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23 07:11최종 업데이트 21.03.23 07:11
  • 본문듣기
 

애틀랜타 총격으로 숨진 아시아 여성들. ⓒ 최현정

 
연단에 선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정확한 발음은 아니었지만 한 명 한 명 또박또박.

"순정 팍
현정 킴
용애 유
순차 킴
델라이나 애슐리 야은
다오유 펑
폴 안드레 미쉘스"


지난 16일(이하 미국 현지 시각) 조지아주 애틀랜타 한복판에서 머리와 가슴에 정조준된 총을 맞고 숨진 이들의 이름이었다. 그 테러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이들이 1500km 떨어진 뉴욕 맨해튼에서도 모여 그 이름을 함께 외쳤다.      
 

유니온 스퀘어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희생된 아시아 여성들을 추모하고 있다. ⓒ 최현정

     
나와 같은 이름, 또래, 얼굴

사고 소식을 들은 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매시간 업데이트 되는 소식에 분노와 슬픔이 교차되는 며칠이었다. 지난 19일 아침 숨진 한인 한 명의 신원을 알게 됐다. 팔로우하던 흑인 인권 운동가 사이트에서였다. 

김현정. 51세. 두 아들을 키우던 싱글맘. 나와 같은 이름, 비슷한 연배의 익숙한 얼굴을 보노라니 사건의 실체가 더 바짝 다가온다. 아시아인에 여성이라는 2중의 소수자로 미국 땅에 사는 이에게 가장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날 똑같은 마음으로 모인 이들이 맨해튼 유니온스퀘어를 가득 채웠다. 사고 발생 후 맨해튼 중심가에서 항의 집회가 열린 건 이 날이 처음이었다. 19일 금요일 오후 6시. 젊음과 사랑이 넘치던 유니온 광장은 팻말과 촛불과 꽃을 든 이들로 가득 찼다. 
 

맨해튼에 사는 변호사 애나는 남편 파이먼과 한복을 입고 집회에 참석했다. 아시안 여성으로서 슬픔과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다고 한다. ⓒ 최현정

 
"뉴스를 보고 있는데 가슴이 무너지더라고요.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어서 여기 나왔습니다."

맨해튼에 사는 변호사 애나는 남편과 함께 시위 내내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영어가 더 편한 한국인인 그녀는 옷장에 고이 간직하던 한복을 꺼내 입고 시위에 참가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정체성과 분노를 표하고 싶었다. 아내 옆에 선 남편도 함께 분노하며 언론을 원망했다.

"흑인 인권 시위와 비교해 주목도가 덜한 것 같아 슬픕니다. 아내만큼 저도 너무 가슴이 아프네요."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부부는 3시간 넘게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이 곳에서 태어난 지미. 그의 부모는 보트피플이었다. 그는 직장을 마치고 집회에 달려왔다고 한다. ⓒ 최현정

 
베트남계인 지미는 퇴근 후 시위에 합류했다. 젊은 아시안으로 그가 평소 느끼던 분노를 팻말에 담았다.

'젠장, 우리는 여기 살아야 되거든.'

보트 피플이었던 부모님이 정착한 곳은 캐나다였다고 한다. 지미는 이 곳 맨해튼에서 직장을 다니는 중이다. 그는 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젊은 아시아 사람의 마음을 이번 테러가 흔들었다고 생각한다. 
 

코비와 잭은 형제다. 작년 BLM(black lives matter) 시위에 열심히 참여했다. "기억하고 싸우지 않으면 비극은 반복된다." ⓒ 최현정

 
워싱턴 하이츠에 사는 코비와 잭은 형제다. 흑인과 한국인의 피가 반반씩 흐르고 있는 그들은 지난해 흑인 인권 시위 BLM(black lives matter)에 빠지지 않고 참가해 싸웠던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이날 다시 아시안 증오를 멈추라는 시위에 나왔다.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서 약한 인종을 향한 부당한 일이 또 벌어졌기에 기꺼이 나선 것.

"지난 흑인 인권 시위에서 봤듯이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이런 비극은 계속 반복될 거야." 

형 코비의 말에 동생 잭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섹스 중독자라는 경찰의 발언
 

'바로 그걸 증오범죄라 하는 거야' 제니퍼는 경찰이 증오범죄를 섹스중독으로 왜곡할까 두렵다고 했다. ⓒ 최현정

 
'그걸 증오범죄라고 해.'

들고 온 플래카드의 의미를 물어보자 제니퍼의 목소리가 떨린다. 8명의 무고한 사람을 죽인 백인 청년을 '섹스 중독' 운운한 애틀랜타 경찰의 말을 옮기며 울먹인다. 연쇄 살인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이 사건 당일부터 살인범 옹호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공포스러웠다고 했다. 

"어느 중독자도 8명의 사람을 죽이지 않아. 범인은 자신의 살인을 합리화하고 있고 경찰은 범인의 눈으로 사건을 보고 있다는 증거야."

