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23 19:28최종 업데이트 21.04.2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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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가 세계인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처럼 손이라는 인류 최대의 무기를 사용 못하도록 금하면서도 도구를 사용해 상대를 제압하도록 한 경기라는 점이다. ⓒ pixabay

 
스포츠의 원톱을 꼽으라면 역시 축구다. 가장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나만의' 스포츠가 있지만 가장 많은 팬과 가장 많은 (프로, 아마) 선수를 보유한 스포츠가 축구인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 전 세계 76억 인구의 절반이 적어도 한 경기 이상은 시청했다 하니 이쯤 되면 인류의 축제라고 부를 만도 하다. 무엇이 인간을 이토록 축구에 열광하게 하는가?

생존본능에 따라 달리고 던지고 때리고 맞히면서 스스로를 지켜온 인간은 실전이 아닌 가상의 전투, 사냥 능력을 겨루는 가상의 전장, 수렵지를 개발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경기장에는 가상의 적을 세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전을 흉내 낸 가상의 싸움이기 때문에 실전과 가상을 배합해 공격 본능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상대에 대한 가해는 최소화해야 했다.

스포츠의 원톱

상대에 대한 가해 정도에 따라 개인 종목, 구기 종목, 격투기 종목으로 나뉜다. 스포츠 분류법이 여럿 있지만 승리를 위한 경쟁자와의 상관관계에 따른 분류는 그렇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정해진 규정 안에서 직접 공격하는 것이 격투기라면 양측 사이에 매개체를 놓고 간접 공격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구기 종목, 그리고 상대 제압 없이 내 기록과의 싸움이 관건이면 개인 종목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구기 종목은 손을 사용한다. 오직 인간만 가지고 있는 정교한 기술 능력이 손의 사용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만 빼고 모든 신체를 다 사용하도록 한다면, 그것도 직접 상대의 신체를 공격하지 않고 매개를 통해서만 제압하라 한다면, 규정은 최소한으로 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면, 이 이상 인간의 야성과 절제 능력을 동시에 발휘하도록 하는 경기가 또 있을까?

대부분의 구기 종목에서는 신체의 특정 부위에 공이 맞았다고 벌칙을 주지 않는다. 손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체로는 공을 포함 경기에 필요한 장비를 제어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굳이 고의로 사용하지 않아서다. 따라서 벌칙을 부여할 이유도 없다.

반면 축구는 핸들링(우리나라에서는 핸들링이라 부르지만 영어에서는 핸드볼handball이 맞는 표현)이라는 반칙 규정을 통해 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거의 유일한 국제 공인 스포츠다.(우리나라의 족구와 비슷한 '세팍타크로'라는 경기가 동남아 국가들 중심으로 퍼져 있기는 하다.) 극도로 단순화된 군대스리가(군대 축구)에서도 다른 제한은 없어도 이것만큼은 지켜야 한다. 정규 시합이 아니라면 사실 핸들링 반칙 규정만 둬도 축구를 즐기는 데 큰 지장이 없다. 결국 축구의 핵심은 발 사용이 아니라 손 사용 금지다.

축구가 세계인의 사랑을 독차지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처럼 손이라는 인류 최대의 무기를 사용 못하도록 금하면서도 도구를 사용해 상대를 제압하도록 한 경기라는 점이다. 원리는 기발하지만 규칙은 극도로 단순해 많은 이들을 열광하게 만든다. 원리는 진부하면서 규칙은 까다로운 대부분의 일상에 지친 많은 이들이 스포츠에 심취하는 이유는 이처럼 삶과 정반대의 판타지를 스포츠가 제공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렇게 스포츠가 제공하는 판타지는 한편으로 자본과 권력의 좋은 먹잇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전도율 높은 집단 열기는 국가주의의 더 없는 도구가 되면서 가상의 대결을 현실로 가져와 심지어 전쟁의 명분으로 사용된다.

