패하고 말년에 신라에 패해 국세가 약해졌으니, 이때 해외 식민지들을 거의 다 잃었을 것이다.

신채호의 추정에 따르면, 성왕의 한강유역 상실은 백제가 중국 영토를 잃는 원인이 됐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상실을 겪었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진흥왕은 함경도 진출 이상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청나라 정부가 발행한 <만주원류고>는 중국 길림성이 한때는 계림 즉 신라 땅이었다고 설명한다. <만주원류고>는 "계(鷄)와 길(吉)은 음이 서로 부합되며 여러 지리적 관계를 조사 해봐도 역시 딱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길림성이 원래는 계림으로 불렸다가, 계림과 중국 발음이 같은 길림으로 바꿔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만주원류고>는 발해(698~726)가 세워지기 전까지 신라가 길림을 지배했다고 말한다. 발해가 세워지기 전에 신라가 만주를 공략할 기회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589년 이전뿐이었다. 589년 이후에는 거대 중국의 등장으로 인해 고구려마저도 중국을 상대하기가 벅찼다. 589년 이전에 신라의 대외정복이 활발했던 기간은 진흥왕 때뿐이었다. <조선상고사>는 이렇게 말한다.
 
<만주원류고> 및 <길림유력기>에 따르면, 길림은 본래 신라의 땅이다. 길림이라는 표현도 신라를 가리키는 계림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진흥대왕이 고구려를 쳐서 강토를 개척하고 지금의 길림 동북까지 보유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삼국사기>가 배제한 역사

이처럼 진흥왕은 성왕을 물리치고 한강유역을 빼앗은 뒤 여세를 몰아 고구려까지 몰아붙였다. 555년에 북한산순수비를 세운 그는 568년 함경도에 황초령순수비와 마운령순수비를 세웠다. 중국 역사서에 의하면 그는 압록강을 건너 길림성까지 빼앗았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밖에 영토를 둔 적이 있다는 이 같은 사실들이 역대 중국 왕조들이 편찬한 정사(正史)에 엄연히 적혀 있지만, 오늘날 한국에는 이를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역사학자들이 적지 않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참고한 게 중국 정사들이며, 그가 위의 사실들을 임의로 배제했으므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위의 사실들이 진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 위키커먼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은 '만주로 진출하자'는 묘청의 북진운동을 진압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의 신조는 한반도 중심주의였다. 그가 자신의 신조를 합리화하고자, 만주에 도읍을 둔 적이 있는 고구려를 제외한 신라와 백제의 중국 진출을 <삼국사기>에 아예 소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김부식이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면, 성왕과 진흥왕의 라이벌 대결은 훨씬 더 극적으로 후세에 기억됐을 수도 있다. 성왕이 진흥왕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일로 인해 백제가 중국 영토까지 덩달아 잃고 신라가 여세를 몰아 함경도를 지나 길림까지 올라가는, 훨씬 더 스케일 큰 그림이 우리 기억에 남게 됐을지도 모른다.

<삼국사기>로 인해 많이 감춰지기는 했지만, 성왕과 진흥왕의 라이벌 대결은 중국 동해안과 만주의 지배권에까지 파급력을 끼친 웅장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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