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5 16:58최종 업데이트 20.10.2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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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을 바라보던 삼십 대 후반 어느 날, 나는 서울 은평구에 있는 연신내시장에서 늦은 점심을 찹쌀 꽈배기에 믹스커피로 때우고 있었다. 그때 내 가방 속에는 아마 '이력서'가 몇 장 들어있었을 게다. 오후엔 어디로 갈까 궁리하며 허기를 메우고 돌아 나오는데 "이리로 저리로 불안한 미래를 향해 떠나갔고"라는 노래 구절이 어디선가 들렸다. 장바구니와 배달 자전거에 몇 번인가 몸이 부딪혔고 '골라 골라' 박수소리, 지금부터 '열무 한 단 천 원'이라는 외침 속에서 마지막 소절 "우리 가슴 속 깊이 서려 있는 노래 잊지 말게"를 듣고 떠났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제목도 가수도 몰랐다. 다만 노래 속 몇 구절이 마음에 남아 가끔 되뇌곤 했다.
 
그 후 시장 모퉁이에서 들었던 그 노래가 '당부'이고 '정혜윤'이 불렀으며 내가 이번에 인터뷰를 청한 꽃다지의 음악감독 '정윤경'이 작사하고 작곡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혜윤이 나지막이 부르는 '당부'는 함성이 잦아들고 진군나팔이 멈췄을 때와 같은 적막감, 가야 할 길을 잃고 어둠이 닥쳤을 때와 같은 막막함이 선율마다 배어 나온다. 이 노래는 정윤경이 1994년부터 97년까지 몇 년에 걸쳐서 조금씩 쓰고 고치며 완성했다. 
 

공연하는 정윤경 감독 2013년 홍대 상상마당에서 공연할 때다. ⓒ 꽃다지 제공

   
명동성당 노래패 '신새벽'을 만나다

꽃다지 음악감독 정윤경,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기타를 가까이 하며 작곡까지 했다. 그는 산울림을 특히 좋아했다. 어쩌다 김민기의 노래 '금관의 예수'와 '친구'를 들을 때면 검푸른 강물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한대수'는 그에게 낯설은 음악을 들려줬다. 
 
86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간 그는 "명동성당 노래패 '신새벽'에서 기타 치는 사람을 구한다"는 얘기에 (그의 표현을 빌면) '쫄래쫄래' 선배를 따라갔다. 처음 간 날, 담배 연기 가득하고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하면서 힘껏 노래하는 여자 선배를 보고 당황했다. 내가 잘못 왔나? 잠시 고민하는 틈에 그의 손에 기타가 쥐어졌고 그날부터 활동이 시작됐다.
 
그가 신새벽에서 활동하던 86년, 87년은 혁명적 낭만주의의 시기, 노래가 무기가 되었던 시절이다. 민중가요의 명곡들이 만들어졌고 <임을 위한 행진곡>,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노래들이 국민에게 사랑받았다. 청년 정윤경은 6월 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현장 어디든 달려가 땀 흘리며 노래 불렀다. 그의 노래 인생은 그렇게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을 마칠 무렵, 그는 "남들처럼 노동현장에 투신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운동에 기여하고 싶어 문승현이 주도해 만든 노래패 '새벽'에 가입했다. 이 활동은 95년까지 이어졌다. 90년 이후 민중운동이 그러하듯 이 시기는 그의 노래인생에서 중요한 전기가 된다.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는 성숙했지만 소련이 무너지며 사회주의 이상이 빛을 잃자 청년들은 방황했다. "가슴이 빠개지도록 사무치는 산하여" "내 작은 이 한 몸 역사에 바쳐 싸우리라, 투쟁하리"와 같은 비장하고 선구자적인 가사는 당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신념이 담긴 노랫말이었다. 하지만 그 믿음에 회의를 갖게 하는 역사적 격변을 만난 것이다.
 
87년 이후 민중가요

한편 87년 7·8월 대투쟁 이후 급속히 고양되었던 노동운동은 90년대 중반에 이르면 조금씩 퇴조기에 들어간다. 게다가 80년대 후반 한국경제가 3저 호황으로 발전하면서 중산층이 두텁게 성장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물결은 "아직도 그렇게 사냐"는 주술을 퍼트리고 있었다. 이런 시대 변화 속에 민중가요의 창작 경향도 변하게 된다. 전사의식이나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것보다는 성찰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노래가 만들어진다. 