먹잇감

영토와 이민자 문제로 갈등을 빚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축구 예선전에서 숙명의 대결을 펼친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엘살바도르가 최종 승리하자 온두라스 영토 내의 엘살바도르인을 상대로 폭력이 급증했다. 결국 엘살바도르는 이를 빌미로 온두라스를 향한 공습을 시작, 두 나라는 전쟁을 치르기에 이른다.

미주기구(OAS)와 미국의 개입으로 5일 만에 휴전을 했지만 양측 모두에 엄청난 피해만 남긴 전쟁이었다. 축구로 인한 국민감정 싸움이 전쟁의 표면적 이유였지만 사실 근본적 원인은 따로 있었다. 두 나라 모두 대부분의 농지를 극소수의 부유층이 독점하는 상황에서 경작할 땅이 없는 엘살바도르의 많은 농민들은 영토가 넓은 온두라스로 불법 이주하는 일이 잦았다.

온두라스에서 무단 경작을 한 엘살바도르인이 3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온두라스 농민들의 불만 역시 쌓일 수밖에 없었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극단적 불평등을 견디다 못해 국경선을 넘은 국민들을 위한 대책을 세울 의지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으며,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전쟁이었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국내의 불만을 국가 간 갈등으로 뒤집어 전쟁까지 치른 또 하나의 사례를 남겼으며, 전쟁 명분을 축구에서 찾는 비열함마저 보였다. 온두라스도 나을 것은 없었다. 30만 불법 이주민을 몰아내고서 확보한 농지는 전쟁 후 피해를 입은 농민들에게 환원되기는커녕 대부분 대지주들에게 돌아갔다. 결국 온두라스 농민들에겐 불법 이민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던 셈.

국가권력뿐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스포츠는 더할 나위 없는 수익 창출의 수단이 된다. 물론 지역 봉사와 기업 이미지 차원에서 스포츠 구단을 운영하는 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유럽 축구의 빅리그들은 점점 오일머니를 비롯해 전세계에서 모인 자본의 각축장으로 변해가고 있다.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소속 팀 가운데 셋 정도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외국의 '슈가 대디'(Sugar daddy, 부자 구단주)들이 차지하고 있다.

특히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2003년 이후 두드러지고 있는 현상을 보자. 부자 구단주의 과감한 투자와 그로 인한 성공 사례가 알려지면서 더 많은 자본이 모이고 그러면서 리그도 다시 더 성장하는 선순환을 그리고 있다. 현재 유럽의 프로 축구 리그 가운데 영국의 프리미어리그가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것도 이런 현상과 절대적 관계가 있다.

하지만 소수의 자본이 이끄는 구성은 그만큼 큰 위험도 따른다. 수익이 최종 목적인만큼 더 큰 수익을 위해서라면 체제의 균열도 마다하지 않는다. 매력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돼 있는 것이 '슈가 대디'들의 특징이다. '슈가 대디'는 우리말로 '원조교제'에 해당하는, 원래부터 좋은 어감이 아닌 표현이지만 축구계에서 쓰일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탈리아 로마 이탈리아축구협회 본부 인근 벽에 프로축구 구단 유벤투스의 회장 안드레아 아넬리가 칼로 축구공에 구멍을 내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지난 18일 유럽의 12개 축구 구단은 일부 '빅클럽'만 모이는 '유러피언 슈퍼리그'(ESL)의 창설에 동의한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이에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6개 구단은 20일 전원 대회 참가를 포기했으며,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를 대표하는 유벤투스 등 3개 구단 또한 ESL 참가를 포기한다고 21일 발표했다. ⓒ 연합뉴스

 
슈가 대디와 유럽슈퍼리그

최근 불거진 유럽슈퍼리그(ESL) 논란도 같은 연장선에서 봐야할 문제다. 정상대로라면 오는 8월에 개막할 예정으로 지난 19일 출범했지만 생각 외로 축구계 내외의 큰 반발에 부딪혀 무산될 위기에 놓여 있는 게 사실이다. 한마디로 이들 슈가 대디들이 유럽 스포츠의 뿌리를 잘못 이해한 결과다.

