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30 19:46최종 업데이트 20.09.3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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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편집자말]

어떤 필기구도 좋습니다 ⓒ 김덕래

'필사(筆寫)'의 사전적인 의미는 '베껴 쓰다'입니다. 소설이나 시집, 세계명작이나 성서 등 무언가를 원본과 똑같이, 그대로 옮겨 적는다는 것입니다.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거나, 복사기 버튼을 눌러 내용을 그대로 복제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손을 놀려 오래 음미할 만한 가치 있는 문장들을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속에 새기는 일입니다.

필사의 매력은 팔색조의 무지개색 깃털처럼 다채롭습니다. 하나하나 다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단순히 '쓰는 행위' 이상의 맛과 멋을 뿜어냅니다.
 
먼저 필사는 필기구와 친해질 기회를 만들어줍니다. 제아무리 몸에 좋은 보약도 꼭꼭 씹어 삼켜 내 속에 넣어야 효능을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필사를 하기 위해선 필기구를 손에 쥐어야만 합니다.

핸드폰과 노트북만 있으면 세상 사는 게 어렵지 않은 요즘입니다. 나이 서른이 넘어도 초등학생처럼 삐뚤빼뚤하게 글씨를 쓰는 사람이 많고, 또 그것이 더는 흉이 아닌 세상이 되었습니다. 타고난 명필도 있겠지만, 글씨는 반복된 쓰기의 과정을 통해 점점 모양이 잡혀갑니다.

필사는 유연한 사고를 가능케 하고, '여지'를 갖게 합니다. 나도 모르는 새 디지털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당연시합니다. 하지만,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도 나름의 색으로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드센 성격을 부드럽게 하고, 뾰족한 말투를 둥글게 만듭니다. 우리에겐 '여지'가 필요하고, 필사는 그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필사를 할 때 어떤 도구로 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연필도 좋고, 샤프도 좋습니다. 볼펜도 나쁘지 않고 수성펜도 그렇습니다. 다만 오래 보존하기 위해선 실수로 손이 닿았을 때 번지기 쉬운 연필이나 샤프는 지양하는 편이 낫습니다.

까다로운 매력, 만년필 

볼펜은 1888년 '존 로우드(John Loud)'에 의해 개발되긴 했으나 완성도가 떨어져 상품화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1938년 '라슬로 조세프 비로(László József Bíró)'가 기능을 개선하면서부터 점점 주목받기 시작한 도구입니다.

타자기, 복사기와 함께 문구 3대 발명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볼펜은 가장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필기구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필기 시 어느 정도 필압을 줘야만 볼이 굴러가며 잉크가 나오는 구조라, 장시간 써야 할 때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볼펜은 잉크 잔여물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깔끔히 필기해 오래 보존하길 원하는 이들은 수성펜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수성펜 역시 볼이 구르며 잉크가 나오는 기본 개념은 같지만, 유성잉크인 볼펜에 비해 끈적임이 덜해 필압을 덜 줘도 되고, 또 잉크 잔여물이 거의 없어 깨끗한 필기가 가능합니다.

다만 사용하다 심이 돌출된 상태로 책상 위에 밤새 둬도 상관없는 볼펜과는 달리, 뚜껑을 닫아놓지 않으면 심이 말라버리는 특성이 있으니 보관에 주의해야 합니다.
 
만년필로 필사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여느 필기구와는 달리 자주 잉크를 채워줘야 하고, 또 수시로 써줘야 하며, 가끔가다 한 번씩 세척해 줘야 합니다. 만년필은 분명 성가신 '쓸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까다로움이 매력이기도 하지요.

필사용 만년필이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손에 쥐었을 때 편하고, 가격대가 부담 없는 모델이면 충분합니다. 다만 펜촉 사이즈가 너무 굵으면 작은 글씨를 쓸 때 잉크가 많이 나와 뭉개질 수 있으니, 가급적 EF(Extra Fine)촉이나 F(Fine)촉을 권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비싼 만년필이라고 더 글씨가 잘 써지는 건 아닙니다. 1만~2만 원 정도의 만년필도 내가 잘 관리하면 아주 오랫동안 쓸 수 있습니다.

