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3 09:07최종 업데이트 20.10.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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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왜구나 친일파가 해방된 나라를 자신들의 나라로 만드는 데는 경찰 다음으로 국군의 조력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국군은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로 창설돼 '조선경비대', '국군', '대한민국 육군'을 거쳐 1948년 11월 30일 '대한민국 국군'이라는 명칭을 갖게 됐다. 당시의 국군이 친일파를 돕는 반역사적 행적을 남기게 된 데는, '대한민국 국군'이란 이름을 갖기 1개월 전에 벌어진 사건이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와 순천에서 여순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이 민간인 학살로 응수한 이 사건은 정부군이 22일 순천을 장악한 데 이어 24일 여수를 장악하면서 일단락됐다.

국군의 타락

제주 4·3항쟁에 대한 진압 명령을 거부한 양심적인 군인들의 궐기로 발생한 여순사건은, 이에 맞선 친일파들이 반공을 빌미로 단결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 달 12일 구성된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계기가 됐다. 여순사건 자체는 역사의 퇴행을 막고자 일어난 일이지만, 이에 대한 진압은 친일파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여순사건 진압이 현대사에 끼친 악영향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가면, 갓 출범한 당시의 국군이 이 일로 인해 타락에 빠진 사실을 접하게 된다. 국군은 '국민의 군대'로 해석돼야 하는 단어이지만, 여순 진압은 당시의 국군이 '국가의 군대'로 전락하는 계기가 됐다.

국민이 실질적 주인인 나라에서 군이 국가의 군대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 시기의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정부가 아니라 보수 친일파의 집행위원회였다. 그래서 여순 진압을 계기로 '국가의 군대'가 된 당시의 국군은 보수 친일파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악용되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의 군대는 경찰과 달랐다. 광복군 출신들을 포함해 진보적 인물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다. 보수파들에 의해 좌파 빨갱이로 매도된 이들은 실상은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미군정과 보수파가 장악하는 군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당시의 모병 방식이 큰 영향을 끼쳤다.

길거리를 걷다 보면, 경품을 쌓아놓고 책상에 앉아 고객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해방 직후의 모병 풍경도 비슷했다. 군인들이 길거리에 책상을 놓고 지원자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길거리 모병

여순사건 5개월 전에 발행된 1948년 5월 29일자 <경향신문>에도 그런 풍경이 보도됐다. 길거리에 놓인 책상에 정복 군인이 앉아 있고 그 옆에 또 다른 군인과 민간인 2명이 서 있는 모습이 사진에 실려 있다. 그 밑에는 '우국 청년은 오라'는 짤막한 기사가 게재돼 있다. '가두의 모병 광경도 위위(威威, 씩씩하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기사의 본문은 아래와 같다. 요즈음에는 안 쓰이는 '요지음' 같은 표현이 들어 있는 기사다.
 

본문에 인용된 신문 보도. ⓒ 경향신문

 
국방경비대에서는 요지음 대원을 대량으로 모집 중인데, 서울 거리 요소에 접수소를 설치하고 응모를 취급하고 있어 조국 방비의 간성이 되려는 젊은이들의 씩씩한 모습은 서울 거리에 한 개 이채를 띄고 있다.

'가두 모집'이나 '가두 모병'으로 불리는 이 풍경은 '길거리 징병'이나 '길거리 모병'으로도 부를 수 있다. 토크쇼에 나온 연예인들이 데뷔 과정을 무용담처럼 소개할 때 종종 언급하는 '길거리 캐스팅'이란 말로도 바꿀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군인을 모집했기 때문에, 분단문제나 친일문제에 관한 지원자의 견해를 제대로 확인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2016년에 <군사발전연구> 제10권 제1호에 실린 신종태 전쟁과평화연구소 연구위원의 논문 '6·25전쟁 이전의 한국 국방정책 분석'에 언급된 아래와 같은 양상이 출현하기 쉬웠다. 논문 저자는 1984년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국방사 1>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더욱이 미군정 3년간의 민주화 시책을 기화로 공산주의자들이 정부의 각 주요 기관 또는 경비대에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채용되거나 입대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경비대 내부에도 이들 세력이 침투, 동조 세력을 규합하여 조직망을 확대해 나갔다.

