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0 16:56최종 업데이트 21.02.20 16:56
  • 본문듣기
 

2013년 9월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북한 정권수립 65주년 기념일 행사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왼쪽),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왼쪽 둘째)이 함께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일성의 사위이자 김정일의 매제이며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2013년 12월 12일 김정은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발표된 그는 최근 50년간의 북한 역사에서 보기 드문 능력자로 평가받았다.

조선민주당 지도자 조만식이 신탁통치 반대 혐의로 연금되면서 김일성의 입지가 강화된 1946년 1월 5일로부터 17일 뒤에 장성택은 출생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천재적 능력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휘말리던 시기이자 김일성의 대남·대미 공세가 두드러진 시기인 동시에 장성택이 김일성대학에 재학할 때인 1960년대 후반에 조선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활동 등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오랫동안 사로청으로 남한에 알려진 이 조직은 1996년 1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개칭되고 2016년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으로 바뀌었다. 조선노동당 제8차 당대회 직후인 이번 2월 3일에 당대회 결정의 실천 방향을 논의하는 동시에 흐트러진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고자 제9기 청년동맹 제12차 전원회의를 개최한 이 조직은 오는 4월 제10차 대회를 열어 명칭 개정 등을 논의할 가능성이 있다.

이 조직이 장성택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는 점은 1990년대 초반의 남한 언론에서도 보도됐다. 김정일 집권 2년 전에 발간된 1992년 2월 21일 자 <경향신문> 기사 '김정일의 사람들 (3) 장성택'은 "사로청 시절 천재성이 돋보여 주목받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사로청 활동을 했던 수많은 인재 중에서 유독 그가 부각된 것은 그 자신의 능력과 열정 때문인 동시에 그를 후원하는 인간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당숙 장정환은 조선인민군 소장이자 군사정전위원회 북측 대표로서 1960년대 초반 남한 언론에도 자주 소개됐다.

1964년 9월 21일 박종국 소장에게 대표직을 넘겨준 장정환은, 1961년 6월 25일 자 <경향신문> 기사 '북괴, 팔백오십칠차(857회) 휴전협정 위반'에 따르면 한국전쟁 11주년 하루 전날인 그해 6월 24일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을 요청한 뒤 "남한은 침략적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도발적 발언을 한 일로 남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2002년에 인민군 차수가 된 큰형 장성우(1933년생)는 장성택이 김일성 사위가 된 이듬해인 1973년 당시, 노동당 조직지도부 과장 겸 현역 장교였다. 인민군 중장으로 전역한 작은형 장성길은 1981년에 제2군단 부군단장이었다.

집안배경 + 뛰어난 능력과 열정 + 김경희의 구애

사회 지도층을 이루는 집안 배경에 더해 김일성대학 재학 중에 생긴 인연이 장성택 인생에 분기점이 됐다. 그의 열정과 능력에 이끌린 김경희의 열렬한 구애가 그 계기가 됐다. <민족21> 2013년 12월호 기사 '장성택은 누구인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장성택이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부 재학 시절 같은 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정일 위원장의 누이동생 김경희는 당시 학급 반장이며 사로청 위원장, 학생위원장, 노동당세포위원장이던 장성택의 다방면적인 만능재주와 인간성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김경희가 먼저 적극적으로 접근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장성택은 학업과 정치뿐 아니라 음악과 체육에서도 두드러졌다. 대학 축구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일성선집>에 통달할 정도로 독서량이 많았고, 북한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삼국지>나 <임꺽정> 같은 책도 읽었다고 한다.

남·북한에서 유신체제 및 유일체제가 동시에 등장한 1972년 26세 나이로 동갑내기 김경희와 결혼한 장성택은 김일성 가문의 후광을 입고 자기 능력을 국내외적으로 보여줬다. 일례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북한이 유치했다고 알려진 1989년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도 그의 총지휘로 이뤄진 작품이다. 이 축전은 남한 대학생 임수경의 참석으로 휴전선 이남에서 일대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기도 하다.

