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8 19:03최종 업데이트 20.10.2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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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의 감각기관으로 포착하는 정보를 통해 환경의 변화를 감지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여름에서 가을로의 계절 변화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서러울 정도로 파란 하늘, 그 아래에서 울긋불긋 패션쇼를 벌이는 산등성이, 이른 아침 살갗을 스치는 영상 8도의 싸늘한 대기. 시각과 촉각을 담당하는 생체기관은 이러한 정보를 포착한 후 전기 신호로 변환해 뇌로 전달한다. 뇌는 전달 받은 정보를 토대로 연산을 거쳐, 차곡차곡 저장된 개념 중에서 '가을'이라는 특정한 단어를 끄집어낸다. 그렇구나! 완연한 가을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유독 '가을'과 시냅스 연결이 강한 단어가 있으니 바로 '브람스'이다. 그의 음악이 지닌 '중후한 쓸쓸함'이 이 계절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내가 이번 가을부터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인 인터메조 Op.118 No.2를 연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튜브 인기 채널 또모TOWMOO에서 안종도 피아니스트의 레슨 장면을 보고 감동을 받아 나도 근사하게 쳐보겠다고 낑낑대며 연습하고 있는데, 아무리 좋은 곡이더라도 연주자에 따라서는 썩은 소리가 날 수 있음을 절감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연습하는 내내 가을의 먹먹함이 내 귓구멍으로 진하게 스며든다. 마침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가 화제리에 방영되었는데, 이 무슨 우연인지(드라마는 지난 20일 종방했다) .
 
아무튼 시각, 촉각에 청각까지 가을이 완연하니 이제 후각과 미각만 가을로 채우면 되겠다. 가을과 어울리는 와인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브람스의 음악과 잘 어울리는 와인을 찾아보자! 그렇게 머릿속에서 브람스의 음악을 재생하며 떠오른 와인 세 병을 조심스럽게 여러분 앞에 공개한다.
 
미켈레 끼아를로 치프레시 니짜 2017
Michele Chiarlo Cipressi Nizza 2017


 

ⓒ 고정미

 

미켈레 끼아를로 치프레시 니짜 2017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는 바르베라(Barbera) 포도 품종으로 만든 이탈리아 와인이다. ⓒ 임승수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는 바르베라(Barbera) 포도 품종으로 만든 이탈리아 와인이다. 미켈레 끼아를로(Michele Chiarlo)는 와인 제조사, 치프레시(Cipressi)는 제품명, 니짜(Nizza)는 바르베라 포도가 재배된 마을이다. 이마트 영등포점 와인 장터에서 28,000원에 구입했다.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이탈리아 저가 와인 특유의 앙상한 신맛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도 하고, 몇 년 전 마셨던 바르베라 품종 와인이 전혀 인상에 남지 않아서다. 하지만 아내가 이탈리아 와인을 좋아하기도 하고 수입사 직원이 가성비 좋은 와인이라고 추천해서 속는 셈 치고 구매했다.
 
안주(군만두와 부침개)를 준비한 후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의 연주를 유튜브로 찾아 듣고 있었다. 명연주 반복 청취를 통해 내 연주의 썩은 소리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라두 루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글렌 굴드, 김선욱, 백건우 등의 연주를 차례로 듣다가 마침 옆에 있던 이 와인을 별생각 없이 한잔 입에 머금었다. 흥미롭게도, 마시자마자 '별생각'이 들었다.
 
인터메조 Op.118 No.2은 브람스가 자신의 평생 짝사랑 대상인 클라라 슈만에게 헌정한 곡이다. 자의반 타의반 독신으로 살며 켜켜이 쌓인 클라라 슈만에 대한 애절함이 브람스 특유의 절제된 형식미로 표현된 곡이다.

그런데 방금 마신 이 와인에서 '애절한 신맛'이 나는 것 아닌가. 은근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묵직하고 쌉쌀한 타닌, 화사하고 풍부한 체리향,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는 희미한 단맛, 그 복합적 풍미의 중심에서 이탈리아 와인 특유의 신맛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젊고 단아한 용모이지만 한편으로는 사연 있는 애틋한 삶을 살아온 여인이 내 옆에 앉아 함께 브람스의 인터메조를 감상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음악의 정취와 와인의 풍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면 혓바닥에서 '애절한 신맛'이 날 수 있음을 경험한 것이다. 나와 아내가 동시에 최고로 꼽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연주와 함께 이 와인을 경험해보기를 적극 추천한다.
 