만년필은 손에 힘을 빼고 써도 펜촉이 종이에 닿기만 하면 잉크가 술술 잘 나옵니다. 볼펜에 비하면 훨씬 힘이 덜 들어갑니다. 그런 이유로 장시간 필기 시 만년필은 썩 괜찮은 필기구입니다.

주방용 칼은 날이 잘 서 있어야 합니다. 날카로울수록 손가락을 베는 일이 덜합니다. 칼날이 예리하면 가볍게 손잡이를 쥐고 사용해도 음식 재료가 잘 썰리니 구태여 손에 힘을 줄 이유가 없습니다.

이가 나갔거나, 날이 무뎌진 칼은 어지간히 힘을 주지 않으면 재료 손질이 어렵습니다. 그러면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자칫 힘이 엉뚱한 방향으로 실리면 칼이 미끄러지며 사고가 납니다.

만년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팅 상태가 좋으면 힘을 주지 않고 써도 잘 써집니다. 만약 내가 쓰고 있는 만년필이 볼펜처럼 꾹꾹 눌러 써야만 잉크가 나온다면, 혹 밸런스가 틀어진 게 아닌지 살펴봐야 할 일입니다.
 
또 필사를 하면, 자연스레 글의 전반적인 구조를 이해하게 됩니다. 노래를 좋아해 자주 부르다 보면 어느 순간 발성과 호흡이 안정되고, 음색이 고와지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넘어져도 계속 타다 보면 어느 순간 두 바퀴로도 절대 넘어지지 않는 절묘한 균형감을 몸이 체득하는 것처럼,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시작해도 계속 쓰다 보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눈이 알아챕니다.

일단 눈에 들어온 정보는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었다가, 내가 글을 쓸 때 툭툭 튀어나옵니다. 필사는 무의미한 손놀림, 시간 낭비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으로 글과 친해지는 방법입니다.
 
물리적으로 시간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필사는 시간을 더디 흐르게 합니다.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쓰다 보면, 마치 글자가 그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상형문자 이전에 생겨난 최초의 글자가 '그림글자(Pictogram)'인 것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빠름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손으로 무언가를 옮겨 쓰는 필사는, 자칫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어리석은 행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필사를 시작하게 되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진한 맛과 향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필사는 느림의 미학 1장 1절입니다.

필사가 습관이 된다면 
 
필사는 내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어제 밥을 먹었다고 오늘 내내 굶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난주 운동했으니, 이번 주는 할 필요 없다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기를 쓰듯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해야 내 몸에 익습니다.

회사 업무나 학업에 쫓겨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경우라 해도, 하루 한 줄이라도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습니다. 일단 필사가 몸에 배면, 되레 쓰지 않을 때 어색한 기분이 듭니다. 해야 할 일을 빼먹은 것만 같아 허전해집니다. 그러는 새 글씨는 점점 모양이 잡혀갑니다.

처음엔 내가 쓴 글씨를 내가 봐도 뭘 쓴 건가 싶었는데, 이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글씨가 되어 흡족한 기분이 듭니다. 굳이 손글씨를 쓰지 않고도 별 불편 없이 살 수 있는 디지털 세상이라, 역설적이게도 반듯한 글씨 한 줄이 자신감을 살려줍니다.

평범하게 생긴 얼굴이더라도, 기가 막히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을 보면 다시 보게 됩니다. 하물며 미처 예상 못 했는데 글씨를 빼어나게 쓴다면 말할 것도 없지요. 반듯한 필체는 사람을 한 번 더 눈여겨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자신감은 경쟁력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상태로 걸으면 실제보다 왜소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설령 남들보다 체구가 작더라도 어깨를 펴고 턱선을 세워 걸으면 당당해 보인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좋은 습관이 나를 지금보다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줍니다.
 
