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07 07:40최종 업데이트 21.01.07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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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일왕 1946년 11월 3일 평화헌법에 서명하고 있는 히로히토. 평화헌법은 맥아더가 초안을 작성했다. ⓒ 자료사진

 
서울올림픽 개막일인 1988년 9월 17일부터 히로히토 일왕(천황)은 발열 증세를 보였다. 나루히토 현 일왕의 할아버지인 그가 급기야 병석에 눕게 되자 일본 국민들은 '자숙' 분위기에 들어갔고, 신문 1면에는 그의 체온·맥박·혈압·호흡수 등이 일기예보처럼 보도됐다. 하지만 4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1989년 1월 7일 88세를 일기로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일본 국내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넘쳐나고, 이웃나라들에서는 미묘한 분위기가 일었다. 일본의 구심점이 숨을 거뒀으므로 애도의 감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시아인들에게 고난과 상처를 안긴 장본인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사라졌으므로 '전쟁 책임'을 재차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히로히토가 눈을 감은 당일에 발행된 <경향신문> 사설 '유인(裕仁) 일왕의 죽음'은 "히로히토의 사망 소식에 접하는 우리 한민족의 감회와 감정은 솔직히 말해서 착잡"하다며 "이런 미묘한 감정은 아마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한 뒤, 1989년 당시는 물론이고 훗날까지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를 거론했다. 사설은 전범기업인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의 강제징용을 비롯한 침략전쟁 및 식민지배 문제에 대한 히로히토의 책임을 언급했다.
 
소위 내선일체라는 미명 아래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나라말을 빼앗고 창씨개명까지 강제하는 등 세계사에 유례없는 민족말살 행위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역사적 범죄였다. 특히 미·영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수많은 우리 젊은이와 가장들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혹은 징용으로 내몰고 급기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폭의 제물이 되게까지 한 책임을 일본왕으로서의 히로히토는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책임에 관한 언급은 한 인간의 생애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의례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2021년 현재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미완의 상태였기에 거론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이것은 1989년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미완의 과제였고, 패망 4년 뒤인 1949년에도 동일한 과제였다.

일왕의 전쟁책임 
 

관동대지진 현장을 시찰하는 일왕 히로히토. ⓒ 자료사진

 
패전 뒤에도 여전히 건재한 히로히토를 두고 일본 내에서도 책임론이 계속 제기됐다. 1949년 1월호 <효론>(評論) 권두 기사 '군주제의 딜레마'를 쓴 나카무라 아키라(中村哲) 호세이대학 교수도 그랬다. 그의 기고문을 소개한 그해 6월 8일 자 <조선일보> '패전 일본의 고민상'은 "천황의 전쟁책임은 새삼스럽드(더)라도 인민재판에서 판정해야 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의 주장을 소개했다.
 
법정대학 법학부장인 중촌철씨는 <평론> 1월호의 권두에 '군주제의 지렘마(ジレンマ, dilemma)'를 써서 새삼스럽게 천황의 전쟁책임을 O(판독 불명)하고 일본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추궁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국제재판에서는 천황에는 정치상의 책임은 있으나 연합국 측의 사정으로 기소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포스(츠)담 선언의 근간인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볼 것 같으면 이상의 조치에는 결함이 있으므로 국제재판에 이어서 제2단계로 인민재판을 할 필요가 있다는 논지다.
 
나카무라 아키라의 주장은 일본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승전국들이 주도한 전범재판 제도로도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인민재판 형식을 빌려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반면 히로히토를 변호하는 쪽에서는 그가 형식상의 정점이었을 뿐 실제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개진했다. 이들은 법적인 책임은 물론이고 정치적 책임까지 부정했다. 7인 공저인 <천황의 나라 일본>에서 후지이 쇼이치 리쓰메이칸대학 교수는 그 주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천황에 전쟁책임이 없다는 논거로서 제일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천황의 일본 통치는 일반 국무에 대해서는 내각총리대신 및 각 국무대신들의 보필에 의해 이루어지며 또 군의 통수는 대본영의 보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천황에게는 통치권자로서 정치적 책임은 없으며, 책임은 모두 보필 책임자로서의 정부 또는 대본영(통수기관)에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논거는 적어도 현재의 천황은 입헌군주제 하의 군주 즉 '입헌군주'로서 헌법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히로히토는 정부 및 군부의 보필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며 전제군주가 아닌 입헌군주였으므로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무엇보다 히로히토 자신의 주장과 상당 부분 배치됐다. 그 자신의 발언에 따르면 그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의 허수아비 임금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자신의 전쟁책임에 침묵을 지키던 그는 1975년 9월 30일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통해 부득이 입장을 표명하게 됐다. 그달 27일 자 <동아일보> 기사 '비판 거센 일(日) 천황의 회견'에 요약된 바에 따르면, 21일 있은 <뉴스위크>와의 회견에서 "전쟁 종결에 있어 폐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나 개전의 정책결정 과정에도 폐하가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전쟁 종결 시에 나는 독자적인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수상 스즈키가 각의에서 합의를 이루는 데 실패, 나의 의견을 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의견을 말하고 그대로 결단을 내렸다. 개전 시에는 각의가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나는 그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다. 헌법 조문에 따른 것이다.
 