도멘 윌리엄 페브르 샤블리 프리미에 크뤼 '보루아' 2016
Domaine William Fèvre Chablis Premier Cru 'Beauroy' 2016



 

ⓒ 고정미

 

도멘 윌리엄 페브르 샤블리 프리미에 크뤼 ‘보루아’ 2016 샤도네이 포도 품종으로 만든 프랑스 부르고뉴 북부 샤블리 마을의 화이트 와인이다. ⓒ 임승수

   
샤도네이 포도 품종으로 만든 프랑스 부르고뉴 북부 지역의 화이트 와인이다. 도멘 윌리엄 페브르(Domaine William Fèvre)는 제조사명, 샤블리(Chablis)는 포도가 재배된 마을명, 프리미에 크뤼 '보루아'(Premier Cru 'Beauroy')는 1등급 평가를 받는 '보루아' 밭의 포도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이마트 트레이더스 부천점에서 5만5400원에 구입했다.
 
싸늘해지는 가을이면 뜨끈한 국물에 짭조름하게 살집이 씹히는 조개찜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 음식과 메가쇼킹한 궁합을 보여주는 와인이 바로 샤블리다. 그 위력에 대해서는 앞선 연재글에서 다뤘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관련 기사: 와인 마실 때 짭조름함이 느껴진다면, 이걸 의심하라]
 
샤블리는 특유의 짭조름한 바다내음과 상큼한 신맛이 일품이다. 이 와인의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해산물과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단맛이 전혀 없는 상큼한 신맛이 돌고래처럼 치솟아 오르면,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물살을 가르는 서퍼처럼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이 샤블리와 어울리는 브람스의 곡은 바이올린 협주곡 Op.77 3악장이다(아래 동영상은 1악장부터 시작되는데 3악장은, 32분 14초부터 시작한다). 악장의 초입부터 등장하는 바이올린의 쿨시크한 더블 스토핑은 샤블리의 하나도 달지 않은 상큼한 신맛을 연상시킨다. 특히 '얼음 공주' 힐러리 한이 독주 바이올린을 맡아 망설임 없이 내달리는 연주는 해산물 내음 가득한 입안을 입안을 서퍼처럼 가로지르는 샤블리의 청량감 그 자체다.
 


샤토 지스꾸르 2013
Château Giscours 2013

 

ⓒ 고정미

 

샤토 지스꾸르 2013 프랑스 보르도 마고 지역의 와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기본으로 메를로 및 여타 품종을 혼합했다. ⓒ 임승수

   
프랑스 보르도 마고 지역의 와인이다. 마고 지역에서 꽤 존재감 있는 와인인데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기본으로 메를로 및 여타 품종을 혼합했다. 2013년은 보르도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작황이 안 좋은 해이다. 그런 탓에 여타 빈티지보다 가격이 저렴하다. 그래도 원체 평가가 좋은 와인이라 할인가 7만 원 정도는 들여야 2013 빈티지를 구입할 수 있다.
 
이 2013 빈티지 와인을 처음 접했을 때 그 쓸쓸하면서도 고혹적인 향기가 대단히 매력적이어서 한동안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향기만 맡았던 기억이 난다. 정신을 가다듬고 입으로 털어 넣었는데 소위 극악의 '망빈'(망한 빈티지)이라는 2013년이라 바디감이 다소 가벼웠지만, 오히려 그러한 가벼움이 쓸쓸하고 고혹적인 풍미를 한층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망빈'이더라도 보르도의 와인들은 기본적으로 중후한 무게감을 갖고 있다. 이런 양가적 면모가 나에게는 '중후한 쓸쓸함'이라는 독특한 정취로 다가왔다.
 
이 정취와 정확히 들어맞는 곡이 있으니 바로 브람스 교향곡 3번의 Op.90 3악장이다. 도입부에서 가을바람에 낙엽이 휘날리듯 등장하는 첼로의 단조선율이 매우 인상적인 이 곡은 브람스의 수많은 곡 중에서도 가을과 가장 어울리지 않나 싶을 정도로 우수에 젖어 있다.
 

적지 않은 와인 애호가들이 보르도의 2013 빈티지를 꺼린다. 허약체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 샤토 지스꾸르 2013은 그 허약함 때문에 가을의 쓸쓸함과 더욱 잘 어울린다. 뛰어난 평가를 받는 2000, 2009, 2010 빈티지였다면 펄펄 끓어오르는 생명력으로 인해 멜랑콜리한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과 제대로 어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와인은 참으로 흥미로운 술이다. 언제 어떤 분위기에서 누구와 마시느냐에 따라 같은 와인이더라도 감흥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침 낑낑대며 가을+브람스+와인 글을 쓰는 내 모습을 아내가 옆에서 지켜본다. 그 눈초리에서 '와인 하나 갖고 염병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읽어냈다. 안 되겠다. 조만간 와인 셀러에 고이 모셔둔 근사한 와인 하나를 꺼내서 아내도 내 호들갑에 동참하도록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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