극우단체의 대거 군입대

여순 진압은 진보적 청년들이 '길거리 캐스팅'으로 입대하는 일을 막고자 모병 방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지난 5월에 <사총(史叢)> 제100권에 실린 노영기 조선대 교수의 논문 '여순사건 이후 한국군의 변화와 정치화'에 따르면, 여순 진압을 계기로 당시의 국군은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 같은 극우단체들에게 모병 권한의 상당부분을 넘겨줬다. 이들의 추천과 신원보증을 통해 국군을 보수파 군인들로 채우려 했던 것이다.

위 논문은 "여순사건이 터지자 우익 청년단체들은 다시 군의 재편을 주장하며 정부에 무기 대여를 요청하고 국방부도 청년단체를 포섭시키는 방안을 계획했다"고 한 뒤 "군에서는 청년단체 책임자의 (피)추천자를 우선 선발할 것을 결의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1948년) 12월 20일 200명의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비밀리에 대전의 제2연대에 입대했다. 이것은 제2여단 참모장과 서북청년회 부단장 간의 비밀 회합에서 결정됐다. 또한 여순사건 이후 우익 청년단체에서 추천하는 자들로 사병들을 선발하는 신원보증제를 실시했다. 즉 군은 이전의 향토연대 창설 과정에서 나타난 길거리 모병을 폐기하고 우익 청년단체가 신원을 보장하는 세력들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1년 반 뒤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국군에 의한 국민 학살(민간인 학살, 양민학살)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됐다. 여순사건 직후부터 극우단체들과 국군의 제휴가 강화되고 이 단체들이 국군의 주요 조직을 장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순 진압은 이승만 정권이 숙군이라는 명분하에 친일청산 지지자들을 쫓아내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이 시기의 숙군 작업이 표면상으로는 반공을 명분으로 했지만 그보다는 친일청산 저지를 더 많이 목표로 했다는 점은, 공산주의자 박정희가 여순사건 때문에 숙청되는 듯하다 되살아난 데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 11일 체포됐다가 1개월 뒤 석방되고 석방 1주일 만에 다시 출근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지만 친일청산론자는 아니었다. 이런 사람은 숙청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은 그의 신속한 복귀로 증명된다.

그날 이후 군이 변했다

여순 진압은 국군 지도부가 갓 출범한 반민특위를 압박하는 명분으로도 작용했다. 반민특위 등장으로 긴장했던 친일 군인들은 여순 진압을 계기로 일치단결해서 반민특위에 공세적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반민특위 활동을 무력화시키라고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까지 했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성과를 올리며 그 예봉이 점차 자신들에게 향하게 되자, 국방부와 육군의 최고 수뇌부에는 그에 따른 위기감이 높아졌다. 일본 육사 출신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대령은 원용덕·정일권 등과 의논해 자신이 육군참모총장을 그만두면 원용덕·정일권 등 군 수뇌부가 모두 물러나겠다는 뜻을 정부에 전달했다. 결국 이들은 군을 정치에서 독립시키는 데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며 친일파 숙청을 무력화시켰다.

여순 진압은 해방 뒤 반목했던 군과 경찰이 단합하는 기회로도 작용했다. 여순 진압 뒤에 국군과 경찰은 겉으로는 반공을 명분으로, 속으로는 친일청산 반대를 명분으로 단결했고, 이는 이승만 정권과 친일파가 공고한 군사적 기반을 갖는 데 기여했다.

여순 진압은 또 다른 측면으로도 당시의 국군을 더럽혔다. 국군이 외적이 아니라 국민을 적대시하도록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다. 군의 국민 사찰, 민간인 사찰을 정당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위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군 사찰기관은 공공연하게 민간인 사찰을 확대·강화시켰다. 그중에서도 헌병사령부와 육군본부 정보국이 민간인 사찰을 주도했다. 헌병사령부와 육군본부 정보국은 숙군과 함께 좌익 세력을 색출한다며 국회의원·공무원 및 일반 국민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이처럼 여순사건에 대한 진압은 당시의 국군이 친일청산 저지뿐 아니라 민주주의 파괴에까지 연루되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부조리가 청산되지 않았기에 훗날 대한민국은 5·16 쿠데타, 12·12 쿠데타, 5·17 쿠데타를 피할 수 없었다. 1948년 10월 19일 이후의 여순 진압을 계기로 당시의 국군은 그처럼 부조리한 집단으로 전락했다. 국군은 그날 이후로 이상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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