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8 17:58최종 업데이트 20.10.18 17:58
  • 본문듣기
만년필 종주국은 이견 없이 미국입니다. 워터맨이 만년필의 형상을 구체화해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면, 파카는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었습니다. 두개골과 갈비뼈가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기관인 뇌와 심장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장치인 것처럼, 만년필이란 도구가 하나의 필기구로 자리매김한 데는 미국의 역할이 주도적이었습니다.

독일은 뼈를 굵게 하고 또 근육을 튼튼히 해 강인한 생명체로 성장시켰습니다. 만년필 부속 하나하나가 서로 빈틈없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뤄 원활히 작동되도록 했습니다. 또 손가락 끝에 필히 손톱이 있어야 하고, 눈꺼풀엔 속눈썹이 달려 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일본은 특유의 섬세함으로 디테일한 부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이탈리아는 엉클어진 머리칼을 다듬고, 피부 톤을 정리해 다른 누구보다 더 돋보이게끔 했습니다. 만년필은 장식장에 넣어놓고 눈으로만 감상하는 도구가 아니니 내구성 좋고, 기능적으로 우수한 것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음식을 입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 눈으로도 맛보듯, 만년필 역시 디자인과 색감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오로라, 몬테그라파, 비스콘티 등 이탈리아는 많은 필기구 업체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자부심 가득한 숙련된 장인들의 손끝에서 만년필은 보다 아름다운 필기구로 다듬어져 왔습니다. 만년필 역사가 미국에서 시작되어 독일에서 완숙미를 더해갔다면, 일본은 그들만의 정교함으로 나름의 영역을 구축했고, 이탈리아는 필기구를 예술품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겠습니다.

만년필 펜촉을 자체 생산하는 산티니
 
워터맨, 파카 등 많은 필기구 생산업체들이 설립자의 이름을 브랜드화 한 것처럼, '산티니 이탈리아(Santini Italia)' 역시 22년 전 회사를 만든 '산티니 조반니(Santini Giovanni)'의 이름을 땄습니다. 오로라와 같은 해인 1919년 창립한 앙코라와 호흡을 같이하는 산티니는, 대형업체들과는 사뭇 다른 전략으로 자신들만의 영역을 다져왔습니다.
 
몽블랑, 펠리칸, 그라폰 등 쟁쟁한 메이저 브랜드에 비하면 소규모 업체지만, 이탈리아 특유의 예술향을 주저 없이 피워 올리는 예술가 집단인 산티니의 자신감은, 모든 공정을 자체 해결하는 데 근거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법 큰 규모의 회사들도 'Bock'나 'JoWo'같은 전문업체로부터 펜촉을 공급받는 게 사실인데, 산티니는 스스로 해결합니다.

펜 한 자루를 만들기 위해선 여러 기술력이 집약되어야 하지만, 만년필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펜촉입니다. 단순히 생산성만을 고려하면 전문업체를 통해 공급받고, 그 에너지를 펜 디자인이나 신소재 개발에 쏟는 게 나을 수도 있겠으나, 만년필 펜촉을 자체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브랜드 경쟁력입니다. 규모는 작아도 어깨를 활짝 펴고 걸을 수 있는 뒷배경입니다.
 
통상 스틸촉은 강성이라 버텨주는 힘이 좋습니다. 만년필 입문자나, 필압을 세게 주고 쓰는 사용자에게 적합한 이유입니다. 반면 금은 자연계에서 가장 연성이 높은 금속입니다. 모든 금촉이 연성인 건 아니지만, 낭창거리는 탄력감을 극대화한 플렉스 닙에 18K 금촉은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 분명합니다.

