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월 5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노태우 차기 대통령의 예방을 받고 새해 인사를 나누며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군부에서 밀려나고 전두환·노태우와 대립하게 된 김복동에게는 2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두 사람과 대항하는 편에 서는 것이고(1안), 또 하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었다(2안).
상황은 다르지만 12·12쿠데타로 실각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은 6월항쟁 뒤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 들어가서 신군부를 비판했다. 정승화는 1안을 선택한 것이다.
김복동은 1.75안을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2안에 가깝지만, 1안도 약간 담은 것이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타격을 입고 매부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뒤 김복동은 정계 진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가 택한 당은 전·노가 만든 민주정의당(민정당)이었다. 전·노의 보금자리로 들어가기로 했으니 2안을 선택한 셈이 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선택은 2도 아니고 1.5도 아닌 1.75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노태우는 1.75를 받아주지 않았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는 "6공에 들어서도 친인척의 정치참여를 배제한 노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13대 총선 때 출마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노태우 정권에서 승승장구한 박철언 전 의원도 노태우 부인인 김옥숙의 사촌동생이다. 따라서 노태우가 김복동의 정계 진출을 막은 것이 그런 표면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김복동은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대통령 친인척이었던 1992년에 그는 14대 총선을 통해 국회 진출에 성공했다. 1992년이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였던 데다가 1990년 3당 합당 뒤 민주계 김영삼의 정치 공세로 노태우가 한층 약해진 시점을 이용해 김복동은 정치권 진출을 성사시켰다. 전두환은 이미 약해졌고 노태우는 거의 약해지는 시점에 김복동이 일어난 것이다.
군부독재가 청산되던 그 시기에 김복동이 정승화의 길을 걸었다면, 김복동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1안을 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를 보여주는 2개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현직 대통령의 처남 납치 사건
하나는 그가 노태우의 주선으로 김영삼과 친해지려고 노력해본 뒤에 일어난 일이다. PK(부산·경남) 출신인 김영삼이 TK(대구·경북)의 지지를 받고 1992년 대선에 승리하자면 대구동구갑에서 당선된 김복동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민자당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노태우가 김복동과 김영삼을 엮어주었고 김복동 자신도 김영삼과 친해지려고 노력해봤다. 하지만 김복동은 김영삼과 끝내 친구가 되지 못했다. 김복동은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는다"라며 오히려 반(反)김영삼 노선을 선명히 했다. 체질에 안 맞는다는 언급은 1992년 12월호 월간 <길> 기사에 나온다.
김영삼은 친화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김복동이 김영삼과 친해지지 못한 것이 김영삼의 성격 때문일 리 없다. 둘이 가까워지지 못한 것은 김복동이 전두환처럼 보스 기질을 가진 사람을 싫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김영삼이 민주화운동 지도자 출신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만약 김복동이 1안을 선택했다면, 민주화 운동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노력이 있었다면,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가 1안에 별 마음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하나는, 1992년 대선 직전에 노태우·김영삼에게 타격을 주고자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합류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정주영은 그 뒤 한반도 평화를 위한 큰 족적을 남겼지만, 그의 통일국민당 창당은 6월항쟁 이후의 변화에 발맞춰 재벌체제를 이어가려는 기획에 불과했다. 6월항쟁의 정신에 맞는 정당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목이 '김복동 탈당 파동의 전모'인 위의 월간 <길> 기사에도 정리돼 있듯이, 그의 국민당 입당 선언은 현직 대통령의 처남 납치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가 탈당 기자회견을 위해 동대구 톨게이트에 들어서자, 경찰과 안기부 직원 30여 명이 차량을 막아선 뒤 그를 서울 삼청동 안가로 연행했다.
낯선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는 다음날 아침 청와대 조찬 자리로 옮겨졌다. 그런 뒤 그의 명의로 탈당을 번복하는 보도자료가 나오고 이를 부정하는 김복동 보좌진의 반박 성명이 나오는 등의 어수선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는 결국 정주영의 품에 안겼다. 이는 전·노와는 함께할 수 없었던 그의 운명을 반영한다. 김영삼뿐 아니라 전·노와도 화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4년 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는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의 공천을 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신군부 출신들이 싫어하는 구군부의 당으로 가서 당선된 것이다. 군부 출신들과는 마음이 맞았던 것이다.
전·노와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결국 군부 출신들의 당으로 간 것은 6월항쟁 이후의 시대 흐름과 이탈된 그의 정치행보를 반영한다. 전·노를 이기는 길은 6월의 흐름을 타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와 어긋나는 길을 택했다.
신군부에 의해 밀려난 김복동은 뒤늦게나마 정치권에 들어갔지만, 이 시대는 육사 11기가 최첨단 엘리트였던 1979년 이전의 시대가 아니었다. 김복동에게 최적화된 조건이 갖춰진 시대가 아니었다. 육사 출신들에게 유리했던 1987년 이전이 아니었다.
정치인 김복동이 전두환·노태우를 극복했다는 평가가 나올 수 없었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작용했다. 2000년 4월 19일 67세를 일기로 김복동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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