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6 14:56최종 업데이트 20.11.1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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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10일 오후 일본 총리관저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를 면담한 후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최근 한일관계의 진전을 보이는 여러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한국 정보기관의 최고수장인 박지원 국정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스가 요시히데 총리와 실질적인 1인자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을 만났다. 김진표 한일의원연맹 대표는 12일부터 방일, 누카가 후쿠시로 일본 측 대표 및 지도부를 만났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도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언급했다. 특히 박지원 원장은 스가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신(新) 한일공동선언이라는 새로운 어젠더를 제시했다. 최고위급 인사들이 움직이다 보니 실무진도 바빠졌다. 양국 외교부-외무성 차관급 회담이 잡혔고, 국장급 회담도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다.

달라진 분위기

때마침 새롭게 당선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한일 정상과의 전화 회담 중 미국의 동맹전략에 있어 한국은 '핵심축(linchpin)', 일본은 '초석(cornerston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한미일 동맹의 중요성과 굳건함을 강조했다.

또한 한중일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다. 물론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스탠스는 징용공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정상회담에 불참하겠다는 것이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한국정부의 최근 행보는 큰 틀에서 1998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때의 외교 전략을 상당부분 참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오부치 회담의 핵심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일단 놔두고 한일양국이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파트너십 관점에 기반을 두고 실행해 보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10+1개 항으로 이뤄진 공동선언의 내용을 훑어보면 독도, 위안부, 징용 문제 등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정치적 문제들을 2번과 3번 항목에 넣고 나머지 항목들은 미래지향적인 것들로 채웠다.
 

김대중-오부치 총리 1998년 10월 8일 한일정상회담 당시의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 ⓒ 대통령기록관

 
현재는 한국정부가 일방적 구애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스가 내각의 움직임을 보면 아베 내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미 이 시리즈를 통해 말해왔지만 일본은 지난 10월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을 3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에 파견시켰고, 11월로 예정된 한일의원연맹 한국 측 대표단의 방문 전에 일본 측에서 먼저 인사드리겠다며 가와무라 다케오 연맹 간사장을 한국에 파견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11월 12일 내각관방부 정례회견장에서는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의 아래와 같은 답변이 나오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현재 북방영토와 다케시마(독도)는 우리의 시정(施政,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다."

이 답변이 나온 배경에는 미일안보조약 5조가 자리 잡고 있으며, 5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일안전보장조약 제5조 각 체약국은 일본국의 시정이 미치는 영역에 대한 일방의 무력공격이, 자국의 평화 및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라 판단될 때에는 자국 헌법상의 규정 및 절차에 따라 공통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

이 조항을 쉽게 풀이하자면, 일본이 어떤 적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미국이 참전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조약의 첫머리에는 '일본국의 시정이 미치는 영역'이라는 단서가 달려 있다. 이날 정례회견에서 이 부분에 대한 질문, 즉 일본의 행정력이 지배하는 영토를 어디까지 볼 것이며, 이 경우 일본이 지금까지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하고 있는 독도와 북방영토가 공격을 당할 경우 일본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이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확답을 하지 않고 기본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에 그쳤는데, 이날 내각의 대변인이자 2인자로 불리는 관방장관이 "우리의 시정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라고 공언해 버렸다. 그것도 박지원 원장이 한국으로 귀국한 다음날이자, 김진표 의원 등 한국 측 한일의원연맹 방문단이 일본을 찾은 날에 말이다.
 

스가 총리 면담하러 가는 한국 여야 의원들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김진표(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같은 당 윤호중 의원, 국민의 힘 김석기 의원, 남관표 주일본 한국대사와 함께 13일 오후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를 면담하기 위해 도쿄도(東京都) 지요다(千代田)구 소재 총리관저에서 이동하고 있다. 2020.11.13 ⓒ 연합뉴스

 
물론 일본 측의 기존 입장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신일철주금 압류재산을 현금화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속내를 조금만 들여다봐도 신일철주금과는 관계없이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자 하는 마음이 읽힌다. 그 배경에는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이 있다.

전면에 나선 친한파

니카이 간사장은 '요괴'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실세이다. 실제로 자민당 중견파벌 니카이파(志帥会, 47명 규모)의 영수이며, 다나카 가쿠에이의 마지막 제자로 불리기도 한다. 니카이 화법으로 유명한 "밥은 먹었냐?(飯食ったか?)"는 현재 자민당 의원들의 트렌드가 되었다.