펜촉이 '플렉시블(Flexible)' 하다는 건 일반 촉에 비해 유연하단 의미이지, 꾹꾹 눌러써도 무방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간혹, 내 펜은 플렉스 닙이니 볼펜 쓰듯 힘을 주고 써도 되겠지,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플렉스 닙이 장착된 만년필도 기본적으로 필압을 최소화해 쓰는 건 같습니다. 다만 약간만 힘을 줘도 일반 펜촉에 비해 탄력감이 뛰어나, 분명 'F(Fine)촉'임에도 마치 'M(Medium)촉'이나 'B(Broad)'촉처럼 선이 굵게 표현됩니다. 이 미묘한 변화를 즐기기 위해 과한 필압을 주는 건 금물입니다. 평소보다 아주 약간의 힘을 더 얹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성능 좋은 스포츠카는 액셀을 밟으면 밟는 대로 달려 줍니다. 하지만 250km/h로 달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안전을 보장해주는 속도란 의미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평소엔 100km/h 정도로 안전하게 주행하고, 정말 스피드를 즐기고 싶을 때 맛볼 수 있는 극한계치, 차량이 제공하는 최대속도란 뜻일 것입니다. 모든 행위엔 책임이 따르는 것처럼, 과한 속도로 달리다 문제가 생기면 뒷감당은 온전히 운전자의 몫입니다. 그저 속도계 눈금에 맞춰 액셀을 밟은 것뿐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만년필도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필압으로 펜을 쥐고 써도 유연성이 뛰어나, 보다 부드러운 탄력감을 느끼는 것뿐입니다. 과하게 힘을 줘 펜촉이 틀어지거나, 피드와의 간격이 벌어지면 그 역시 사용자가 감당해야 할 부분입니다.
 
펜촉의 탄력감을 좀더 마음 편히 느끼고 싶다면 '딥펜(Dip Pen)'을 써보길 권합니다. 만년필에 비하면 일단 비용 부담이 덜합니다. 내 필압이 다소 과한 편이더라도 불안감을 떨칠 수 있습니다. 딥펜은 말 그대로 찍어 쓰는 펜입니다.

금속으로 된 펜촉을 잉크병에 담가 촉에 묻은 소량의 잉크로 필기를 하는데, 펜촉의 종류에 따라 탄력감이 다 달라 내 취향에 맞게 선택해 쓸 수 있습니다. 다만 만년필처럼 몸통에 저장된 잉크가 계속 흘러나오는 구조가 아니기에, 자주 잉크병에 펜촉을 담가야 합니다.
 

탄력감 좋은 딥펜의 펜촉 ⓒ 김덕래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흐름 좋은 F촉입니다. 플렉시블한 펜촉의 특성답게 종이와 닿는 '펠릿(Pallet)'에서 닙 가운데 '벤트홀(Vent Hole)'까지의 길이가 긴 편입니다. 짧을수록 더 탄탄하고, 길수록 보다 유연합니다. 펜촉의 두께도 얇고, 측면 '숄더(Shoulder)'의 휨 정도도 완만합니다.

까다롭지만 잉크가 잘 마르지 않는 에보나이트 피드

역시나 두껍고 각도가 급할수록 잘 버텨줍니다. 흐름 좋은 '에보나이트 피드(Ebonite feed)'의 곡선미는 시선을 멈추게 합니다. 에보나이트는 초창기 만년필 제조에 활발히 사용된 소재입니다. 천연고무에 황을 첨가해 뽑아내는 물질로 고무라기보단 플라스틱에 가깝습니다.
 

리브라 민트 플렉스(Flex) F촉 상판 ⓒ 김덕래

  

에보나이트 소재로 된 피드 ⓒ 김덕래

 
에보나이트로 만들어진 피드와 플라스틱으로 된 피드의 장단점은 명확합니다. 먼저 에보나이트 피드는 소재 자체가 잉크를 충분히 머금을 수 있기에 쉽게 마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만들기 까다롭습니다.

플라스틱 피드는 내구성이 뛰어나고 대량생산이 용이하지만, 소재 특성상 잉크를 흡수한다기보단 원활히 흐르도록 해주는 것에 가깝기에 모델에 따라 잉크마름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기계로 찍어내면 되는 플라스틱에 비해 일일이 수작업으로 가공해야 하는 에보나이트 피드는,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져 이젠 만년필 제조사에서 상위 라인에만 적용시키는 추세입니다.

플라스틱이 일반화되기 이전엔 보편적이었던 소재인데, 어느 순간 대접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줄면 절로 귀해지는 것이 이치입니다.

확연히 틀어진 펜촉을 교정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눈으로는 더 손볼 부분이 없을 정도로 상태를 끌어올린 다음, 잉크를 충전하고 실제 종이에 그어가며 다듬어줘야 합니다. 만년필은 사람이 눈으로 보는 걸로 만족하는 장식품이 아니라, 실제 써야 하는 실용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참 묘한 것이, 눈으로 봐선 차이가 안 느껴지는데도 쓰면 확연한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의 눈보다 손이 더 정확합니다. 손길이 더해질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펜을 보면 손을 뗄 수가 없습니다. 펜을 쥔 손에 어떻게 힘을 담느냐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배럴과 캡은, 빛이 닿으면 내부가 살짝 비치는 반투명 아크릴 수지로 만들어졌습니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느낌을 잘 살려냈습니다. 잉크충전 메커니즘은 피스톤필러 방식을 채용하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몽블랑, 펠리칸 등의 것과는 구조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펜촉을 잉크병에 담그고 노브를 시계방향으로 돌려 충분히 잉크가 차면 146이나 M600의 그것은 더 돌아가지 않지만, 이 펜의 노브는 마치 약병의 안전 잠금장치처럼 틱틱 소음을 내며 헛돕니다. 계속 돌아가기에 나사산이 뭉개진 걸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장이 아닙니다.
 
