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8 20:37최종 업데이트 21.02.28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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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 1963.9.7 ⓒ 연합뉴스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물러나고 1개월 보름 뒤인 1963년 2월 21일, 제3대 부장 김재춘이 취임했다. 김종필의 뒤를 이은 김용순 제2대 부장이 육사 5기 및 8기의 신임을 받지 못해 두 달도 채우지 못하고 하차한 데 따른 결과였다.

5·16 쿠데타 핵심 세력인 5기·8기와 달리 김용순은 3기였다. 김종필은 8기였고 김재춘은 5기였다. 김용순이 제 역할을 못하고 남산 중앙정보부(중정)를 떠났기 때문에 실질적인 김종필 후임은 김재춘이었다.


그런 김재춘이 취임 일성으로 천명한 것이 정치사찰 및 정치활동 근절이었다. 김종필이 정보부장 본연의 임무를 벗어나 '민주공화당 사전 조직(비밀 창당)'을 벌인 일로 인해 정치적 비판을 받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김재춘은 그런 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임 중앙정보부장의 천명

그해 2월 23일 자 <조선일보> 기사 '중앙정보부 전면 개편'에 따르면, 그는 22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정보부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월권행위를 자행하고 급기야 정치·경제 문제를 비롯한 모든 일에 개입하기에 이르러 오히려 국민의 원성과 지탄을 받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체의 정치사찰 등을 하지 않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 '중앙정보부의 체질 개혁'에 따르면, "지금까지 국민 지탄의 대상이 되던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여 재정비함은 물론 본연의 임무를 이탈하여 정치에 개입하거나 이권청탁 등으로 군·관·민을 괴롭히는 처사는 일절 용납치 않을 것이며, 금후 이러한 행위를 범한 자는 법에 의해 엄벌할 방침임을 국민 앞에 천명한다"라고도 했다.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날은 5·16 쿠데타 1개월 뒤인 1961년 6월 10일이다. 김재춘이 '중정이 국민적 원성과 지탄을 받게 됐다'라고 말한 시점은 그로부터 1년 8개월 뒤다. '고작'이라는 수식어를 달아도 될 만한 기간이다. 설립된 지 '고작' 1년 8개월 이내에 관청이 그런 원성과 지탄을 받게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 기간에 중정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1963년 7월 13일 취임한 김형욱 제4대 부장도 김재춘과 똑같은 말을 했다. 김형욱도 중정을 약화시키고 정치사찰을 근절하겠노라고 공언했다. 그해 8월 29일 자 <경향신문> 1면에 따르면, 28일 김형욱은 "중앙정보부가 선거는 물론 정치에 일절 개입치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김형욱의 말이나 김재춘이 말이나 다 똑같이 들릴 수도 있다. 별반 차이 없는 의례적 수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한테는 그렇지 않았다.

제3대 부장의 말에는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는 "김재춘 신임 부장의 이야기는 이제까지 일종의 금기의 대상처럼 되어왔던 문제를 스스로 대담하게 노출시켜 자가비판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라고 한 뒤 결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헤어스타일에서 돼지울(돼지우리) 만드는 데까지 간여한다'는 외지(外誌)의 평을 받은 중앙정보부의 병폐를 신임 부장은 이렇게 진단하고, 정치사찰과 '국민에게 공포감을 주고 국민의 비난을 받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을 취임 제일성으로 성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 개편되는 중앙정보부의 각오가 얼마나 비장한 것인가의 정도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언론이 김재춘의 약속을 공언(空言)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공언(公言)으로 귀담아들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고작 1년 8개월 만에 중정을 타락시킨 초대 부장의 흔적을 그가 과감히 지우려 했기 때문이다. 취임 기자회견이 있었던 그날 그는 김종필계 간부들을 전면 쇄신했다. 위의 <조선일보> 기사는 "서연순 본부 차장 이하 국장 전원 및 각 지부장급 31명의 간부를 대폭 경질했다"라고 보도했다.

정보부를 동원해 창당 작업을 벌이고 이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위해 이른바 '4대 의혹 사건'까지 일으킨 군사정권 2인자의 인적 기반 중 상당 부분을 김재춘은 과감히 도려냈다. 그랬기 때문에 언론이 기대감을 걸어봤던 것이다.

정보부 혁신 외친 속내

사실, 그가 정보부 혁신을 외친 근원적 동기는 5기와 8기의 경쟁 관계에 있었다. 그가 5·16 쿠데타 때 '병력 동원'을 책임진 육사 5기의 대표주자였다면, 김종필은 '기획'을 책임진 육사 8기의 대표주자였다. 만약 5·16이 없었다면 김종필을 '한 살 많은 세 기수 아래 후배'로 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5·16으로 처지가 바뀌었기 때문에 김재춘은 그를 후배가 아닌 경쟁자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박태준과 같은 해인 1927년에 태어난 김재춘은 정부 수립 4개월 전인 1948년 4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고 1955년 12월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그 달 28일 제1관구 참모장이 된 그는 그 뒤 연대장을 거쳐 1960년에 운명적인 제6관구 참모장이 된다.

지금의 서울 영등포구 문래역과 문래근린공원에 있는 제6관구 사령부는 전국 군부대의 통신을 장악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쿠데타 전날인 1961년 5월 15일 밤에 5기부터 8기까지의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제6관구 참모장 김재춘이 쿠데타군의 핵심으로 발돋움할 조건이 형성됐던 것이다. 