무엇보다 스가 총리가 니카이 간사장을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다. 아베 전 총리의 사임 당시 정권의 2인자이긴 했지만 무파벌이라는 결정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던 스가 관방장관이 총리 후보에 나서겠다고 말했을 때 가장 먼저 스가를 지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당시 스가는 유력 후보이긴 했지만 무파벌이라는 결정적 약점 때문에 기시다-이시바 구도에 눌리던 상황이었는데, 니카이 간사장이 가장 먼저 스가 지지로 돌아서면서 구도가 확 바뀌었다. 중도보수인 헤이세이연구회가 니카이파에 이어 스가를 밀었고, 오히려 아베파로 불리는 호소다파(세이와정책연구회)가 가장 늦게 스가 후보를 지지했다.

이렇듯 스가 총리에게 니카이 간사장은 신뢰는 물론 온가에시(恩返し, 은혜를 갚는다는 뜻)를 해야 할 대상이다. 스가의 저서 <정치인의 각오>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가 이 '온가에시' 정신이다. 스가가 총리가 된 후 처음으로 찾은 곳도 그를 정치계로 입문시킨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전 중의원의 묘소였다. 외교 프로토콜상 급이 맞지 않는 박지원 원장을 스가 총리가 환대한 이유도 박 원장과 친분이 깊은 니카이 간사장이 박 원장의 신의와 의리를 강조하며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설득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지난 2017년 6월 아베 일본 총리 특사로 방한한 니카이 도시히로 일본 자민당 간사장(왼쪽)이 박지원 국민의당 전 대표 안내를 받으며 전남 목포시 죽교동 공생원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그렇기 때문에 스가 내각에서의 외교 관련 사안은 니카이 간사장의 언행을 같이 살펴봐야 한다. 스가 총리는 스스로 외교에 약하다고 토로한 바 있다. 반면, 니카이 간사장은 자민당 내에서 가장 강력한 친중파, 친한파다. 실제 동아시아 외교에 있어서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은 거의 사라졌고 니카이 간사장이 적극적으로 언론매체에 등장하고 있다.

DJ 실사구시의 교훈

물론 니카이 간사장은 아베 내각 시절에도 줄곧 자민당의 간사장을 했지만 그 때는 당무와 선거에 집중했다. 아베 전 총리가 스스로를 외교의 달인이라 자부한 것과도 맞물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 상황이 다르다. 아베와 밀월관계를 유지했던 트럼프 정권이 박살났고, 전후 최악이라 일컬어지는 한일관계 및 대북관계, 올스톱된 중국 인바운드 관광 및 유학생 재입국, 코로나19 방역 문제에 대한 한중일 협력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당장 한중일 정상회담이 코앞이다.

이런 문제들을 조금이나마 개선시켜 나가려면 한국, 중국, 북한과의 대화가 시급했지만 아베 정권은 동아시아 외교에 신경을 쓰기는커녕 오히려 적대시했다. 게다가 스가 총리는 그 아베 정권의 2인자였다. 당연히 스가를 의심하는 목소리, 스가나 아베나 똑같다는 주장들이 안 나올 수 없다.

그래서 니카이가 나선 것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니카이 간사장이 나서면서 한일문제 뿐만 아니라 중일문제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일단 내년 1월부터 중국유학생들이 다시 일본에 들어오게 됐다. 정식으로 공표되진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이미 일본어학교 유학생 비자발급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또한 내년으로 예정된 도쿄올림픽 개막식에 북한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스가 총리는 조건 없이 김 위원장을 만나고 싶다고 몇 차례나 말했다.
 

2017년 6월 12일,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접견실에서 일본 특사로 방한한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의 예방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아베는 혐한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을 대놓고 적극적인 지지층으로 삼았던 정권이다.  스가 내각은 '혐한' 아베 내각과 확실히 다르다. 니카이 간사장의 역할도 가미돼 적어도 외교에서는 현실적이며 실용적인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정부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실제로 최근 청와대의 대응을 보면 아베 내각 시기와 확실히 달라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참고로 앞서 잠깐 언급했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의 마지막 '+1'에 해당하는 11번째 항목은 이렇게 쓰여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대신은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이 양국 국민의 폭넓은 참여와 부단한 노력에 의하여 더욱 높은 차원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공통의 신념을 표명하는 동시에 양국 국민에 대하여 이 공동선언의 정신을 함께 하고,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의 구축·발전을 위한 공동의 작업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오부치 게이조. 1998년 10월8일, 도쿄)

온 국민이 고통 받고 있던 IMF 시절이었다. 지금보다 더 여유가 없었고 당연히 양국 국민은 서로가 서로를 비방했다. 하지만 정치는 뚜벅뚜벅 미래를 보며 걸어갔다. 그 시절의 '실사구시' 정신을, 다시 한 번 한일 양국 지도자들이 되새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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