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21 19:55최종 업데이트 21.03.2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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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어떤 묘수로도 한순간에 따라잡을 수 없는 불변의 명제입니다. 존중받아 마땅한,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꿈꾸고 도전하는 자의 손에 의해 새롭게 쓰여 왔습니다.

감탄사가 절로 날 정도의 정밀한 세공 기술이 집약된 펜도 물론 근사하지만, 마치 화공(畫工)이 손끝으로 툭툭 무심히 친 듯한 난(蘭)을 닮은 펜의 자태도 그에 못잖습니다.


대각으로 선을 치켜올리다 끄트머리에 이르러 은근히 손끝을 감는 일련의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만개한 한 촉의 난이 눈앞에서 간지럼을 태웁니다. 화려한 문양이나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오직 직선과 곡선만으로 빚어낸 '코스모스(Kosmos)'는 오래 봐도 지겹지 않습니다. 볼수록 정겹습니다.

2013년부터 제작된 '스틸폼'
 

'스틸폼(Stilform)'의 '코스모스(Kosmos)' 만년필, 나이트 스카이 F촉 ⓒ 김덕래

 
독일 함부르크에 터를 두고 있는 '스틸폼(Stilform)'은 2013년 '크리스토프 보흐러(Christoph Bohrer)'와 '마틴 바그너(Martin Wagner)'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가진 제조사가 열 손가락을 한참 넘어서는 만년필계에서, 아직 10년이 채 못 되는 신생 업체지만, 펜을 통해 디자인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틸폼은 심플한 외형을 완성하기 위해 만년필 그립섹션과 배럴 사이에 있기 마련인 나사산을 생략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마그네틱을 심었습니다. 캡을 배럴 가까이 가져다 대기만 해도 자석의 힘으로 알아서 달라붙습니다. 기존의 만년필들과 차별화되는 잠금 방식을 적용해 단순미를 극대화했습니다.

코스모스의 마그네틱 메커니즘이 혁신적인 이유는, 그저 잡아당기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캡과 배럴이 항상 정확한 위치에 맞춰 결합한다는 데 있습니다. 면과 곡선부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히 원래 위치로 되돌아갑니다. 이탈리아 브랜드 비스콘티의 '반 고흐(Van Gogh)' 라인도 마그네틱 잠금 방식을 채용했지만, 코스모스와는 사뭇 다른 구조입니다.

반 고흐는 방향성 없이 그저 캡과 배럴이 달라붙을 따름이지만, 코스모스는 어느 위치에서 손을 떼던 서로가 정확히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비스콘티호(號)가 닻을 내리고 정박한 사이, 스틸폼은 좀 더 먼바다를 향해 노 젓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기실 코스모스 만년필에 적용된 메커니즘이 최고의 잠금 방식이랄 순 없습니다. 하지만 만년필이란 도구는 140년 가까운 세월을 거치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기술적으로 완숙단계에 올라선 지 이미 오래입니다.

1898년, 만년필 자체에 잉크를 충전하는 최초의 셀프 필링 방식인 '크레센트 필러(Crescent Filler)'를 콘클린이 만들어내며 충전 방식에 불이 붙었습니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 쉐퍼의 '레버 필러(Lever Filler)'와 파카의 '버튼 필러(button Filler)'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됩니다.

이후 파카의 '배큐메틱 필러(Vacumatic Filler)'와 쉐퍼의 '백-필(Vac-Fill)'이 또 한차례 격돌했지만,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몇몇 예외적인 모델도 있지만, 현재 생산되는 대부분의 만년필이 잉크를 충전하는 방식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위 - '크레센트 필러(Crescent Filler)'가 적용된 비스콘티 문라이트 스노우스톰 B촉 / 아래 - '레버 필러(Lever Filler)'의 쉐퍼 플랫탑 초기형 F촉 ⓒ 김덕래