쿠데타 뒤에 방첩부대장이 되고 군·경·검 중앙합동수사본부장이 된 그는 육사 5기의 선봉에 서서 김종필을 견제하다가, 김종필이 공화당 창당으로 원성을 사게 된 직후에 제3대 부장으로 취임했다. 그 상태에서 정치사찰 근절 같은 개혁안을 외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김종필은 군부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고 '즉각 원대복귀'를 주장하는 '반 김종필 진영'이 김재춘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파악했다. 김종필은 단순히 8기 대 5기의 관점에서만 김재춘과의 관계를 해석한 게 아니라 '민정 참여냐 원대복귀냐'의 구도에서 해석했다. <김종필 증언록> 제1권에서 김종필은 "박병권 국방부 장관과 김종오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가 (원대복귀론의) 주동이 됐다"라며 이렇게 회고했다.
 
이들은 나에 대해 터무니없는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일개 중령이 국정을 우지좌지(右之左之)한다. 이 자식을 내쫓아야 한다'라며 매사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것도 내게 전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각군 참모총장이 모여 쑥덕공론을 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김재춘(육사 5기), 박태준(6기), 유병헌·유양수(7기 특별) 등 최고위원들도 민정 불참과 원대복귀를 주장하고 나섰다.
 
김종필은 반대파의 선봉에 선 김재춘을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들의 영향을 받는 인물인 것처럼 묘사했다. 김종필이 김재춘과의 구도를 어떻게 생각하려 애썼는지 알 수 있다. 김종필로서는 자신이 주인공의 상대역으로 이 기사에 거론되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 김재춘은 김종필과의 경쟁에 노골적으로 뛰어들었다. 정보부장 취임 다음날에 중정 상층부의 김종필 라인을 내보낸 그는 공화당에 맞설 '자유민주당(자민당) 창당' 카드를 꺼내 들었다. 공화당 대신 자민당으로 갈아타시라고 박정희에게 권유했다. 정치개입을 근절하겠다고 약속했던 그가 이런 일까지 추진했던 것이다. 국민보다 집권자의 의중을 먼저 헤아렸던 정보부의 폐해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박정희는 김재춘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의 <KCIA 남산의 부장들>은 "63년 4월 8일 박 의장은 '자유민주세력이 뭉친 범국민적 정당(범당)이 필요하다'는 구상을 밝혔다"라면서 박정희가 김재춘의 '범당'에 기우는 듯이 보였다고 말한다.
 
박 의장은 범당을 구체화시킬 정책소위원회라는 데에도 강경파(JP계) 김홍길 라인의 김형욱·홍종철·길재호를, 온건파(김재춘계) 유유박 라인의 유양수를 소위원장으로 하고 유병현·박태준을 넣었다. 겉으로 보기에 박 의장은 분명히 김재춘 정보부의 지원하에 새 정당 자민당을 만들 결심을 굳힌 듯했다.
 
자민당은 그해 9월 3일 창당됐지만, 박정희의 당이 되지는 못했다. 김재춘의 이탈로 동요를 보이다가 1964년 11월 제1야당인 민중당에 흡수됐다. 이렇게 공화당에 맞설 자민당까지 추진하면서 김종필과의 경쟁에 승부를 걸었던 김재춘은 어이없는 일로 남산에서 하산하게 된다. 전두환·노태우가 포진한 육사 11기의 친위 쿠데타 미수가 뜻밖에도 그에게 화근이 됐던 것이다.

김재춘의 하산

박정희는 육사 8기와 5기를 상호 경쟁시키는 한편, 더 강한 8기를 11기를 통해 이중적으로 견제했다. 이 때문에 8기에게 경쟁심을 갖게 된 11기는 8기들을 물리적으로 제압하고 박정희에게 충성을 증명하는 방안을 강구하게 됐다.

1963년 7월 6일을 디데이로 잡은 11기들은 5기 대표주자인 김재춘에게 도움을 청했다. 김재춘은 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적극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쿠데타 계획이 거사 직전에 발각된 뒤에도 11기들을 두둔했다. 이것이 그가 7월 13일 남산에서 하산하는 계기가 됐다.

김재춘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의 적폐를 청산하겠다며 정치사찰 및 정치활동의 근절을 공언했다. 하지만 김종필과의 경쟁심에 사로잡혀 본분을 망각하고 자민당 창당을 추진했다. 그러다가 김종필을 겨냥했던 불발탄에 맞아 정보부장직을 떠나는 어이없는 일을 당하게 됐다. 만약 그가 경쟁심을 자제했다면 친위 쿠데타를 사전에 제압했을지도 모른다. 라이벌 구도에 과하게 집착한 것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남산에서 내려온 뒤 자민당 최고위원을 잠시 지낸 김재춘은 초빙 교수와 연구소장 등을 지내다가 민중당 국회의원이 됐다. 그 후 공화당에 들어갔다가 학계로 재차 돌아갔다. 1987년 대선 때 김영삼을 지지했던 그는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 뒤 옛 라이벌을 돕는 일에 나섰다. 김종필이 만든 당에 두 번이나 들어갔던 것이다. 2014년 1월 2일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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