전쟁 종결 때는 내각이 합의를 이루지 못해 자기 의견대로 행동했고, 전쟁 발발 때는 내각이 합의한 대로 결정을 내렸으며 이는 헌법에 따른 것이었다는 게 그의 발언이다.

다음날인 22일의 외신 기자회견에서는 1941년 진주만 기습 계획을 사전에 알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그는 "내가 군사작전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나는 그러한 보고를 군사령부 수뇌들이 세부 사항까지 결정한 뒤에 받았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런 뒤 전날 했던 것처럼 "나는 헌법의 규정에 따라 행동했다고 믿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결단은 자신이 내렸지만 세부 사항은 내각이 결정했으며 그런 과정은 헌법적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고 답한 것이다.

"폐하는 군부의 행동이나 야망에 대해 일정의 제약을 가하려고 노력을 했다고 들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 말해주기 바란다"라는 유리한 질문이 나오자, 이번에는 결이 다른 대답이 나왔다. "지금 말한 대로라고 생각이 되나, 구체적으로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게 답변이었다. 자신이 군부에 대해 제약을 가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시인한 것이다.

주된 책임을 내각과 군부에 돌리기는 했지만 그의 회견에서 드러난 것은 그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진주만 기습 이전에 세부 사항을 보고받았고 군부에 제약을 가할 처지에 있었다면, 전제군주나 대통령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권한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천황은 책임 없다'라는 말의 의미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기념사진. ⓒ 위키백과

 
그런데도 그의 전쟁책임이 불문에 부쳐진 것은 미국과 일본 지배층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소련과 중국 공산당을 견제하고 태평양 전선을 방어하려면 일본을 새롭게 개조하기보다는 기존의 일본 지배층을 그대로 두는 편이 유리했다. 이것이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판단이었다.

앤드루 고든 하버드대 교수의 <현대 일본의 역사>는 "1945년 가을에 맥아더는 천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인물로 부상했다"라면서 "히로히토를 강제로 전범재판에 회부하거나 퇴위시키면 사회질서와 미국의 정책이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긴급 보고서를 본국에 보냈다"라고 설명한다.

맥아더의 태도는 일본 지배층의 이익에도 부합했다. 천황제가 무너지면 그에 기초한 기득권 질서도 함께 무너져 민중의 세상이 도래할지 모른다고 그들은 우려했다. 나카무라 아키라는 위 기고문에서 "천황제 지지자의 다수는 천황제 자체의 가치를 인정한다기보다는 천황제가 폐지됨으로써 생기는 민주세력의 대두를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미국과 일본 지배층의 그 같은 이해관계로 인해 히로히토의 책임은 묻혔고, 이는 그가 죽은 1989년은 물론이고 2021년까지도 그의 전쟁책임론이 미해결 상태로 남도록 한 원인이 됐다. 또 극우세력과 일본 정부가 전쟁범죄에 대해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게 한 배경이 되고 있다. '천황은 책임 없다'라는 주장 뒤에 숨어 일본 국가가 집단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일본제철과 더불어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받은 또 다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이 지난해 12월 30일과 31일 이틀에 걸쳐 국내 자산 압류명령에 즉시항고를 제기했다. 75년 전에 지급했어야 할 것들을 아직까지도 거부하는 그들을 합리화하는 것 중 하나는 대외침략의 구심점인 히로히토조차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은 외국이 일왕의 책임을 거론하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히로히토의 책임을 덮어주고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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