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19 11:46최종 업데이트 21.05.19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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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그림자 없는 사람은 없듯, 모든 것들의 시작에는 필연적으로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마지막 날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입니다.

정성을 다하면 돌에서도 풀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력을 다해 공(悾)을 들이면 하늘도 감복한다는 뜻이지요.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적어도 하나쯤, 세상이 나를 추억할 만한 거리를 만든 후 먼 길 떠나길 꿈꿉니다. 이름을 드높이고 싶은 명예욕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잊히고 싶지 않은 본능이 앞서서일 것입니다.

문 닫은 만년필 회사, 델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델타(Delta) ⓒ 김덕래

 
1982년 이탈리아에서 세 명의 예술가에 의해 탄생한 '델타(Delta)'는, 다양한 문화유산을 지닌 예술의 도시 나폴리에서 시작한 만년필 제조사답게, 주목받을 만한 작품들을 여럿 만들어냈습니다. 델타를 대표하는 모델은 이견 없이 '돌체비타(Dolce Vita)'입니다. 사용자의 손 크기를 고려해 다양한 사이즈로 만든 것도 이채롭습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대형기의 상징인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9보다도 더 두툼한 돌체비타 오버사이즈입니다. 슬림, 미디엄, 오버 중 가장 큰 모델이란 뜻입니다. 이탈리아어로 'La Dolce Vita'는 '달콤한 인생(The Sweet Life)'을 의미합니다.
 

위 사진 왼쪽은 파카 듀오폴드 빅레드, 오른쪽은 펠리칸 M1000 그린 스트라이프, 아래 사진은 델타 돌체비타 OS. ⓒ 김덕래

 
델타가 탄생하기 20년도 더 이전인 1960년,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회자되는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에 의해 동명의 영화가 세상에 먼저 선을 보였습니다. 그는 1954년 발표한 영화 '길(La Strada)'로 이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유명 감독입니다. 극중 잠파노 역을 맡은 안소니 퀸과, 젤소미나로 분한 줄리에타 마시나의 울림 있는 연기는, 영화 한 편이 얼마나 큰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지 생생히 보여줍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맛은, 제목과는 달리 달기보단 쌉싸름한 맛에 가깝습니다. 단순히 행복한 나날을 늘어놓는 대신, 다소 묵직한 화두를 통해 각자 내면을 들여다보게끔 합니다.


1998년 돌체비타를 출시한 델타는 만년필계에 닥쳐온 시대의 격랑을 이겨내지 못해 2017년 문을 닫고 맙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제조사들이 즐비한 필기구계에서 델타는 단명한 브랜드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페데리코 펠리니가 보석과도 같은 영화 작품을 남김으로써 영원히 사는 것처럼, 델타 역시 돌체비타를 통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만년필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에게 델타는 아직도 현역입니다.

독일의 '카웨코(Kaweco)'처럼 2번의 파산을 겪고도 부활한 필기구 회사도 있습니다만, 델타에게 이런 행운이 오긴 힘들어 보입니다. 폐업 이후, 델타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던 '시로 마트로네(Ciro Matrone)'가 숙련공들을 모아 '레오나르도 오피시나 이탈리아나(Leonardo Officina Italiana)'라는 회사를 이미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간 쌓아온 만년필 제조기술을 활용해 이탈리아 특유의 아름다운 펜들을 생산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델타가 쉽게 잊히진 않을 게 틀림없습니다.

피로가 씻겨나가는 오렌지색 배럴

파카의 명작 파카51 복각판이 출시되면, 80여 년 전 태어난 오리지널 파카51의 인기가 식을 것으로 예감한 이들도 있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 사뭇 달랐습니다. 오래 쓰다 보면 고무로 된 색(Sac)이 삭아 교체해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던 충전 메커니즘을 현행 컨버터 사용이 가능하게 개선하고, 캡 체결방식도 돌려 잠가 혹여 의도치 않게 분리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며, 18K 금촉을 장착하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들만 모아놓은 셈입니다. 그러니 정황상으론, 관리하기 불편하고, 더는 새것을 구할 수 없는 오리지널 파카51과 이별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마치 소금물을 마셔 기갈이 더 심해진 것처럼 '옛 것'에 대한 욕구는 더해만 갑니다. 뒤늦게 예상 못한 인기를 얻는 이른바 역주행이 아니라, 80년째 꾸준한 순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복각판의 만듦새가 덜해서가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되레 만족스럽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분점에서 먹어본 음식의 맛이 기가 막히면, 나중에 시간을 내서라도 먼 곳의 본점에 가 한 번 더 맛보고 싶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 레오나르도가 아무리 흥한들 델타가 쉽게 잊힐 리 없습니다.

강한 빛을 오래 흡수한 형광물질은 그만큼 긴 시간 빛을 내뿜습니다. 물론 완전한 어둠 속에 장기간 노출되면 서서히 빛이 사그라들지요. 델타가 더는 새 펜을 생산하지 않으니, 언젠가는 빛의 밝기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100년 전 만들어진 만년필이 여전히 쓰이기도 하니, 어쩌면 지금 내가 쥔 이 펜이 나보다 더 오래 이 세상에 남아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파카 듀오폴드를 대표하는 색상이 빅 레드, 펠리칸의 상징이 그린 스트라이프라면, 델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컬러는 바로 배럴을 온통 휘감은 오렌지색입니다. 캡과 노브까지 같은 컬러로 다 뒤덮은 모델도 있지만, 마치 잘 차려입은 콤비 슈트처럼 서로 다른 컬러를 기막히게 조합한 이 펜의 선호도가 압도적입니다.

