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24 19:59최종 업데이트 21.01.24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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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820호 함녕전 고종 황제가 1919년 1월 승하한 장소 ⓒ 자료사진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한국인들의 저항의식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이때 한국인들의 저항을 가슴 속 분노 단계에서 직접적 행동 단계로 전환시킨 기폭제가 있다. 고종황제의 사망이 바로 그것이다.

1910년에 '대한제국 황제'에서 '일본제국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된 고종은 만 열두 살 나이로 왕이 됐던 그 날짜에 6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1863년 12월 13일 즉위했다는 식으로 서술된 서적들이 적지 않지만, <고종실록>에 따르면 그 날짜는 음력으로 임자년 12월 13일, 양력으로 1864년 1월 21일이었다. 이 날 즉위했던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의 죽음이 1월 22일 발표됐지만, 일본에서는 21일 사망한 것으로 보도됐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이 2019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 제74호에 기고한 '고종 독살설과 3·1운동'에 따르면, 훗날 <마이니치신문>으로 바뀌는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1919년 1월 23일자 기사에 "21일 미명에 중태에 빠진 이태왕 전하는 응급조치한 보람도 없이 21일 오전 6시 30분 훙거했다"는 보도가 실렸다.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일본 천황가 마사코 결혼 사진 고종 황제의 아들이자 황태자 이은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 유학을 떠나고 1920년에는 일제에 의해 천황가 마사코와 정략 결혼을 한다. ⓒ 국립고궁박물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은 사망 발표가 늦어진 이유와 관련해, 현직 왕세자 이은(대한제국 시절의 영친왕)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한국명 이방자)의 결혼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내부 방침을 정하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1916년 8월 3일 '일·한 융화'의 상징으로 발표됐던 이은과 이방자의 약혼에 미칠 영향을 고심하다가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발표 지연은 한국인들의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했다. 거기다가 오늘날의 도로 기준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창덕궁에 있었던 아들 순종황제(당시는 일본제국 이왕)가 임종을 못 지켰기 때문에, 일본이 숨기는 게 있다는 의혹이 더욱 빨리 확산될 수 있었다.

고종 독살설

역사공간이 발행한 시리즈물인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조완구 편은 "상황이 돌발적이다 보니, 걸어서 불과 반시간이 되지 않는 거리의 창덕궁에 있던 이왕(순종)조차 임종을 지키지 못할 정도였다"며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고종의 독살설"이라고 설명한다.

고종의 시신 상태도 의혹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됐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칠규(七竅, 일곱 구멍)로 피를 흘렸고, 유해는 초에 절인 것처럼 물렁물렁했으며, 피부는 푸른빛을 띠었다"고 말한다. 위의 윤소영 논문은 "고종 독살설은 아니 땐 굴뚝에서 나는 연기는 아니었다"고 한 뒤, 시신에 수의를 입히는 소렴 때에 확인된 상태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에서 결혼식을 앞둔 영친왕 이은이 결혼식을 포기하고 조선에 건너와 1월 24일 오후 1시부터 거행된 소렴식에서 고종의 시신이 이상한 모습이었다고 한 이야기가 궁궐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순종 황제를 보필했던 김명길 상궁은 고종의 시신을 염을 할 때 시체에서 살이 묻어나 독살에 대한 의문이 한층 굳어졌다고 회고했으며, <윤치호 일기> 1920년 10월 13일자에는 고종을 염한 자리에 있었던 민영달에게 들은 이야기로 '고종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었고 황제의 입 안에 이가 모두 빠져 있었고 혀가 닳아 없어졌다. 30센티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대중의 귀와 입을 통해 전달되면서 고종 독살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장례식을 이틀 앞둔 3월 1일 새벽에는 독살설에 입각한 격문이 서울(경성부) 시내에 붙기도 했다. 윤소영 논문에 인용된 격문의 서문은 이렇다.
 
"1919년 3월 1일 미명, 서울 종로와 서대문 일대 조선인 주택에는 한 장의 격문이 산포되었다. 격문은 거리의 담벼락에도 붙었다. 격문은 '오호 통재라. 우리 이천만 동포여. 우리 대행태상황제 폐하 붕어의 원인을 아는가 모르는가. 평소 건강하시고 또 병환이라는 소식도 없었는데 밤중에 침전에서 창졸하게 붕어하니 이 어찌 범상한 일이겠는가."
 

