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08 19:32최종 업데이트 21.01.0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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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후 마을 사람들은 대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 림수진

 
어찌되었든, 2020년이 지나갔다. 내게 2020년은 3월 16일을 기점으로 그 전후가 전혀 다른 세상으로 기억된다. 3월 16일은 내가 2020년 정상적으로 출근한 마지막 날이었다. 기억해보면, 당일 학교의 상황은 좀 긴박하게 돌아갔던 것 같다.

그 날 아침 주 정부가 3월 18일(금요일) 이후 주 내 모든 학교들이 봉쇄될 것임을 발표하였고, 이후 일정에 대해선 별도의 안내가 없었다. 때문에 교수들이나 학생들이나 다소 우왕좌왕했다. 한국과 달리, 학교가 봉쇄되면 그 누구도 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일부 교수들은 연구실에 있는 책을 빼야 할 것이라고 했지만, 대다수 교수들은 금방 상황이 정상화될 것이라 생각하여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3월 16일... 두 가지 위협

그날 이런 상황과 별도로 나는 학과장에게 면담을 신청했고, 면담 자리에서 개인 사정으로 당장 내일과 모레 학교를 나오기가 어렵겠으니 이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가지 이유였다. 그 첫째는 최근 며칠 사이 불특정 다수로부터 받던 공격적 차별이었고, 그 두 번째는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을 들고 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나는 멕시코 중서부 지역 어느 작은 소읍에 살고 있다. 이하 C읍이라 하자).

지난 15년 동안 멕시코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내가 외국인이란 사실 때문에 직장에서든 마을에서든 혹은 그 외 어떤 곳에서라도 사람들의 나를 향한 배려가 더욱 세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내가 멕시코 사람들을 좋아하고 존중하는 이유이고 어쩌면 그런 인간적 친절함 때문에 이곳의 삶을 선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2월 말 그리고 3월 초로 들어서면서 연달아 이상한 일에 휘말렸다. 내 차선을 지키며 운전을 하고 있음에도 내 차 주변을 지나는 차들이 내 차를 향해 매우 난폭하게 운전을 하거나 일부 기사들은 경적을 울려가며 내게 소릴 질렀다. 한 번은 차가 과속 방지턱을 지나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데, 길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들이 내게 "더러운 중국인"이라고 소릴 지르기도 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변화였지만, 이미 뉴스를 통해 멕시코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 출현 이후 동양인들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차별을 여실히 접하고 있었기에 나에게 가해지는 불편한 시선과 행동의 맥락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다만, 그런 사실을 접하는 동료들은 하루 빨리 내게 재택근무로 전환할 것을 권유하였다.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후로도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큰 변화 없이 이어졌다. ⓒ 림수진


두 번째 이유였던 마을 출입의 불편함은 3월 중순경부터 시작되었다. 마을을 들고 나는 길목에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개인 화기로 무장한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소독 통을 든 채 오고 가는 차량을 세우고 심문을 시작했다. 그들의 소속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주 정부나 기관 소속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을을 들고 날 때마다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들에겐 언제라도 마을 출입을 금지시킬 수 있는 힘이 있어 보였다. 마을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겠으나 혹 마을을 나갔다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은 내게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학과장은 흔쾌히 내게 3월 16일 이후 남은 이틀 간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던 와중 그 날 오후 상황이 조금 더 긴박했던지 주 정부 명령보다 이틀이나 앞서 학교 차원에서 모든 활동 중지와 소개령을 내렸다. 각자 안전한 곳에 흩어져 코로나바이러스를 잘 피하라는 안내 뿐, 이후 수업이나 행정 업무 지속에 대한 안내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예기치 못한 채 학기가 중단되었다.

4월로 접어들면서 멕시코와 한국 간 항공기 운항이 잠정 중단되었고 양국 간 우체국 국제우편 서비스도 사라졌다. 멕시코 주요 대도시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들 사이에서는 전세기를 띄우겠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설령 전세기가 뜬다 한들 내가 사는 C읍으로부터 약 1000km나 떨어진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이 여의치 않았다. 물론 당장 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어디든 있는 그 곳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았다.