조민하는 박노해가 지은 시 <민들레처럼>에 끈끈하며 가슴 저미는 선율을 입혔다. 그의 <전화카드 한 장>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유인혁은 간결하고 힘찬 노랫말로 경쾌한 행진곡 <바위처럼>을 빚어냈다. 김성민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뇌를 담아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를 썼다. 
 
정윤경이 몇 년에 걸쳐 쓰고 불러보며 완성한 '당부'도 이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노래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단하고 복잡한 세상 앞에서 우린 무너졌지"라는 가사, "손에 잡힐 것 같던 그 모든 꿈들도 떠나갔지"라는 구절에는 그런 좌절과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배어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아직 많으니, 우린 그 자리에서 만날 것을"하며 기원과 다짐을 말한다. 
 

정윤경과 꽃다지의 공연모습 2013년 홍대 상상마당에서다. ⓒ 꽃다지 제공

 
90년대 중반을 넘어서게 되면 민중운동과 민중예술은 더욱 위축된다. 급기야 정윤경이 몸 담았던 '새벽'도 해체되기에 이르고, 97년 그는 홀연 미국으로 떠난다. 95년 결혼하면서 장만한 신혼집의 보증금 3000만원을 털어 아내와 함께 음악대학 유학길에 올랐다. 입학허가를 받고 출국했을 때 공교롭게 IMF가 터지고 환율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결국 그는 10개월 만에 귀국했다.
 
이제는 30대 중반을 향해서 가고 있는 나이, 그는 인생행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 가난하고 고달픈 노래운동, 민중가수의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그런데 명동성당은 오래 전 그에게 숙명같은 길마를 얹어 놓았으니...

2004년 꽃다지의 음악감독이 되어 
 
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30분,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양심수 석방하라! 광주학살 진상 밝혀내라!"라고 외치며 명동성당 청년단체에서 활동하던 조성만이 할복 투신했다. 정윤경이 '신새벽'에 있을 때였다. 정윤경은 그 현장을 목격했고 많이 아파하며 추도식에 참여했다.
 
정윤경은 88년 그 날로부터 10여 년, 미국에서 돌아와 방황하던 때 마치 원죄를 씻듯 '조성만'이란 노래를 만든다. 그는 "어린 소년이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늙어가는게 인생이라는데 그댄 그 고운 청춘의 노래 채 부르기 전에 다신 못 올 곳으로 그 푸른 계절에 떠났지"라고 썼다. 가슴 시리지도 비장하지도 않게 그저 친구에게 말을 건네듯. 하지만 그 글귀마다 선율마다 깊은 슬픔이 담겨 있다.
 
노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만들었지만 조성만의 죽음은 정윤경에게 평생 민중운동진영에서 노래운동을 하라는 형벌(?)을 내리고 길마를 씌운 셈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돌아온 후 잠시 유정고밴드를 거쳐 그는 2004년 꽃다지의 음악감독이 된다.

희망의 노래 꽃다지는 1992년 삶의 노래 '예울림'과 김호철이 주도하는 '노동자노래단'이 통합하면서 결성되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민중가요의 창작과 보급이 여전히 활발하던 터, 김애영을 대표로 33명의 회원이 모여 성산동에 방음실을 갖춰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리고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 <민들레처럼>이 담긴 1집 음반을 냈다.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린 음반 발매 기념공연 '좌표 1992'는 며칠에 걸쳐 무려 1만 명이 넘는 관객이 찾을 정도로 대성공이었다. 94년 95년에도 해마다 20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2014년 12월29일 부산(사진: 이인우 작가)

하지만 공연만으로 수십 명이 먹고 사는 게 쉽지 않았다. 많은 단원들이 생활고에 찌들려 노래 현장을 떠나갔다. 사실, 이런 처지는 정윤경도 다를 바 없었다. 민중가요에 몸을 던진 이래, 그의 삶은 늘 곤궁했다. 우유 배달, 대리운전, 전화노래방 편곡작업이나 강습 등 이런저런 일들을 쉰 적이 없다. 아니 쉴 수가 없었다. 
 