1994년 7월 11일 자 <조선일보> 기사 '김정일의 북한 <2>'는 "89년 평양축전을 총지휘하기도 했다"라며 "김정일과 가장 가까운 인척이라는 최고의 배경과 함께 뛰어난 개인적 능력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라는 말로 장성택의 평양축전 지휘를 평가한다.

<민족21>에 따르면, 장성택은 북한 공직자의 핵심 평가기준인 산업생산에서도 발군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결혼 이듬해인 1973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평안남도 광산에서 석탄 생산고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광산 막장에 들어가 노동자들과 함께 굴착기를 잡고 작업을 독려했을 정도로 열정이 대단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생산고가 늘어났고, 그는 훈장을 받았다.

그는 북한 지도부가 직접 나서기 힘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컨대, 비상시에 주민 일부를 강제 이주시키는 일도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1976년 10월 31일 자 <조선일보> 7면에 보도된 귀순 간첩 김용규의 기자회견에서도 소개됐듯이, 그해 8월 18일 판문점 도끼 사건(북·미 양군 충돌) 뒤에 북한은 전시사태를 선포하는 한편 전쟁에 대비해 평양시민 및 전방 주민 일부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노약자나 성분 불량 계층을 평양 밖과 후방으로 강제로 옮기는 이 작업은 당시 30세의 장성택이 주도했다.

그런데 이때 나타난 장성택의 업무 스타일은 너무 과격했다. '무지막지'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였다. 위의 <민족21> 기사는 전 노동당 간부 박병엽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설명한다.
 
장성택은 무지하게 작업을 내밀었다. 8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평양(에서)만 약 20만 명의 주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됐다. 황해도, 강원도 전연(전방)지대 지역의 성분 불량자, 허약자들로 8천 세대가량을 솎아냈다. 보위부원들이 소개장(일종의 영장)을 전달하며 1시까지 짐을 싸라고 지시한 후 옆집도 모르게 감쪽같이 진행됐다.
 
대상자 집에 들이닥쳐 '짐을 싸서 오늘 안에 떠나라'고 요구하는 일들이 있었다. 소개 작업이 빨리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장성택의 업무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일 때문에 훈장을 받기는 했지만, 그는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소개 작업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항일투사 유족들이 평양 밖으로 쫓겨가는 일도 있었다. 주석 김일성까지도 황당한 일을 겪었을 정도다.

<민족21>에 따르면, 내각 회의 중 김일성이 월북자 출신의 김일성대 교수를 찾았는데, 그 교수는 즉각 김일성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월북자라서 중요한 순간에는 믿을 수 없다며 장성택이 강제 이주시킨 뒤였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굉장히 화를 냈음은 물론이다. 이 때문에 평양에서 소개된 20만 명 중 6~7만 정도가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업무 스타일의 문제점을 드러내면서도 장성택은 굵직한 사업들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았다.

장성택과 김일성

북한처럼 권력이 한 가문에 집중되는 곳에서는 지도자의 친자녀뿐 아니라 며느리나 사위에게도 권력이 모여들 수 있다. 사위인데다가 국정 능력까지 인정받은 장성택은 김일성 가문 사람들에게 가족 구성원인 동시에 어느 정도는 경쟁자였다.

'어느 정도는 경쟁자'라는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를 대하는 가족 성원들의 태도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상당 부분 투영됐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를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나타났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세 사람도 장성택에 대한 태도에서 명료한 차이를 드러냈다.

과거의 국내 언론보도 중에는 '김일성은 장성택을 견제한 반면 김정일은 절대 신임했다'라는 기사가 있었다. 장성택이 김일성대학 재학 중 원산경제대학으로 강제로 전학하게 된 것이 김일성의 뜻이었다는 점, 김정일이 평소 장성택에게 "믿고 의지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말한 점 등에 근거한 보도다.

하지만, 김경희와 교제하다가 쫓겨난 장성택을 원산에 가서 만나본 뒤 능력을 극찬하면서 길을 열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다. 그런데도 강제 전학이 김일성의 이름을 앞세워 추진된 것은 김정일이 아버지를 설득해 아버지의 이름으로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민족21>은 설명한다.