납작 엎드리다

4월 중순경 셧다운에 들어갔지만, 우려되었던 사재기는 없었다. 특히 내가 사는 C읍에서는 오히려 가게에 물건이 잔뜩 쌓여 흘러넘칠 정도였다. 사재기도 결국은 돈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당장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활절이 가까워질 무렵, 근처 대도시로 나가서 일을 하던 마을 사람들이 당장 하루 벌이 할 곳을 잃게 되면서 밥 굶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읍사무소 복지부가 나서서 기초 생필품을 지급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는 수준이었다. 마침 그 때 선물 상자들이 쏟아져 내려왔으니, 이미 여러 해 전 마을을 장악한 마약 카르텔 조직으로부터 당도한 물건들이었다. 우리 마을은 멕시코 최대 카르텔 조직이라 할 수 있는 '할리스코 신세대 카르텔'의 영향 하에 있었고 선물 상자에도 그들의 문장이 굵직굵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시 수업이 재개된 것은 6월이었다. 물론 비대면 수업이었다. 학교에서 수업 개시와 관련하여 강조한 유일한 것은 '유연성'이었다. 절대 기준을 정하지 말고 최대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고 또한 학생들에게 수업과 관련하여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이면엔 최대한 간단하게 이번 학기를 마무리 지으라는 메시지가 읽혔다.

학생들 일부는 인터넷은커녕 이동전화 신호도 잡히지 않는 곳에 머물고 있었다. 이메일부터 SNS 매체들 그리고 때로는 유선 전화를 이용해 각각의 학생들 상황에 맞게 수업이 이루어졌지만, 그 어떤 학생들도 이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서로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게 된 아이들도 대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 림수진

 
학사일정대로라면 5월부터 8월 학기 개강을 앞두고 신입생 선발 프로세싱이 진행되어야 했지만, 우리나라 수능 격에 해당하는 국가시험이 치러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물론 각 전공별로 국가에서 주관하는 학사 학위 취득 시험도 그 어떤 안내조차 없이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러니 졸업과 입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미 개강 시점을 훌쩍 넘긴 8월 중순까지도 신입생 선발을 하지 못하던 중, 우여곡절 끝에 국가시험 없이 각 학과 별로 입학 절차를 결정하여 최대한 '유연하게'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9월 말로 연기된 개강을 바로 앞에 둔 시점이었다. 어쩌면 2020년 전국적으로 신입생 선발 없이 학기가 시작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에 대한 불만 또한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비정상적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다'라는 사회적 동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개강을 한 첫 주, 1학년 수업에 들어가는 교수들에게 교육 참여 명령이 내려왔다. 신입생으로 선발된 46명 중 한 명이 선천적 시각장애를 가졌기에 그 학생을 위해 교수들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비정상적인 상황이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는 잊히지 않았다.

학기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 번 수업이 중단될 뻔한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여기까지 왔다.

소시민들의 코로나 생존 방식

마을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이 작은 소읍에 머문 지 열 달이 되어간다. 다행히 마을 안에서 대부분 자급이 되었다. 채소와 과일은 늘 풍성했고 닭은 물론 소까지 잡았으니 모든 육고기와 유제품이 해결되었다. 하지만 생선은 구할 수 없었다. 머리는 이웃 아주머니가 잘라 줬고 낡은 옷과 낡은 신발들은 마을 기술자들이 나서서 기워 주거나 때워 줬다. 물론 맘만 먹는다면 인근 도시로 나가 해결할 수도 있겠으나 시나브로 이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다.

지난 열 달 동안의 시간을 더듬어 보면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많이 웃으면서 지낸 시간이 아닐까 싶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연일 낄낄거리는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낄낄거렸다. 그렇다고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 마을을 비껴 간 것도 아니고 그로 인한 사망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더러 가까운 이웃들도 감염이 되고 그들 중 회복하지 못한 채 우리에게 작별을 고한 사람들도 있지만, 사람들은 꿋꿋하게 웃었다. 어쩌면 그 웃음이야 말로 이토록 비정상적인 상황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인 양, 그들은 웃었다. 덩달아 나도 웃었다. 그야말로 대책 없이 웃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후 마을 사람들은 대자연 속에서 만남을 이어갔다. 바그다드 까페라 명명된 모임터. 누군가 만들어 둔 작은 나무 테이블 하나와 나무 둥치를 잘라 만든 의자 세 개가 있는 곳이다. ⓒ 림수진

