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24 11:57최종 업데이트 21.01.24 11:57
  • 본문듣기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편집자말]
"폭도들은 들어라,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
- 박노해, <광주 무장봉기의 지도자 윤상원 평전>(노동해방문학, 1989년 5월)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이 사격을 가하며 전남도청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윤상원은 동료들과 함께 도청 2층 민원실에서 계엄군에 대항하고 있었다. 총탄 세례 속 이곳저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료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갔고 이내 상원이 있는 2층 창문을 향해서도 총탄이 마구 날아들었다. 상원은 그곳에서 누구인지 모를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버리지 못한 꿈

상원은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 천동 한 농민의 집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활달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삼수를 거쳐 1971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연극반 활동을 하고, 군에 다녀온 뒤에는 고시를 준비하는 등 평탄한 대학 생활을 보냈다.

그러다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살이를 한 선배 김상윤을 만난 1975년에 사회과학 공부에 눈을 뜬다. 상원은 노동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광주의 진보적 활동가들의 거점이던 '녹두서점'에서 소그룹 활동에 참여하며 사회과학적 소양을 갖춰나갔다.
 

윤상원 열사의 생전 모습 ⓒ 윤상원기념사업회

 
1977년 대학교 4학년이 됐을 때 상원은 고민에 빠졌다. 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부모와 형제를 생각하면 장남으로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았다. 고민 끝에 상원은 졸업을 앞둔 1978년 1월 주택은행(현 국민은행) 입사 시험을 보고 합격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한 생활도 잠시, 반년 만인 7월에 사직서를 내고 광주에 돌아왔다. 사회 변혁의 꿈을 저버릴 수 없었다. 상원의 결심은 그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부모님께서 저를 이토록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평생을 다 바쳐 노력하여도 부족하겠지만, 유신독재가 판치는 우리나라 상황은 저를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아가게 하지 않았습니다…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그마한 힘이나마 보태려는 불초 소생의 마음을 용서하셔서 차라리 참된 효도의 길이라 여겨 주소서.
- 윤석진, <광주재조명 - 윤상원을 통해 본 광주항쟁>(월간중앙, 1989년 5월)

광주에 내려온 상원은 학력을 고졸로 위장해 곧장 광천동 공단의 '한남플라스틱'에 취업했다. 광천 공단 노동자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그는 그동안 공부하며 관심을 기울인 노동운동에 직접 뛰어들게 된다. 또한 '들불야학' 설립을 주도한 박기순의 제안을 받아들여 1979년 1월 야학의 강학(교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들불야학은 노동자를 교육하는 노동야학이자 민중야학이었다. 들불야학은 5월 광주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항쟁의 서막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됐다.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자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기대가 꽃을 피웠다. '서울의 봄'이었다. 그러나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박정희가 사망하고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당시 계엄사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대한민국에 드리운 독재 연장의 어두운 그림자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회 전반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1980년 5월 초순 비상계엄령 해제와 유신 잔당의 퇴진을 내세우며 시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광주 지역의 대학생들은 5월 14~16일 3일 연속 가두시위에 나섰고, 도청 앞 광장에서는 매일같이 민족민주화성회가 열렸다. 상원은 이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

전 국민적 민주화 열기에 놀란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하여 전국의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은 사전 검열을 거치게 했다. 이에 따라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주요 대학이 계엄군에 의해 수색·점거됐으며, 사회운동·학생운동 지도자 상당수가 예비 검속됐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전북대학교 농학과 2학년 이세종은 갑자기 학교로 들이닥친 계엄군에 쫓겨 도망치다 온몸에 멍이 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 archives.kdemo.or.kr

 
전라북도 전주에서 전북대학교 학생이 이 과정에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자는 전북대학교 농학과 2학년 이세종이었다. 전라남북도 대학 연합체인 '호남대학총연합회'에서 연락 책임자를 맡고 있던 그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17일 밤 학교에서 동료들과 밤샘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갑자기 학교로 들이닥친 계엄군에 쫓겨 도망친 그는 온몸에 멍이 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당시 검찰이 발표한 사인은 추락사였지만, 이세종의 검안을 담당한 전북대 병원 이동근 교수는 "단순 추락만으로는 그런 상처가 생길 수 없다"라며 추락 전 계엄군의 집단 폭행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항쟁 초기의 광주

신군부의 계엄 확대 발표에도 5월 18일 오전 10시경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모여든 학생이 200~300명은 족히 됐다. 경찰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려 했으나, 이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맞섰다. 11시경부터는 도청이 있는 금남로로 장소를 옮겨 집회를 이어나갔다. 학생 수는 어느새 600~800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들어 투입된 계엄군은 학생들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고, 집단 폭행을 가하는 등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