위의 기사는 "(김경희가 스캔들에 휩쓸릴 것을 우려한)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 수상에게 두 사람의 연애 사실을 알리고 이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장성택을 원산경제대학으로 강제 전학시켜버렸다"라고 말한다. 김일성의 허락을 받은 일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김정일에 의해 이뤄진 일이었다는 것이다.

장성택과 김정일

그랬던 김정일이 장성택에게 툭하면 "믿고 의지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라고 말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아들 김정일 말만 믿고 장성택을 쫓아냈다가 딸의 간절한 요청으로 직접 만나본 김일성은 "대단히 똑똑하고 야무지며 아주 총명하면서 인간미가 있고 전도가 유망한 놈이다"라며 "우리 경희가 간부 사업까지 아주 잘했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위 <민족21> 기사). 김정일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의 절대 신임을 받게 된 장성택과 공존하는 길은 그에게 우정을 표하는 것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김정일의 후계자 지위가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직전이라 북한 내에서 김정일의 지위가 높아지고 있던 1979년에 장성택이 김정일의 견제를 받고 좌천된 사례, 김정일 정권이 안정 국면에 접어든 뒤인 2004년에 장성택이 또다시 김정일의 견제를 받고 좌천된 사례가 갖는 함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일 권력이 안정될 때마다 장성택이 된서리를 맞았다는 것은 "믿고 의지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라는 말의 의미를 음미하게 해준다. 이는 김정일이 어쩔 수 없이 매제와 공존하면서 불편한 감정을 숨기거나 억눌렀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장성택에게 김일성은 집안 어른이었다. 장성택이 부각될 당시에 김일성과 장성택의 정치적 격차는 하늘과 땅이었다. 이런 구도에서 김일성은 "전도가 유망한 놈"의 능력을 극찬하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김정일은 장성택의 손윗사람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형제 반열이었다. 노동당 내의 입지는 10여 년 정도 빠른 편이었다. 김정일이 노동당 부부장이 된 것은 1970년 9월이고, 장성택이 비슷한 위치에 도달한 것은 1982년 10월이다. 12년 차이는 결코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역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크지도 않다.

물론 장성택이 김정일을 추월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지만, 장성택이 가문의 일원이 된 데다가 굵직굵직한 성과들을 많이 냈기 때문에, 김정일로서는 그저 매제로만 대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합당한 명분도 없이 김일성대 학생을 강제 전학시킨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김정일에게는 그가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가능성이 있다. 동생 김경희의 스캔들이 정말로 우려됐다면 남의 집 아들을 지방으로 쫓아내기보다는 자기 동생을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게 좀 더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다.

만약 김일성과 장성택 사이의 격차가 김정일과 장성택 사이에도 있었다면, 경쟁 관계로 비칠 만한 양상은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점이 김정일이 그를 경쟁자처럼 대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12일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을 열어 장성택에게 '국가전복음모의 극악한 범죄'로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바로 집행했다. 양 손을 포승줄에 묶인 장성택이 국가안전보위부원들에게 잡힌 채 법정에 서 있다. 2013.12.12 ⓒ 연합뉴스-조선중앙통신

 
장성택과 김정은

한편,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과 전혀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다. 두 선대와 달리 김정은은 장성택의 아랫사람이다. 또 김정은 집권 이전에 장성택은 이미 지도자급 반열에 있었다. 2010년 6월 장성택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바로 아래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됐다.

매우 유능한 아랫사람을 포용하기도 쉽지 않지만, 매우 유능한 윗사람을 포용하기 역시 쉽지 않다. 윗사람이 순순히 대해주지 않을 경우,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더 어려워진다. 온 나라가 다 알 정도의 천재적 능력자인 장성택과의 관계에서 김정은은 김일성·김정일보다 부담스러운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보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더 무섭게 대한 데는 이런 요인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권력이 한 가문 내에서 승계되는 경우에는, 집안 내의 지위도 정치 권력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런 구도는 김정은이 장성택을 가혹하게 대하는 요인이 되기가 쉬웠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해 김정은이 훨씬 혹독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장성택이 이미 국가지도자 반열에 들어선 데다가, 집안 내에서 어른이었으며, 거기다가 열정과 능력까지 넘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