이미 많은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됐지만 유럽슈퍼리그는 유럽의 명문 구단 15개 고정 팀과 성적에 따른 5개 추가 팀이 국제축구연맹(FIFA), 유럽축구연맹(EEFA)과 무관하게 자신들끼리 리그전과 토너먼트전을 통해 매년 우승팀을 뽑겠다는 것이 그 골자다.

리그를 주관하는 측의 판단은 우수 명문 구단끼리 리그전을 치르면 매 경기가 빅매치가 되며 이렇게 되면 현재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이다. 2부, 3부, … 등 하부 리그로 이어지는 현재의 방대한 체제에서는 자신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을 가지고 하위 구단 운영 조건까지 부담하게 되는데, 이것은 부당하다는 거다.

소위 미국식 폐쇄 리그 체제가 그것인데 일정한 수의 정해진 엘리트 팀들 간에 경기를 벌이는 방식이다. 그 리그 안으로 새 팀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반 아마추어 체육과 단절된, 산업으로서 엘리트 체육의 전형적 모습이다. 당연히 엄청난 특권과 힘을 갖는다.

하지만 유럽의 전통은 수많은 클럽들이 참여해 성적별로 리그를 형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상위 리그의 하위 팀은 다음 시즌에 하위 리그로 강등되고 하위 리그의 상위 팀은 상위 리그로 승급되는 승강제 구조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리그는 가장 정예 선수들이 모이는 곳인 1부 리그에 해당한다.

독일의 경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분데스리가는 1부 리그에 해당하고 2부, 3부까지 프로팀들의 리그가 펼쳐진다. 선수는 물론, 팬 층도 탄탄해 3부 리그 평균 관중 수가 한국 프로축구 1부 리그 (K리그1)보다 많다(2019시즌 한국프로축구 평균 관중수가 5,769명이었던 반면 2019-2020시즌 독일 프로축구 3부 리그 평균 관중수는 6,123명이었다. 그것도 후반부는 코로나19로 인해 관중수가 절감된 결과다).  

3부 리그 뒤로도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된 레기오날리가(Regionaliga, 지방리그), 오바리가(Oberliga, 수퍼리그) 등이 이어진다. 엘리트 중심의 이벤트 스포츠 산업 이전에 일반인부터 참여하는 풀뿌리 체육의 최종 단위가 이들의 프로 스포츠 세계인 것이다. 미국의 전통과 달리 엘리트 체육과 일반인 체육이 단절돼 있지 않고 승강제를 통해 연결이 돼 있다. 

협회에 따라 전체 리그의 팀들이 참여할 수 있는 대회도 열린다. 그러다 보니 가끔 프로 명문 구단이 무명 아마추어 구단에게 패하는 일도 벌어진다. 2000년 프랑스컵 축구가 대표적이다. 8만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승에서 맞붙은 두 팀은 프로 명문 구단 '낭트'와 4부리그 소속 '칼레'. 칼레의 선수들은 모두 다른 직업을 가지고 틈틈이 축구를 하는 아마추어 선수들이었다. 결과는 2대1 낭트의 승리였지만 프랑스의 모든 언론과 축구인, 국민들은 이미 프로 명문 구단들을 차례로 꺾고 결승까지 올라와 대서사시를 쓴 칼레의 팬이 되어 버렸다.  

미국식 폐쇄 리그나 유럽에서 추진 중인 슈퍼리그 지지자들에겐 이런 결과가 프로 명문 구단들의 시간 낭비로 비칠 것이다. 하지만 유럽식 풀뿌리 스포츠를 지지하는 이들에겐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장면처럼 스포츠가 극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유럽슈퍼리그가 좌초될지 순항할지 최종결정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유럽 풀뿌리 스포츠의 전통과 스포츠가 가진 또 하나의 상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슈퍼리그 탄생과 무관하게 슈가 대디 노릇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스포츠가 가진 또 하나의 상식, 사실은 더 근본적인 상식은 머니(Money)가 아니라 건강과 정신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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