이 같은 광경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학생 시위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5월 19일 금남로에는 오전 10시부터 3000~4000명가량의 시민이 집결했다. 군과 경찰은 해산을 종용했으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계엄군이 30여 대의 군용트럭을 끌고 나타났다. 한 손에는 착검한 총을, 다른 한 손에는 곤봉을 들고 철모까지 쓴 모양새였다. 이들은 도청 앞과 금남로 사거리로 진출해 시민들을 곤봉과 대검으로 때리고 찌르는 등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계엄군은 금남로 거리에서 젊은이들의 옷을 모두 벗긴 채 구타하고 기합을 주는 비인도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당시 시위 진압에 투입됐던 한 의무 전경에 따르면 공수부대원들은 반항하는 젊은이들을 속옷만 입혀서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논산훈련소에서 신병을 다루듯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쪼그려 뛰기' 등을 시켰다.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그저 시위 근처를 지나던 사람이 진압 대상이 되기도 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던 김경철은 금남로 거리를 지나다가 계엄군에게 붙잡혔다. 경철은 계엄군에게 장애인 증을 내밀었지만, 군인들은 "수를 쓴다"라며 그를 집단 구타했다. 그는 변명할 기회도 없이 온몸을 두들겨 맞은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경철은 어릴 적 사고로 장애인이 됐지만, 기술을 배워 양화점 직공이 됐고 결혼해 백일 남짓 된 아이를 키우고 있는 29세의 청년이었다.

상원은 이러한 유혈사태를 지켜보며 계엄군의 강경한 진압에 대항할 최소한의 자구 수단으로 화염병을 만들어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 시민들의 행동과 주장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들불야학 강학들과 함께 선언문, 궐기문 등 유인물을 제작해 배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종이가 부족한 데다 수동식 등사기를 사용해야 했기에 전단 작업에는 꽤 큰 노력이 필요했다.

집단 발포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광주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더불어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5월 20일 광주 시민과 계엄군은 금남로 일대에서 몇 차례 공방전을 벌이다가 전남도청과 광주역 등지에서 밤늦도록 대치했다. 계엄군의 총칼과 진압봉에 맞서 시민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들고나왔다.

밤 9시 50분께 광주MBC 건물이 불에 탔다. 군부의 검열 하에서 현 광주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정부의 발표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에 분노한 시민들이 방화한 것이다.

밤이 더욱 깊어지자 광주역을 경계하던 3공수여단이 시민을 향해 집단 발포했다. 이후 3공수여단은 전남대로 퇴각하면서 앞을 가로막는 시민들을 구타했고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공수부대원이 물러난 뒤인 21일 새벽 5시 무렵 광주역 앞에서 발견된 시신 두 구는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끓어오르게 했다.

21일 오전 8시 군은 광주 전역에 '진돗개 하나'를 발동했다. '진돗개 하나'는 최고 경계 태세를 의미한다. 무장공비 출현 등에 대응하는 대간첩 작전으로 전 병력에 실탄을 분배하고 전투 태세에 돌입하도록 하는 조치다. 공수부대는 시위진압이 아니라 사실상 대간첩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광주 시민을 '적'으로 간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가 전일빌딩 앞에서 선회하는 모습. 현재도 광주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빌딩에는 헬기사격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탄흔이 남아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광주역 인근에서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며 시민들의 투쟁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분노한 시민들은 5월 21일 이른 아침부터 금남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오전 10시경에는 그 수가 10만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당시 광주 전체 인구가 72만~73만 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시민들은 정오까지 계엄군의 완전한 철수를 요구했으나, 계엄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은 아침 일찍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끌고 나온 장갑차와 차량을 몰아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 과정에서 11공수여단 군인 한 명이 장갑차에 치여 사망했다. 이를 기점으로 오후 1시경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됐다. 그것은 단순 위협 사격이 아닌 조준 사격이었다.

군은 저지선을 설정한 뒤 그 선을 넘는 사람에게 무조건 발포했다. 금남로는 총탄을 피하는 사람과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 뒤엉키며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날 광주 시내 병원은 총상자로 가득했다.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서 내용을 종합해볼 때 이날 최소 54명 이상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광주 봉쇄 그리고 항쟁

5월 21일 윤상원을 포함한 민주화 운동세력의 청년들은 녹두서점에 모여 광주의 현 상황과 향후 투쟁 방향 등을 토의했다. 이들은 조직적 역량의 부족 등 현재 광주의 운동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운동이 더 심화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앞으로 행동 방향은 개인의 소신에 맡기기로 했다. 이날 이후 그나마 남아있던 운동권의 많은 이들이 광주를 빠져나갔다.