정윤경이 음악감독으로 합류한 2004년, 꽃다지의 사정, 아니 민중가요의 현실이 이랬다. 정윤경은 민중가요의 종가집에 몸을 맡겼지만 고택조차 없는 종가집에 몸을 들인 셈이다. 어렵지만 의연하게 정윤경은 음악감독으로 2011년 꽃다지 4집 앨범 '노래의 꿈'을 만들었다. 이 음반을 두고 평론가 이경준은 이렇게 말했다
 
"꽃다지는 그 메시지를 고려하지 않고도 '음악적'으로 호감도가 넘실거리는 '웰메이드 앨범'을 주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비록 누군가는 한 귀로 흘릴 것이고 누군가는 외면하거나 누군가는 존재조차 모른다 해도, 이들의 목소리가 건재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
 
이경준의 말처럼 정윤경과 꽃다지는 존재 자체로 작은 위안, 아니 큰 위안을 준다. 정윤경은 그의 노래가 필요하면 어디든 달려갔다. 철거민 6명이 사망한 2009년의 용산참사현장, 쌍용차의 구조조정 반대투쟁, 2016년 촛불광장 등등. 가서 <바위처럼>으로 흥을 돋구고 <민들레처럼>으로 결연한 마음을 모았다. 꽃다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김호철 헌정음반 공동제작단'의 프로듀서가 되어
 
2018년 6월 정윤경은 '김호철 헌정음반 공동제작단'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김호철은 88년 홀연히 나타나 노동자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었다. 노동운동의 애국가인 '파업가'를 시작으로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2'같은 명곡들을 지었다. 그가 이제까지 만들어낸 곡이 무려 406곡, 모두 노동운동의 예리한 칼날이었다.
 
그런데 2018년, 그의 아내인 황현이 희귀암 진단을 받았다. 저작권도 인세도 없는 김호철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병원비였다. 이 소식을 듣고 정윤경은 동지들과 움직였다. 후원주점을 열었고 마침 '파업가'가 세상에 나온 30주년을 기념하여 '김호철 헌정음반 공동제작단'을 만들었다. 1000명의 후원자가 모였고 정윤경은 기꺼이 프로듀서를 맡았다.
 
그는 두 달에 걸쳐 406곡을 듣고 또 듣고 여기서 21곡을 추려냈다. 정윤경은 "호철이 형의 음악을 밤새 듣고 있으니, 형의 분노, 절망, 한숨 같은 게 그대로 전해지는 듯해서 고문과도 같았어요"라고 그 경험을 말한다.
 
정윤경은 사실 김호철 노래에 짙게 배어있는 '군가풍·뽕짝풍'이 마뜩치 않았다. 김호철은 노동자의 언어와 정서로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그의 말대로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처럼 투쟁현장에서 힘을 솟구치게 하는 가사와 멜로디가 또 있겠는가. 바리케이트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서정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는 그였다.

그런 '호철이 형'의 마음을 살리면서 사람들이 못봤던 김호철의 아름다운 서정을 발굴하고 다듬어 정윤경은 2018년 12월 음반을 냈다. 헌정음반을 내고 들은 칭찬이 그 어떤 칭찬보다 많았단다.
 
꽃다지 창립 30주년을 준비한다
 
2020년 현재 꽃다지 상근단원은 정윤경과 메인보컬 정혜윤, 기획담당 민정연, 이렇게 세 명이다. 갖고 있는 재산이라고 해봐야 구로동 연습실의 보증금과 악기류가 전부다. 연습실은 사무공간을 겸하는데 지하여서 계단을 내려서야 하고 층고가 낮고 가파라 몸을 숙여야 한다. 연습실 내부는 합주를 맞춰 볼 수 있는 공간, 정혜윤과 정윤경의 개인 연습실, 그리고 기획을 맡고 있는 민정연의 책상이 전부(!) 합쳐서 20평이 되려나? 습기가 심해 없는 살림에 마련한 제습기와 공기청정기가 쉼 없이 돌아간다.

정윤경과 꽃다지는 올해 코로나로 현장 공연을 전혀 못했다. 그동안 대학로 극장을 비롯, 다양한 공간에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정기공연을 해왔다. 작년 11월 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렸던 "데모가 희망이다" 공연은 즐거웠다. 정윤경이 "이제 그만합시다"를 외칠 정도로 앵콜이 넘쳐났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정윤경은 쏟아부었다. 마지막 곡은 '당부'였다. 정혜윤의 맑은 목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정윤경의 어깨가 잔물결처럼 일렁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깊게 감은 눈으로 기타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니 순간 '숭고한' 기운이 무대를 감쌌다. 관객들 사이에선 눈물이 이어달리기를 했다. 이 날 공연이 끝나고 정윤경은 몸무게가 몇 kg 빠졌다. 그런데 정작 수지타산은 별로다. 그래도 지금은 그때가 그립다. 
 