 
대표적으로 몽블랑 '마이스터스튁(Meisterstück)' 146, 149나 펠리칸 M시리즈에 적용된 '피스톤 필러(Piston Filler)' 방식과, 그 밖의 다른 만년필에 적용되는 '카트리지(Cartridge)' & '컨버터(Converter)' 방식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몸통 자체에 잉크를 채우는 방식이고, 후자는 일회용 건전지처럼 잉크가 들어있는 카트리지를 꽂아 다 쓴 후 버리거나, 속이 빈 컨버터에 잉크를 주입해 쓴 다음 재충전해 사용하는 방식 중 택일하는 개념입니다. 내가 선물 받은 만년필에 컨버터가 꽂혀 있다면 무조건 카트리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수납성을 극대화할 목적으로 크기를 줄인 만년필 중엔 카트리지 전용모델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충전 방식은 각자의 장단점이 있어 어떤 게 더 우수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맛과 멋이라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좌 - '피스톤 필러(Piston Filler)' 방식의 펠리칸 M805 데몬 F촉 / 우 - '컨버터(Converter)'가 장착된 몬테그라파 헤밍웨이 피셔맨 M촉 ⓒ 김덕래


또 만년필 뚜껑에 해당하는 '캡(Cap)'과 몸통이랄 수 있는 '배럴(Barrel)'을 체결하는 잠금 방식도 크게 보면 두 가지 형태입니다. 마를렌의 '아델(Aderl)'처럼 나사산을 따라 돌려 잠그는 '스크루 캡(Screw Cap)' 타입과, 파카 75처럼 밀어 체결하는 '슬립온 캡(Slip-on Cap)' 타입으로 나뉩니다.
 

좌 - '스크루 캡(Screw Cap)' 타입의 마를렌 아델 M촉 / 우 - '슬립온 캡(Slip-on Cap)' 타입의 파카75 F촉 ⓒ 김덕래


비스콘티가 자사 모델들에 '마그네틱 클로저 시스템(Magnetic Closer System)'이나, '훅 세이프 락 시스템(Hook Safe Lock System)'을 적용했지만 보편적인 형태는 아닙니다.

만년필 업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인다는 것

그런데 스틸폼이 코스모스에 적용한 잠금 방식은 비스콘티의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후발 주자가 선발 주자를 앞지르기 위해선 보다 빨리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따라잡지 못하더라도 땀 흘리며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지켜보는 사람들이 다음 경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전에 없던 루트를 개척하며 등반했다면, 그 시도는 존중돼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그 뒤를 이어 제2의, 제3의 스틸폼 같은 회사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값나가는 재료에 온갖 기술을 녹여 넣어 화려하게 뽑아낸 고가 펜도, 써지는 그 자체에만 집중한 입문형 펜도 글씨를 쓰는 그 자체는 동일합니다. 새롭지 않으면 눈에 띄기 쉽지 않고, 무난하면 잊히기 쉽습니다. 이미 기술력이 상향 평준화된 만년필 제조사들 사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인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대로 진지해 감동을 주거나, 다시 보게 만드는 참신함이 있어야 합니다. 뻔하지 않고, '펀(Fun)'해야 합니다.

코스모스 만년필 외관 디자인의 핵심은, 부드러운 곡선과 반듯한 면의 어우러짐에 있습니다. 둥근 곡면은 손에 쥐었을 때 그립감을 끌어올리고, 자른 듯 평평하고 예리한 면은 펜이 책상 위에서 구르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막아줍니다.

외형을 보면 'Simple is the best~!(단순한 게 최고다)'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클립이 없어 마치 미끈한 소형 드라이버 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걸리는 부분이 없으니 주머니에 넣어도 좋고, 쉽게 긁히지 않는 금속 소재라 어떻게 보관해도 쉽게 훼손되지 않습니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가볍고, 디자인은 심플하며, 메커니즘은 섬세합니다. 두루 조화롭습니다.