상원은 광주에 남아 항쟁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상원은 시민들에게 현 광주 실태와 투쟁에 관한 올바른 방향, 행동지침 등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계엄 당국의 언론 통제로 신문과 방송이 제 역할을 못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상원은 들불야학팀을 비롯한 남은 세력과 함께 '투사 회보'라는 민중언론을 발간하기로 했다. 이들은 물자조달조·문안작성조·필경등사조·배포조 등으로 역할을 분담하여 회보 제작에 착수했다. 상원이 초안을 작성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등사하여 배포하는 식이었다.

투사 회보는 21일부터 26일까지 총 9호, 매회 1만~2만 장씩 간행됐다. 16절 갱지의 양면에 등사된 투사 회보는 비록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시민들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소식지였다. 투사 회보에는 피해 상황, 집회 일시, 시민 행동강령 등의 내용이 게재됐다.
 

투사회보 5호와 6호 ⓒ mbc

 
집단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계엄군은 잠시 광주 시내에서 퇴각하기로 했다.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광주를 고립하는 봉쇄 작전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 통신을 차단해 계엄군의 발포와 사망 사실 등이 밖으로 전달되지 못 하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봉쇄에 따라 22~26일 광주엔 잠시나마 폭풍 전야 같은 평화가 찾아왔다.

계엄군이 잠시 물러난 시기 광주에는 아수라장이 된 시내를 수습하기 위한 시민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나와 금남로 거리를 청소하거나 부상자를 위해 헌혈을 하는 등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었다. 23일부터는 매일 수만 명에 이르는 시민이 도청 앞에 모여 범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5월 22일 꾸려진 민관수습위원회는 이날 오후 계엄 당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수습위는 계엄 당국에 ▲계엄군의 과잉진압 인정 ▲구속학생 및 민주인사 석방 ▲시민의 인명과 재산피해 보상 ▲발포명령 책임자 처벌·사과 ▲사후 보복 금지 등을 요구했다.

계엄 당국은 수습위가 먼저 시민들로부터 무기를 회수해 군에 인계한다면 요구 조건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당시 시민들은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대항하기 위해 전남 지역의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 등 무기가 있을 만한 곳을 돌아다니며 M1 소총과 칼빈 소총 등을 뺏어 무장한 상태였다.

수습위는 시민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자고 설득했으나 정부의 사과 및 책임자 처벌이 우선하지 않으면 무장을 해제하지 않겠다는 주장이 맞섰다. 별도로 대학생 수습위원회가 꾸려졌는데, 여기서도 선 무장해제를 주장하는 온건파와 반대하는 강경파가 대립했다.
 

80년 5월 26일 5시 광주 금남로 옛도청에서 윤상원 열사가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가진 기자회견 장소에 당시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 심명남

 
상원은 강경파에 속했다. 그는 당시 수습위가 투항을 주장함으로써 시민 의사에 반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다. 상원은 자신과 비슷한 뜻을 가진 김종배, 허규정 등 대학생 수습위 일부 구성원, 시민군과 함께 도청에 진입해 계속해서 항쟁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결사 항전하기로 결의하고 '민주시민투쟁위원회'라는 새로운 도청항쟁지도부를 결성했다. 투쟁위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상원은 지도부 내에서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계엄군과 최후 항전을 하루 앞둔 26일 도청에서 시민군 및 항쟁 지도부의 방침을 밝히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회견에는 내외신 기자 20여 명이 참석했다. 상원은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한 뒤 "오늘의 우리는 패배할 것이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기자회견에 참석한 미국의 브래들리 마틴 (Bradley K. Martin) 기자는 후일 "나는 이 젊은이(윤상원)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상무충정 작전

외곽 봉쇄와 무장해제 압박에도 시민들이 무기를 내려놓지 않자 계엄 당국은 최종적 진압을 위해 '상무충정 작전'을 감행한다. 상무충정 작전은 공수부대 특공조가 광주 시내의 주요 건물에 은밀히 침투해 시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뒤따라온 보병부대와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 작전이었다.

5월 26일 새벽 5시. 계엄군이 시 외곽에서 탱크를 몰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습위원들은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저지하려고 '죽음의 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시내로 진입해 오려거든 차라리 우리를 먼저 깔아 죽이고 들어오라"라며 도로 위에 드러누웠다. 기세에 눌려 계엄군이 일단은 돌아갔다. 수습위는 마지막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미 상무충정 작전 추진을 결정한 계엄 당국은 협상을 거부했다.