고종황제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고종 황제의 어진.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모습이다.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12점이 제작되었는데, 6점만 전해지고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는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격발시키고 의병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됐다. 그것은 국모로 불리는 중전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본이 한국을 함부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분노에서 일어난 항쟁이었다. 그런 경험을 했던 한국인들이 24년 뒤인 1919년에 또다시 고종 독살설을 접했으니 민심이 더욱 들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소유권을 가진 토지는 물론이고 경작권을 가진 토지까지 빼앗긴 사람들이 많았다. 세계적으로 2500~5000만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독감(발병지는 미국) 때문에 1919년 1월 말 현재 사망자 14만, 확진자 760만이 발생해 있었다. 이로 인해 식민지배에 대한 원한이 더욱 커지는 상황에서 명성황후에 이어 고종마저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는 최대 200만 명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 "일본 나가라"를 외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고종 독살이 확정적으로 입증된 것은 물론 아니다. 시신의 치아가 다 빠져 있었고 염할 때 살이 묻어난 것도 타살의 증거로 거론됐지만, 윤소영 논문은 식민당국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4일간 시신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 생긴 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한다.

독살설의 진위 여부는 좀 더 확인해봐야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일본이 고종을 부담스러워할 명백한 이유가 1919년 연초에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의심받는 이유

이 시기에는 고종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를 베이징에 망명시키는 계획이 독립운동가 이회영 등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전 내부대신 민영달의 자금으로 이회영이 이 일을 추진한 것에 관해 역사학자 이덕일의 <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민영달은 5만원의 거금을 내놓았는데, 이회영은 이 자금으로 북경에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구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이렇듯 자금이 마련되고 행궁까지 준비되어 구체화되어 가던 고종의 망명계획은 의외의 사태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며 "당사자인 고종이 예기치 못하게 급서한 것"이라고 위 책은 말한다. 고종이 이처럼 대담하게 행동할 때였으니, 식민당국 입장에서도 그를 더욱 더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뒤늦게 참전하면서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8일 연두교서에서 언급한 민족자결주의 원칙도 일본이 고종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단을 파견해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려 했던 고종이 민족자결주의를 활용해 또다시 일을 벌이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 위임장 1907년 4월 20일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기 위해 고종이 이준에게 발급한 위임장. ⓒ 자료사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9년에 <역사학보> 제204집에 기고한 '고종황제의 독살과 일본정부 수뇌부'는 "고종황제의 죽음은 일본 내각 총리대신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지시하고 조선총독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지휘하여 감행된 독살"일 것으로 추정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총리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독살 지시는 1918년 1월 8일에 발표된 윌슨 미국 대통령의 14개조에 반영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대책 차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총리대신 데라우치는 1905년 11월 보호조약 강제 이후로 고종황제가 열강국을 상대로 벌인 외교전 특히 1907년 6월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한 사실 등으로 볼 때 민족자결주의 선포를 계기로 그가 다시 움직일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태진 교수가 근거 자료로 제시한 것은 일본 궁내성 간부인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의 회고록이다.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倉富勇三郞日記)>에 적힌,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인 친일파 송병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송병준이 구라토미에게 고종 사망의 비화를 들려주면서 했던 이야기가 이 일기에 수록돼 있다.

일기에 따르면, 일본이 고종을 회유하고자 모종의 제안을 했다는 이야기가 일본 정부와 식민당국 내에 돌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종이 해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1919년 10월 30일자 구라토미 일기는 제안의 구체적 내용은 듣지 못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하세가와 요시미츠에게 뜻을 전하여,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에게 설명하게 하였지만 태왕이 이를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데라우치가 하세가와에게 얘기했다고 하는 일(의 구체적 내용)을 듣지 못했다."

일본이 고종을 어떻게 회유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회유를 시도해야 할 정도로 민족자결주의와 그것이 한국에 미칠 영향을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사실이다. 1919년 연초에 그들이 고종을 예의주시할 만한 이유가 많았던 것이다.

크게는 민족자결주의에 기인하고 작게는 스페인독감 등에 기인한 측면도 있지만, 이 시기에 한국인들이 행동에 나선 것은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 의식 때문이었다. 웬만해서는 정치문제에 잘 나서지 않는 종교단체 지도자들이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한 사실만 보더라도 이 시기에 민심이 얼마나 들썩거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다음날 이 사실이 공식 발표되면서 고종 독살설이 삽시간에 번져나갔고, 이것이 한국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 역사에도 길이 기억될 3·1운동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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