아무리 디자인적으로 우수해도 만년필은 눈으로 보며 만족을 느끼는데 그치는 장식물이 아니라, 실제 잉크를 채워 종이에 써야 제 역할을 다하는 필기도구입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선지 펜 내부에서 부속과 부속이 서로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정확히 고정되어야 할 펜촉이 쓸 때마다 빙글빙글 돌아가고, 연신 종이를 긁으면 제대로 쓸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분해된 상태로 도착한 펜은, 역순으로 하나하나 조립하면 됩니다. ⓒ 김덕래

 
아직 10년이 채 되지 않는 신생기업이 만년필의 핵심인 펜촉을 자체 생산 하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펜촉은 신뢰성 있는 닙전문 생산업체 '복(Bock)'社의 것을 사용했습니다. 살짝 틀어진 펜촉을 보기 좋게 정렬하고, 뻑뻑하던 컨버터도 손봤습니다. 한결 부드럽습니다. 색감 좋고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었을 때 기분도 산뜻해지는 것처럼, 만년필도 흠잡을 곳 없는 상태가 되어야 마음 편히 쓸 수 있습니다.

졸린 눈 비비며 새벽을 맞는 당신의 오늘을 응원합니다

한 잔의 와인으로 세 번 맛을 본다고 합니다. 먼저 눈을 현혹하는 빛깔로 한 번, 코에 스미는 향으로 또 한 번, 혀를 지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감미로움으로 다시 한 번. 만년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디자인과 색감으로 한 번, 손에 쥐었을 때 손바닥을 타고 오르는 짜릿한 충일감으로 한 번, 잉크를 채워 종이에 쓸 때 펜촉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사각거리는 손맛으로 한 번. 이중 어느 하나도 더하거나 덜하지 않습니다. 결과뿐 아니라, 어떻게 시작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도 다 비길 바 없이 의미롭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화상회의를 통한 재택근무가 가능하고, 말 한마디 안 하고도 따뜻한 음식을 배달시켜 먹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스마트폰용 앱이나 게임 등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콘텐츠들이 각광받는 세상에서, 역설적이게도 아날로그 미학의 정점에 서 있는 만년필이란 도구를 만드는 젊은 업체가 있습니다. 그들의 패기 넘치는 도전에 기꺼운 마음을 담아 박수를 보냅니다.
 

잘 손봐진 펜은, 종이 위를 그저 스치듯 지나가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 김덕래


오래된 것이 온전히 존중받아야 할 시대적 가치라면, 새로운 것은 그 자체가 불끈 솟아난 힘줄과 같습니다. 날 것 그대로의 꿈틀거림입니다. 내 경력이 이만큼이다 자만할 필요가 없고, 얼마 되지 않았단 이유로 어깨를 움츠릴 까닭도 없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 누군들 처음이 없었겠습니까? 지금 무대 위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이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그늘 속에서 지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낸 사람만이 결과에 다다릅니다. 나이를 자기 변명의 수단으로 삼지 마세요.

여태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습니다. 게다가 설령 성공한대도 남는 게 없습니다. 오늘 시작해도 절대 늦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잘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걸어, 눈앞에 보이는 언덕 하나만 넘어서면 됩니다. 졸린 눈 비비며 새벽을 맞는 당신의 오늘을 응원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생각이 넘치면, 자칫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정직이 최상의 방책인 것처럼, 마음이 섰으면 두리번거리지 말고 곧게 나아가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자로 쭉 뻗은 이 만년필처럼, 당신의 앞날도 순탄하면 좋겠습니다. 진정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스틸폼(Stilform)
- 2013년 '크리스토프 보흐러(Christoph Bohrer)'와 '마틴 바그너(Martin Wagner)'에 의해 탄생한 독일 브랜드. 단순한 직선에서 미적 가치를 이끌어내, 디자인 언어로 재창조하는 디자인 전문가. 탁월한 표현능력을 바탕으로 다수의 디자인어워드를 수상했으며, 단순한 것이 부족함이 아닌 세련된 스타일의 한 축임을 유감없이 어필하는 만년필계 신흥 아티스트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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