캡은 검은색 레진으로 묵직하게 마감하고, 장식부는 스털링 실버로 만들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이 나도록 했습니다. 마치 과육을 듬성듬성 썰어 넣은 것처럼 불규칙한 결정들이 보이는 오렌지색 배럴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감이 씻겨나가는 것만 같습니다.
 

올곧게 뻗은 펜촉과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피드. ⓒ 김덕래


험한 세상 살아가자면 독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적당히 모질어야 손해 보지 않고 살수 있다 합니다. 하지만 맛난 음식도 먹어본 적이 있어야 그 맛을 알고, 좋은 곳도 가봐야 또 가고 싶은 것처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야 아끼지 않고 나눠줄 수 있습니다. 지금 누군가에게 채찍과 당근 둘 중 하나를 건네야 할 상황이라면, 적어도 오늘은 단 것을 주세요. 하루하루는 늘 오늘의 연속이고, 아낌없이 줘도 마르지 않는 게 따뜻한 말 한 마디입니다.

피드는 색도 검은 데다, 펜촉 아래에 있어 필기할 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피드가 없는 만년필은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습니다. 잉크의 흐름이 많고 적음은 둘째치고, 필기할 때 펜촉이 휘청거려 쓰기 곤란합니다. 이렇게 큼지막한 피드가 내 뒤를 받쳐주고 있다 생각하면, 없는 기운도 솟구치기 마련입니다. 펜촉 입장에서 피드는 '믿는 구석'입니다. 아무리 피드가 커진다고 해도, 펜촉의 존재감을 대신할 순 없습니다. 각자의 역할이 따로 있으니, 곁눈질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면 그뿐입니다.

만년필을 축구팀에 비유한다면, 캡은 골키퍼, 배럴은 미드필더에 해당하고, 펜촉은 두말이 필요 없이 스트라이커일 것입니다. 공격수가 현란한 개인기로 적진을 돌파하듯, 만년필은 펜촉 상판 화려한 장식으로 시선을 잡아 끕니다. 브랜드와 모델에 따라 투톤으로 잔뜩 멋을 내기도 하고, 일체의 꾸밈을 배제하기도 합니다. 필기를 하는 행위 자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그저 눈으로 보는 맛입니다.

실제 종이와 맞닿는 펜촉 시작점부터 상판 한가운데까지 난 슬릿 끝부분엔 '벤트홀(Vent Hole)'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공기가 통하는 구멍입니다. 같은 의미로 '브리더홀(Breather Hole)'이라 부르기도 하고, 생긴 모양을 따 '하트홀(heart Hole)'이라고도 합니다. 현행 만년필에서 벤트홀은, 원래의 목적인 원활한 잉크 흐름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제조사보다 모더니즘을 중시하는 라미의 일부 모델은 벤트홀이 없기도 합니다.

브랜드와 모델에 따라 다른 벤트홀
  

왼쪽은 델타 돌체비타, 오른쪽은 라미 캘리촉. ⓒ 김덕래


하지만 펜촉 상판은 제조사의 미적 감각을 어필할 수 있는 효과적인 지점입니다. 필기구 제조사의 기술력이 상향 평준화된 현재엔, 벤트홀 형상도 하나의 표현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브랜드와 모델에 따라 생김새가 다양해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몬테그라파 미야, 비스콘티 오페라 클럽, 몽블랑 루즈앤느와, 몽블랑 비틀즈. ⓒ 김덕래

  
젊어선 치열한 경쟁으로 대변되는 한낮이 더러 마뜩지 않습니다. 밤이 되면 한 잔 술의 힘을 빌려 하루의 시름을 억지로 몰아내곤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밤이 더 두려워지는 이유는, 타인의 기억에서 내가 잊힐 그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앞서서 일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상대방에게 얼마나 값진 걸 받았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줄 수 있느냐에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을수록 젊음에서 한 발자국씩 더 멀어지는 게 이치니, 그저 나이 드는 것 자체를 서글퍼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페데리코 펠리니도, 델타도 부러워하지 마세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평생을 사는 방법은, 진심을 녹여낸 말 한 마디를 먼저 건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도 부드러운 말 한 마디는 샘물처럼 길어 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의 가치는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치유의 기운이 담긴 한마디 말이 상처 입은 이에게 가닿으면, 신열을 내리는 둘도 없는 영약이 됩니다. 진실로 즐거워 견디기 힘들 만한 나날 보내는 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미 둘도 없을 행복한 오늘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입 밖으로 내보세요. 내게로 와라. 달콤한 인생아~ 돌체비타야~!
 

영원히 달콤한 인생, 델타 돌체비타 OS F촉. ⓒ 김덕래

 
* 델타(Delta)
- 1982년 이탈리아 남부도시 나폴리에서 시작해 만년필 황금기를 거치며 많은 작품들을 만들어 냈으나,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해 짧은 역사를 끝으로 2017년 폐업한 필기구 제조사. 더는 새 제품을 만들어내지 않아, 이미 생산한 펜들의 인기가 갈수록 더해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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