무엇보다 필사는 마음 건강을 튼튼히 하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명절인데도 정부가 앞장서 이동 자제를 호소하는, 생각도 못한 2020년 추석을 맞았습니다. 모처럼 연휴를 맞아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보채는 아이들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할 게 분명합니다.

우리는 몸의 건강은 규칙적인 식습관과 운동으로 유지하면서도, 마음의 건강은 소홀히 여기곤 합니다. 몸이 건강하면 마음도 그럴 것이라 지레 짐작하기 쉽지만, 아무리 체격이 건장한 사람이라도 약해진 마음의 빈틈에 우울감이 스며들면 사는 의미를 잃고 맙니다.

마음의 건강은 쉽게 드러나지 않기에 악화되기 전엔 주변에서 알아채기 힘듭니다. 스스로 관리하는 게 최선입니다. 필사는 마음 근육을 튼튼히 해주는 오직 나만의 전용 운동기구입니다. 필사 마니아인 김동기씨는 말합니다.

"2017년 1월부터 필사를 시작했어요. 마음을 가다듬을 요량으로 시작했는데, 이보다 더 좋은 마음수련이 없어요. 아이들은 다 커 결혼한 지 오래라, 아내와 단둘이 오붓하게 지내요. 하루 한 시간 정도 꼬박꼬박 필사하는 게 취미고 낙이에요. 명심보감, 도덕경, 맹자로 시작해 요즘은 6개월 목표로 주역을 쓰고 있어요. 한문, 영문, 한글 가리지 않고 쓰는데 다 나름대로 맛이 달라 지루한 줄을 몰라요."
 

한비자 - 영문본 필사 ⓒ 김덕래

중용 - 한자필사 ⓒ 김덕래

윤흥길(기억속의 들꽃) - 한글필사 ⓒ 김동기


필사를 할 때 어떤 필기구를 주로 쓰냐 물었습니다.

"처음엔 볼펜을 썼는데, 볼펜은 볼이 굴러가다 보니 내가 멈추고 싶은 지점보다 조금 더 선이 그어지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만년필은 정확히 내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어 요즘은 만년필을 주력으로 써요. 영문은 펜촉 끝이 가로로 길게 난 캘리촉을 쓰면 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어요.

또 네오펜은 전용 종이에 글을 쓰면 바로 디지털로 변환할 수 있어 즐겨 써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인 셈이지요. 젊은 친구들이 내게 다가오길 바라는 것보다 내가 다가가는 게 맞다 싶어요. 저는 스스로 아직 충분히 마음이 젊다 생각하니까요 (웃음)."

 
필사의 매력을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필사는 나 자신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라 생각해요. 긴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땐 분량이 꽤 되는 걸 골라요. 한비자 영문본은 1년 정도 썼는데, 아직 제법 남았어요. 너무 긴 여행이라 지루하다 싶을 땐, 짧은 여행을 떠나면 되지요. 분량이 얼마 안 되는 시집을 고르면 되니까요. 개인적으론 두보 시집을 좋아해요. 서정적인 정서가 마음에 들거든요. 필사는 가장 안전하고, 또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행이에요. 저는 죽을 때까지 이 여행을 계속 즐길 거예요. "
 

필사마니아 김동기씨 ⓒ 김덕래


5일간의 추석 연휴가 끝난대도 당분간 외부 활동을 최소화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몸을 움츠리면 마음도 따라 경직됩니다. 만년필 잉크가 그렇듯 순환하지 않으면 막히게 되고, 그러다 아차 하는 순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긴 연휴가 답답하게 느껴진다면, 두께 얇은 시집이라도 한 권 펼쳐놓고 나만의 여행을 떠나보시길 권합니다. 필사는 다만 예스러울 뿐, 고루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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