제니퍼는 죽은 이들에 대한 수사가 공정하려면 우리 모두 관심을 놓지 않고 지켜봐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사라를 비롯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아시안 차별 반대 집회에 함께하고 있다. ⓒ 최현정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를 멈춰라'(No Asian Hate) 시위에는 제니퍼처럼 아시아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브루클린에 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고등학교 선생님들 5명도 함께 소리치고 있었다. 모두 백인이었지만 아시안을 타깃으로 한 증오 범죄의 심각성에 공감해서 나왔다고 했다. 영어를 가르치는 사라는 트럼프 대통령 집권 4년이 미국 사회에 숨어 있던 증오와 혐오라는 잡초에 거름을 주었다고 말한다. 

"대통령이 연설에서 코로나바이러스를 쿵 플루(kung flu, 중국 무예 쿵후와 독감 플루의 합성어), 우한 바이러스(Wuhan virus), 중국 바이러스(Chinese virus)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무능을 아시아에 전가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 비극이 시작되었다 싶어."

기하학을 가르치는 교사도 사라 선생님의 말을 잇는다.

"내 학생 중에도 아시아인들이 있는데 그들에 대한 공격은 우리 모든 미국인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해."

선생님들은 추운 날씨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미국인에 대한 테러'에 대해 연대했다. 

지난 2월 27일 <에이비시 뉴스(abc News)>는 뉴욕경찰(New York City Police Department)의 리포트를 인용해 반 아시안 혐오범죄가 지난해에 비해 1900%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아시아인에 대한 폭력을 신고받는 사이트인 '아시아태평양계 혐오를 멈춰라(StopAAPIHate)'엔 작년 한 해 3800건의 신고가 접수됐다고 한다. 하지만 언어와 신분, 문화의 이유로 신고를 주저하는 아시아인의 성향까지 감안하면 이보다 몇 십 배 많은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4살 에밀리. 누구보다 능숙하게 구호를 따라하던 똑똑한 어린이. ⓒ 최현정


 4살 에밀리와 함께 나온 가족들은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어'라는 팻말을 만들어 왔다. 팻말의 뒤쪽엔 '침묵은 폭력'이라는 말이 새겨 있었다. 참고 모른 척, 못 본 척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뜻이다. '아시아인들도 똑같은 사람이야'이라는 말과 함께 BTS 7명의 사진을 붙여놓은 것을 보고 혹시 팬이냐고 물으니 웃으며 대답한다. "그들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라고. BTS는 사진으로나마 유니온 광장 집회에 등장해 힘을 주었다. 
 

에밀리의 가족들은 '아시아인들도 똑같은 사람이야'이라는 말과 함께 BTS 7명의 사진을 붙여놓은 팻말을 준비해왔다. ⓒ 최현정

 
이 날 내가 본 가장 인상적인 문구는 한 학생이 들고 있던 팻말에 적힌 말이었다. 

'AMERIKKKA(아메리카 철자를 백인우월주의단체 '쿠 클럭스 클랜(KKK)'에 빗댄 말)의 치명적인 세 개의 기둥. 백인의 인종차별에 대한 취약성, 여성 혐오, 기독교 근본주의.' 
 

'미국의 치명적인 기둥 세개. 백인의 취약성, 여성혐오, 기독교 근본주의' 가장 강렬한 문구였다. ⓒ 최현정

 
범인은 남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신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총을 좋아했으며, 왜곡된 여성관을 가졌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지 닷새가 지난 21일 일요일까지 증오 범죄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위 학생의 팻말은 21살 백인 청년이 천연덕스럽게 마사지를 받고 준비한 총으로 8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사건에 대해 혼란해 하는 이들에게 주는 해답 같았다. 

이젠 우리 목소리를 들을 시간

지난 주말 뉴욕·애틀랜타·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해 미국 전역에서 아시아인 증오 반대가 집회가 열렸다. 보도에 따르면 펜실베이니아 집회에 등장한 산드라 오는 확성기를 잡고 이렇게 시위대에 외쳤다. 

"우리 지역 사회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겪는 두려움과 분노를 표출할 수 있게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꺼이 경청해 주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애틀랜타에서 나고 자란 케이팝 가수 에릭 남은 <타임>에 '당신이 애틀랜타의 반 아시아 폭력에 놀랐다면 이젠 우리의 목소리를 들을 시간'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교사에게 차별 받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고백하며 성 문제로 축소하려는 애틀랜타 경찰의 소극적인 수사를 강하게 질타했다. 그리고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니온 스퀘어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숨진 아시아 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 최현정

 
19일 유니온스퀘어 집회에서는 빌 드 블라시오 뉴욕시장과 척 슈머 뉴욕 상원의원을 비롯해 수십 명의 인사들이 연설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연설은 중년의 아시아 여성이 던진 투박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나서지 말라는 얘길 들어왔습니다. 참으라고 교육을 받았지요. 그러나 이젠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프다고 소리쳐야 한다는 것을요. 우리는 당당히 우리의 얘기를 주장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같이 해주십시오."

광장에 모인 아시아인, 흑인, 백인 모두 함께 소리쳤다. 아시안 차별을 멈추라고. 함께 연대하자고. 소리치자고 말이다. 

 

'난 바이러스가 아니야.' 8살 게이멘의 팻말에 가슴이 아팠다. ⓒ 최현정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