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27 18:58최종 업데이트 21.01.27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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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일본대사에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대사를 발령했다고 보도하는 NHK ⓒ NHK

 
한일관계가 악화돼 있는 상태에서 일본이 주한일본대사를 교체했다. 지난 8일 스가 요시히데 내각은 이스라엘에서 근무 중인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대사의 임지를 한국으로 변경했다.

보도에 따르면, 2월 11일 시작하는 설 연휴 직전에 아이보시 대사가 부임하는 쪽으로 일정이 조율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이스라엘 출국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 남쪽 규슈섬 최남단인 가고시마현에서 1959년 태어난 아이보시는 도쿄대학 졸업 1년 전인 1982년 23세 나이로 외무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했다. 그 뒤 프랑스에서 1등 서기관과 외무성 국제협력 파트에서 근무한 그는 상당 기간을 아시아 관련 부서에서 보냈다. 외무성 중동아프리카국과 내각관방 이라크 부흥추진실에서 일했고, 한국·베트남·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이스라엘에서 서기관·참사관·공사·대사 등으로 일했다.

한국 부임 이전에는 아세안과 이스라엘에서 대사로 근무했다. 2014년에 아세안에 파견됐고, 2016년부터 2년간 외무성에 있다가 2018년 이스라엘에 파견됐다.

한국과의 인연은 4년 이상이다. 40세 때인 1999년 주한대사관 1등 서기관이 되고 이듬해 참사관이 됐다가 2001년 외무성 본성으로 복귀했다. 47세 때인 2006년에 주한공사가 되어 돌아온 뒤 2년간 근무했다.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된 김대중 정권 이후로 한국에 근무한 그는 한류에 대한 애정을 강렬히 표현해왔다. 주한공사 시절에는 대사관 홈페이지에 '이윽고 슬픈 한국어(やがて哀しき韓国語)'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1994년 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이윽고 슬픈 외국어>의 제목을 응용한 글이었다.

'이윽고 슬픈 한국어'는 그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운 과정을 소개한 글이다. 이에 따르면 그가 한국어를 처음 배운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 발령을 받고 프랑스 현지에서 한국어 입문서를 샀다고 한다.

프랑스어로 된 한국어 학습서를 공부했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별로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그 책은 버렸다고 한다. 한국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울 생활을 하게 된 그는 배우자의 한국어가 능숙해지는 것에 자극을 받아 개인 교습과 노래 연습을 통해 한국어 공부에 매진했다.

특히 노래 연습을 많이 했다. "한국어 학습을 포기하지 않고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노래방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카라오케(カラオケ) 대신 한국어 발음 그대로 노래방(ノレバン)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게 된 시점에 외무성으로 불려간 그는 한국어를 잊지 않으려고 노래도 열심히 듣고 한류도 즐기러 찾아다녔다. 출장을 마친 뒤 신승훈의 일본 콘서트장을 찾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을 떠난 뒤에도 열심히 한국어와 문화를 공부하던 상태에서 주한공사로 되돌아와 위의 글을 남겼다.

그가 '이윽고 슬픈 한국어'란 제목을 쓴 것은, '이윽고 슬픈 한국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이 말에서 분투하는 자세보다는 즐기는 자세로 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한국을 배우려고 이 정도로 '분투' 아니 '즐겼던' 일본대사가 이번에 부임한다.

긴박한 시기에 한국에 부임했던 역대 외교관들

이해관계가 첨예한 나라에 대사를 파견할 때는 상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인들의 격렬한 반발 속에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 등이 체결된 이듬해라서 지금만큼이나 한일관계가 조심스러웠던 1966년에 기무라 시로시치(木村四郎七) 대사가 부임했을 때도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기무라 대사는 한국 전문가가 아니라 중국(타이완) 전문가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타이완(중화민국·자유중국)이 국제연합에서 유엔을 대표하던 시절, 그곳에서 참사관을 지낸 데 이어 62년부터 대사로 있었다.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와 자유민주당(자민당) 지한파 인사들이 중국 전문가를 주한대사로 추천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민들의 반발을 꺾고 국교 수립을 성사시킨 당시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에서 얻고자 한 것은 미국의 동맹국들인 한국·일본·타이완을 엮는 협력체제가 구축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 전문가를 한국대사로 보냈다.

1966년 1월 4일 자 <동아일보> 기사 '일, 주한대사에 목촌(木村, 기무라) 씨 결정'은 "장개석(장제스) 자유중국 총통과도 친근하며 안(岸, 기시) 전 수상이 구상하는 한·일·중 3개국 협력노선에 적합한 인사로 평가되고 있다"라며 기무라 대사의 파견 배경을 설명했다.