그 무렵 항쟁 지도부도 시민군을 재편해 광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하는 등 최후 항전을 준비했다. 두려움 때문에 총을 버리고 개별적으로 이탈하는 사람이 생겨났지만, 상원은 "굳은 각오가 아니면 지금 상황을 헤쳐나가기가 어렵다. 굳은 각오와 결의가 없는 사람은 지금 나간다고 해도 말리지 않겠다"라며 붙잡지 않았다.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이 끝난 뒤 외신기자가 찍은 윤상원의 시신 ⓒ kbs

 
밤이 다가오자 계엄군의 출동을 알리는 시민의 제보 전화가 몇 차례 걸려왔다. 자정에 광주 시내의 모든 전화가 끊겼다. 결전을 앞둔 시민군은 무기를 받으려고 도청 앞뜰 무기고로 모였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전두환 살인집단에게 도청을 내준다면 우리는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 임낙평, <윤상원 열사의 삶과 투쟁>(월간말, 1989년 5월, 96-103쪽)

상원은 최후 연설을 한 뒤 무기를 지급하고 도청 2층 민원실에 자리를 잡았다. 27일 새벽 4시께 계엄군이 도청으로 진입해 오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약 한 시간 만에 광주 시내 주요 건물에서 시민군을 제압했다. 이날 17명이 사망하고 227명이 연행되면서 10일간의 광주 민중 항쟁은 막을 내렸다.

5월 광주 그 후

유가족 단체와 5·18 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광주에서 10일간의 항쟁으로 165명의 시민이 숨졌다. 행방불명자와 상이 후 사망추정자까지 합하면 600명이 넘는다. 사망자의 평균연령은 27.5세로 상원과 같은 20~30대 청년이 가장 많이 죽었다. 사망자 165명 중 129명의 사인이 총상이었다. 국민을 향한 군의 발포는 6.25 전쟁 휴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을 향하고 있는 총이 왜 남을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상황이 어렵다.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고 물도 바닥나고 있고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 우리 매일 반공 구호를 외치고 시작한다. 그렇게 몰고 가지 마라. 억울하다.
- 김철원, <33년 전 오늘 리포트 10- "죽음을 앞두고..">(광주MBC, 2013년 5월 26일)
 

계엄군에 맞서 도청을 사수하다가 사망한 윤상원과 들불야학 교사였던 박기순이 잠들어 있는 국립 5.18 민주묘지 ⓒ 김이삭

 
1980년 5월 26일 항쟁지도부의 기자회견에서 상원이 한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오랜 기간 폭도 또는 불순분자의 죽음으로 규정되었다. 1988년이 되어서야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청문회가 열리는 등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필요성이 거론되었다.

1990년에는 피해자를 위한 보상법이 제정됐으며, 1995년에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마침내 전두환 전 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을 법정에 세울 수 있게 됐다.

광주의 가려진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역사는 바로 섰을까. 고인이 된 상원의 의견을 듣고 싶다.



- 이혜원: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4학년 재학. 아픈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두렵고 서글픈 일이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 항상 진실과 정의를 먼저 생각하고 싶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노수빈: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 박노해, 광주 무장 봉기의 지도자 윤상원 평전, 『노동해방문학』, 1989년 5월
2. 임낙평, 윤상원열사의 삶과 투쟁, 『월간말』, 1989년 5월, 96-103쪽
3. 윤석진, 광주재조명 - 윤상원을 통해 본 광주항쟁, 『월간중앙』, 1989년 5월
4. 노영기, 총을 든 시민들, 시민군, 『역사비평』, 2014
5. 노영기,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와 희생, 『민주주의와 인권』15, 2015년 12월
6. 노영기, 5·18 항쟁의 배경과 참여세력, 『역사와현실』 89, 2013
7. 노영기, 상무충정작전(尙武忠正作戰)의 입안과 실행 ―1980년 5월 27일 최후의 진압작전을 중심으로―, 『사림』52, 2015년 4월
8. 김정한, 광주 학살의 내재성 - 쿠데타, 베트남전쟁, 내전, 『역사비평』, 2020
9. 인권선교 20년사, 아, 광주여! 오월이여!,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자료총서 제18권 383쪽, 1996년 8월
10. 고(故)이세종, 전주의 5.18희생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2018년 05월 16일
11. 이경남, [증언자료] 20년만의 고백, 『당대비평』1999,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07년 5월 15일
12. 안은정, [증언 자료] 의무전경으로 시위진압에 나서,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07년 5월 23일
13. [증언 자료] 말 못하는 아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07년 5월 29일

12. 정희상, “윤상원 열사가 죽어간 곳에서 동생은 발길을 돌렸다”, 『시사인』, 2019년 6월 14일
13. 광주광역시 5.18기념문화센터
https://www.gwangju.go.kr/518/contentsView.do?pageId=maycenter4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