 
그렇게, 내가 '성님들'이라 부르는 마을의 모든 아줌마와 아저씨들은 여전히 꿋꿋하게 그리고 의연하게 이 상황을 살아간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웃으며 살아간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 마을뿐 아니라 멕시코 그 어디에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고 광란의 시위를 벌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게나 은행과 같은 실내에 들어설 때에는 하다못해 입고 있던 티셔츠라도 벗어 입과 코를 가린다. 이 또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간혹 '아, 위험하다' 싶을 만한 상황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내가 한국 방역의 기준에서 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이고 이들에겐 한국의 방역 시스템만큼 정확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배당이나 혹은 누군가의 장례식에서 철저하게 마스크를 쓰고 있다가도 소리를 내어 기도문을 외우거나 성가를 불러야 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매우 경건하게 마스크를 내리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 한국에서 적용되는 방역의 기준에서 본다면 기함을 할 일이지만, 사실 한국도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초기에 실외에서 꿋꿋하게 마스크를 쓰다가도 카페나 실내에 들어가면서 마스크를 벗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지난 6월 어느 날 총소리와 함께 홀연히 사라져버린 개 두 마리를 잃고 슬픔에 빠져 집 안에 처박혔을 때 마을 성님들은 '개 찾으러 가자'고 꼬셔 나를 집 밖으로 끄집어 내셨다. 그렇게 이상한 걷기가 시작되었다. 나야 이미 4~5년을 걸어온 터지만, 성님들은 순전히 우리 개를 찾자고 시작한 걷기에서 코로나시대를 견딜 수 있는 어떤 힘을 보신 듯했다. 그 이후 성님들은 새벽이고 밤이고 걸었다. 마을의 가장 끝자락에 있는 우리집을 지나면 대자연이다. 그러니 대자연에 들어가기 전 꼭 우리집 앞에서 나를 불러 끄집어 내셨다. 때론 성님들이 참새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지치지 않고 짹짹짹 즐거워하는.

지난 2020년의 마지막 날, 동이 트려면 아직 먼 새벽에 성님들이 우리집 앞을 지나며 곤히 자던 나를 끄집어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니 저 위 사탕수수밭 너머 어디쯤에 가서 조용히 한 해를 마무리 짓자는 것이었다. 며칠 전 지나는 말로 한국은 떠들썩한 파티보다는 대략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한다고 말을 전한 적이 있는데, 성님들은 그 말을 담아두셨나 보다. 어느 성님은 커피 주전자를 들었고, 또 어느 성님은 빵 자루를 들었고, 그리고 또 다른 성님은 머리에 장작을 이고 나선 길이었다.

별이 쏟아지는 새벽길을 더듬어 올라간 어디쯤에서 서로 멀찍이 거리를 두고 둘러섰다. 여전히 해가 뜨기 전이었다. 성님들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부스럭부스럭 꺼내기 시작했다. 각자의 종이에는 지난 1년간 고마웠던 일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초등학교 3~4학년을 겨우 다니다 만 성님들이 괴발개발 써온 글씨들을 읽어 나갔다. 시답잖으나 진지한 성님들의 감사를 들으면서 어쩌면 이 성님들의 구구절절한 감사야말로 코로나시절을 살아가는 어떤 큰 무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후 마을 사람들은 대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 림수진

 
이미 1백 만 명을 훌쩍 넘긴 감염자와 13만 명에 육박하는 사망자가 나오는 와중이니 이곳 멕시코 작은 소읍에서 낄낄낄 웃어가며 살아가는 성님들이 때로는 무책임해 보이고 때로는 대책 없어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가난하였으니 더 이상 크게 가난해질 일이 없고, 이미 국가로부터 바라는 것 없었으니 더 이상 크게 실망할 것도 없고, 이미 의료시스템에 기대한 적 없으니 작금의 상황이 크게 혼란스럽지 않은 듯하다. 어쩌면 이들은 그들 생 전반을 작금의 현실과 같은 비상 상황에 대처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곳이야 말로 늘 죽음이 횡행하는 곳이니까, 각자가 알아서 살 길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어찌어찌 지금과 같은 생존의 방법을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열 달 넘게 지속되는 코로나 시절이지만 이들은 결코 지치지 않은 채 살아간다. 불만과 불평도 없다. 비정상적인 상황임을 인식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오직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즐거워할 수 있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마을 언저리 사탕수수밭 사잇길을 걷고, 어릴 적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마을 곳곳에 숨겨진 비밀의 장소를 찾기도 하고, 어느 날 장작을 가득 짊어지고 가 저 멀리 있는 화산 언저리 어디쯤에서 옥수수나 타코를 구워먹는다. 서로가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서.

작금 여러 나라에서 적용되는 방역의 기준으로 본다면 한심해 보일지 몰라도, 어쩌면 이들은 최선을 다해 코로나바이러스의 시절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지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불만하지 않은 채, 조금은 느긋하고 조금은 의연하게, 그간 닦아온 삶의 내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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