만약 이 시기의 한·일 양국 정부가 한국민들의 역량을 존중하고 무서워했다면 기무라보다는 아이보시 같은 인물을 물색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양국 정부는 한국민들의 에너지를 억압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을 달랠 만한 인물보다는 일본과 미국의 정책 수행에 적합한 인물을 더 선호했다. 

5·18 광주항쟁 이후로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민주화운동이 거세지던 1986년에 미국이 중앙정보국(CIA) 중국지부장을 지낸 제임스 릴리를 주한대사로 파견한 데도 이유가 있었다. 회고록인 <중국통>에 따르면 그가 선정된 것은 '한국 민주주의'보다는 '안보(정확히 말하면 냉전 유지)'를 우선시하는 미국의 전략 때문이었다. 한국 국민들의 민주주의 욕구를 억제하고 전두환 정권을 보호하려면 정치공작에 능한 CIA 출신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이임하는 제임스 릴리 주한 미 대사(오른쪽)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하고 있다. 1988.12.30 ⓒ 연합뉴스

 
하지만 국무부와 릴리 본인의 애초 구상과 달리 1987년 6월항쟁 국면에서 릴리는 전두환 정권의 군대 개입을 억제하며 전 정권이 현실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전혀 엉뚱한 역할'을 수행했다. 애초에 미국이 의도했던 것과 달리 한국 민주화에 기여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됐던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한국 독점을 추구하다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러시아 노선 때문에 곤란을 겪던 상황에서도 주조선 일본공사가 교체됐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로부터 약 2개월 전인 8월 17일, 강경파인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가 새로운 주조선공사로 선택됐다.

미우라 고로는 학자 출신의 전임자인 이노우에 가오루와 대조됐다. 조선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외교에 대해서도 문외한이었다. 만약 10월 8일 을미사변 당시에 이노우에가 주조선공사였다면, 일본군과 로닌(낭인, 실직 무사)들이 남의 나라에서 그 나라의 중전을 함부로 죽이는 일이 자연스레 벌어지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긴박한 시기에 한국에 부임한 역대 외교관들이 각각의 시기에 알맞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어와 한류를 사랑하는 아이보시 대사의 부임에도 그런 고려가 반영됐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보시의 임무

일본에 대한 한국민들의 감정이 좋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 아이보시 같은 대사가 파견되면 한국에서 일본의 이미지가 조금은 더 개선될 것이다. 이 외에도 한국어와 한류를 사랑하는 아이보시의 특징이 긴요하게 활용될 분야가 더 있다. 그가 이번에 오는 것은 이 점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한국을 포함해 최근 7년간 아이보시가 근무한 임지 3곳의 공통점이 있다. 미국의 세계정책을 지원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아세안에 파견된 2014년은 동아시아 해역에서 중국 대 동남아·미국의 대립이 심하던 시기였다. 이스라엘에 파견된 2018년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이스라엘 편향 정책으로 중동에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던 때였다.

두 시기에 일본 정부는 미국의 전략에 편승하면서 해당 지역에 영향력을 증대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현지 문화를 존중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능력을 갖춘 아이보시 대사가 파견됐다.

그가 한국에 부임하는 2021년은 바이든 행정부가 한·미·일 삼각협력체제를 재정비해 대중국·대북 압박 시스템을 손봐야 할 시점이다. 일본 역시 이런 전략에 편승해 한일관계를 예전으로 복원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 같은 사정들은 스가 내각이 아이보시를 임명한 동기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은 아이보시를 통해 한·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닌 일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일관계를 복원하는 데에 그의 공감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스가 내각의 희망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을 잘 아는 대사가 부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아이보시는 아세안 및 이스라엘과 달리 한국에서는 훨씬 힘든 도전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아세안이나 이스라엘과 다르게 한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배상이 더는 필요 없는 한일관계의 복원을 바라는 스가 내각의 바람이 한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작다. 아세안과 이스라엘에서 했던 것 이상의 각고의 노력을 아이보시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아이보시 대사가 일본판 제임스 릴리가 된다면 상황은 당연히 달라질 수 있다. 한국에 대한 높은 이해력을 바탕으로 현지 상황을 스가 내각에 정확히 전달해 본국 정부의 현실 인식을 촉구하고 자기 나라를 옳은 방향으로 유도한다면 아이보시 역시 제임스 릴리처럼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주한 외교관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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