세상엔 수많은 필기구 브랜드가 있고, 셀 수 없이 다양한 디자인의 펜이 계속 만들어집니다. 어차피 모든 펜을 다 소유할 순 없습니다. 나와 잘 맞는, 내가 좋아하는 색감과 디자인을 가진 펜을 만나는 건 팍팍한 일상 속 소소한 즐거움입니다. 하루하루 잘 버텨내는 나를 위한 소박한 선물입니다. 나만의 서사를 담아 평생을 쓰다, 후대에 물려줄 만한 가치 있는 도구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펜의 가격과 무관합니다.
 

산티니 이탈리아 리브라 민트 플렉스 F촉, 시필 테스트 ⓒ 김덕래


선순환은 나로부터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찬 요즘입니다. 향 깊고 진한 커피도 제격이지만, 은은한 녹차도 참 좋은 계절입니다. 마음이 차고 허전하다면, 이 가을 누군가에게 손편지 한 장 써 보내도 좋을 일입니다. 쓰는 사람이 없다 보니, 되려 전보다 몇 배나 더 큰 감동을 주는 게 손편지입니다.
 

이 가을과 썩 어울리는 녹차 한 잔 ⓒ 김덕래


편지를 쓰는 내내 몸의 신경이 이완되어 느긋한 마음상태가 유지됩니다. 상대방에게 도착해 읽혀질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도 만만찮은 즐거움입니다. 며칠 뒤 그의 회신을 받아 읽으면 한 줄 한 줄 곱씹는 내내 글에서 단내가 나고, 그 부드러운 향이 퍼져 한 평 작업실을 가득 채웁니다. 팽팽히 당겨진 일상의 마음근육이 느슨해지고 이내 여유로워집니다.
 
일기는 나 자신에게 쓰는 글이니 솔직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편지는 상대방에게 건네는 것이니 아무래도 숨김과 보탬이 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의미 없이 화려하기만 한 표현은 약한 바람에도 쉽게 날아가 산산이 부서져 이내 흩어질 뿐입니다. 시선을 덜 잡아끌더라도 마음이 담긴 문장 한 줄은 그저 흔들릴 뿐 센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습니다. 이미 뿌리를 바닥에 내렸기 때문이겠지요? 누군가의 마음을 적시고 싶다면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일기 같은 편지를 주고받는 지인이 어느 날 권했습니다. 밤새 수면 중 구강 내 세균이 번식하니 아침에 눈뜨면 일단 양치를 해라, 그리고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하루를 시작하면 좋다, 고 합니다. 작은 습관 하나가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합니다.
 
나를 위해 건네준 보드라운 말에, 자기 전에도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자면 좋다더라, 고 화답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물 한 잔으로 속을 데우며 하루를 시작하고, 잠들기 전 또 그렇게 하니 진종일 마음의 온도가 유지되는 것만 같습니다. 사람의 말에도 분명 온도가 있습니다. 차가운 말이 나를 얼어붙게 해 평소 잘 하던 것도 못하게 만들고, 따뜻한 말이 처음 가는 길도 두려움 없이 걷게 합니다.
 
이 가을 누군가에게 편지 한 장 적어 보내면 결국 내가 따뜻해집니다. 손편지를 쓰는 건 내 아까운 시간을 하릴없이 낭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와 내 주변을 온기로 채우는 일입니다. 좋은 일이 없다 낙심하지 마세요. 선순환은 나로부터 시작되면 됩니다.
 

손편지 한 장으로 선순환이 시작됩니다 ⓒ 김덕래

 
* 산티니 이탈리아(Santini Italia)
- 1998년 '산티니 조반니(Santini Giovanni)에 의해 탄생한 이탈리아 브랜드. 규모는 작지만 모든공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만년필의 핵심부속인 펜촉을 전모델 18K 금촉으로 제작, 'We give you more(더 많은 것을 드립니다)'라는 기치 아래, 고객지향적 마케팅을 펼치는 전문가 집단.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