2022년 3월이면 꽃다지 30주년이다. 정윤경은 지금 생계를 유지하던 모든 강습과 아르바이트를 끊었다. 30주년 앨범과 공연 준비에 몰입하기 위해서다. 꽃다지 30주년은 꽃다지만이 아니라 민중가요 운동을 집대성하는 의미도 있고 자신의 노래 인생을 결산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꽃다지의 정윤경 감독 그는 연주, 노래, 작곡, 편곡 및 기획 등 음악과 관련한 모든 영역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팔방미인형 뮤지션이다. ⓒ 민병래


바라건대 그 무대에 함께 오를 꽃다지의 청년 후예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스무 살 나이에 명동성당 '신새벽' 노래패를 찾았듯, 아이유가 이영훈의 <옛사랑>을 부르고 빅뱅이 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부르듯, 민중가요의 20대 후예들이 함께 하면 꽃다지 30주년은 찬란할 것이다.

그는 회고한다. 노래 인생 30여년 동안 가장 기뻤던 일이 'H20000' 프로젝트로 제작된 차를 받았을 때라고. 'H20000'은 쌍용차 해고자들이 자동차에 들어가는 수만 가지 부품을 후원금으로 마련해서 직접 제작한 수제 자동차다. 노동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해고자 복직투쟁과정에서 받았던 수많은 성원들에 보답하는 프로젝트였다. 여기서 완성된 차를 꽃다지가 헌정 받은 것이다. 노래가 필요한 곳을 더 많이 찾아다니라는 압박이며 고택조차 없는 민중가요의 종가집과 그 종손 정윤경에게 보낸 박수이고 격려이리라.
 
나도 그에게 시 하나를 건네고 싶다. 내가 연신내 골목시장에서 그의 노래 '당부'를 들으며 받았던 위로, 그가 민중가요 현장을 의연히 지켜온 그 세월에 감사하며 지은 시 '당부 2'다.

당부2 

볼리비아 깊은 산속에서 
체 게바라가 게릴라 투쟁을 할 때
품속엔 네루다 시집이 있었다. 

지리산 대성골 가파른 비탈길에서
어는 젊은 주검이 낙엽에 묻힐 때 
노래 '부용산'이 있었다. 

시와 노래는 그렇게 비장한 삶 옆에 있는 법

이육사는 식민지 동포의 아픔에 
"어디다 무릎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고 
노래했다. 

존 바에즈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미대륙을 돌며
가난한 흑인들의 손을 잡고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우리 승리하리라'를 불렀다. 

시인과 가수는 그렇게 고통받는 삶 옆에 있는 법

반역의 노래를 짓는 일은 외로우나 함께 가는 길이고
저항의 노래를 부르는 일은 힘드나 빛나는 길이니
넘쳐 넘쳐 흐르는 강물이 되어 유장하게 흘러가자

그리고 정녕 외롭고 힘들 땐 어느 나루에서건 머무르자

시대는 젊은 후예들을 준비해 놓을 테니
역사는 뒷바람을 마련해 젊은 후예들을 강물에 띄울 터이니 
정녕 외롭고 힘들 땐 어느 나루에서건 머물러 다리쉼을 하자
 
 
<못다 한 이야기> 

⓵ 꽃다지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는 홈페이지 (https://ihopesong.tistory.com)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② 이 글을 쓰는 데 꽃다지 기획 '민정연'의 도움말씀, 정경은이 쓴 <한국 현대민중가요사> 평론가 이영미가 쓴 <서태지와 꽃다지> 역시 이영미가 쓴 <광화문연가>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윤경 프로필
 
1986 명동성당 청년연합회 노래패 '신새벽' 활동
1989~1995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음악분과 '새벽' 활동
1994~1997 : 「당부」 발표
1999 솔로음반 <Temporary XXX Files...> 발표
2001~2009 '유정고밴드'결성. <유정고밴드>1집 '조성만'등 발표, 이후 '또 친구에게' '소중한 아이' '내가 왜' 등 발표.
2010 전태일 40주기 기념 '소외된 노동과 함께하는 전태일 40주기 기념문화제' 연출
2011 꽃다지 4집 <노래의 꿈> 프로듀싱
2014 조성일 1집 음반 <시동을 걸었어> 프로듀싱
2018 <김호철 헌정음반> 프로듀싱
2019 대만 다큐 < In Search of 1920> 메인 테마곡 '금강호야' 창작 및 프로듀싱
2004~현재 꽃다지 음악감독 & 대표. 보컬로 활동 중. 꽃다지 콘서트 등 다수의 공연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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