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19 13:01최종 업데이트 21.07.19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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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에이펙) 의장국 뉴질랜드는 16일(현지시간) 에이펙 특별정상회의를 주최했다. 오는 11월로 예정돼 있는 본회의에 앞서 열린 이번 특별회의에는 뜻밖에 다수 주요국 정상들이 원격 화상을 통해 참석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에 대한 대응 논의가 주된 이슈였다.

변이 바이러스의 역습이 심상치 않고 여러 국가들의 여름 휴가철 경기 활성화 계획에 제동이 걸린 만큼 각국의 대응 방안들도 관심 대상이었다. 글로벌 백신 공급 대책 또한 주요 관심사 중 하나다. 백신 보급 이후 치사율은 낮아지고 있지만 예상보다 정상화로 가는 길이 길어질 수 있다는 회의적 전망이 나온다. 이와 함께 경제 대책도 시급하다.


하지만 이번 에이펙 특별정상회의가 신속하게 열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구촌 위기 상황에 대한 공동대응이라는 대의 명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역학관계 또한 정상들을 불러 모으는 데 한 몫 했다. 협력 못지않게 갈등 또한 회합의 동기가 되는 역설을 보여준 셈이다.

바이든-시진핑의 만남

우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참석이 관심을 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월 쿼드 정상회담 당시 동아시아의 중국 영향력 확산에 제동을 걸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당초 참석 여부가 불투명했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역시 이번 에이펙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 1일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행사에서 "누구든 중국을 괴롭히면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릴 것"이라는 섬뜩한 메시지를 발표한 바 있다.

상대방을 향한 경고를 한방씩 주고받은 두 정상은 이렇게 지난 4월 기후변화정상회의 이후 3개월 만에 화상을 통해 얼굴을 맞댔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자연스럽게 그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다. 당초 양국 정상의 차기 회동은 오는 10월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가 될 것으로 예상됐으나 3개월이 짧아졌다.

사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행사 이후 미국 쪽에서 조만간 두 정상의 만남이 이뤄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시 주석의 강성 발언에 대해 미국이 어떻게든 반응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커트 캠벨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 조정관은 지난 6일 미국은 중국에 대해 '일정한 형태의 관여'를 조만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일 때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 주석과 만나 회담하고 있다. 2017.1.17 ⓒ 연합뉴스

 
물론 이번 에이펙 회의가 다자 정상회의이고 원격으로 이뤄진 만큼 두 정상의 본격적 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일정한 형태의 관여'를 위한 수순의 일환임은 틀림없다. 이미 양국은 코로나19 대응 차원의 글로벌 백신 공급을 두고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코로나19 백신은 전 세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전략무기화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델타 변이를 비롯한 코로나19 변종 바이러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백신 확보는 각국의 중요한 안보 전략이다. 의료체계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치사율을 낮추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현재까지는 백신 접종이 적어도 치사율을 낮추는 효과적인 방법임이 증명되고 있다.

특히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최근 들어 에이펙 회원국에서 델타 변이의 확산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에 대한 백신 공급이 시급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코로나19 대응 백신 정책에서 정글의 법칙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사람들이 깨달았다는 것이다.

자국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작정 백신 확보 경쟁을 벌이는 것은 글로벌 세계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백신이 부족한 지역에서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하면 머지않아 전 세계가 영향권 안에 들어갈 것이라는 점은 이미 팬데믹 이후 경험으로 알고 있다. 백신 확보를 위한 국가 간 무한 경쟁은 변이 바이러스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패착이었다.

전략무기화 된 백신, 미국과 중국의 경쟁

어떻든 백신 공급이 글로벌 보건 위기 극복에 필수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미국과 중국의 역할과 영향력 경쟁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됐다. 미국의 시각에서 중국의 백신 외교는 일대일로 사업의 또 다른 버전이다. 백신 공급을 미끼로 개발도상국들을 중국의 영향권 안으로 묶어 두겠다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미국의 백신 싹쓸이에 대해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싹쓸이도 모자라 자국 내에서 생산된 백신의 수출을 규제하는 식으로 상대국 길들이기 한다는 것이다.

경쟁과 상호 견제가 좋은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점일 듯, 미국과 중국은 다른 나라가 차마 하지 못하는 두 나라에 대한 비판을 서로 상대방을 향해 정확하게 꽂아 넣는다. 그리고 그렇게 두 나라가 백신으로 충돌할 수 있는 곳이 공교롭게 동남아 국가들이다. 중국의 해양 진출과 미국의 봉쇄 전략이 충돌하는 지역이면서 에이펙 회원국들이다. 이 지역 국가들을 향한 미중 양국의 구애는 오래 전 이미 시작됐다.

이러한 상황은 이들 동남아 국가들이 단순히 미국과 중국의 압박에 눌리지만은 않을 수 있는 배경이 되고 있다. 한 세력의 일방적 영향권 안에 있다면 생각할 수 없는 지정학적 조건이다. 사실 이들 동남아 국가들 가운데 일부는 최근 델타 변이의 역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백신을 통한 확산 억제와 치명률 저하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태국, 인도네시아 등 백신이 절실한 국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과감한 베팅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12∼17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한 가운데 14일(현지시간) 자바섬 탕에랑의 한 학교에서 한 학생이 중국산 시노백 백신을 접종받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이날 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5만4천 명으로, 지난 12일부터 인도·브라질 등을 제치고 세계 1위를 기록 중이다. 2021.7.14 ⓒ 연합뉴스

 
최근 인도네시아, 태국 등 중국의 백신 시노백을 도입해 접종한 나라에서 델타 변이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7월에만 시노백을 접종한 의료진 35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태국에서도 시노백을 접종한 수백 명의 의료진이 델타 변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시노백에 대해 '물백신'이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오는 상황에서 미국은 백신 국제프로그램 코백스(COVAX)를 통해 최근 인도네시아에 400만 회분의 모더나를 공급했다.

이들 국가는 시노백 접종을 완료한 대상자를 상대로 모더나와 화이자 등을 추가로 접종하는 이른바 부스터 샷을 승인하기 시작했다. 물론 보건 안보 차원의 결정이겠지만 동시에 중국의 갑질 외교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조치이기도 하다. 쿼드 동맹 이후 인도차이나 국가들의 협조가 아쉬운 미국 입장에서도 백신으로 이들 국가 국민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해 주목받는 곳이 타이완(대만)이다. 타이완은 백신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최근 확진자 규모가 커지는 위기를 맞았다. 보건 위기이자 차이잉원 정권의 위기이기도 했다. 중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상으로 백신을 원조하겠다면서 타이완 국론 분열에 나섰고, 실제 친중 성향의 국민당 지지층은 중국의 원조를 받아야 한다면서 집권당을 압박하고 나섰다.

지난달 250만 회 분량의 백신을 실은 미국 비행기가 타이완에 도착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미국의 한 고위 관료는 이에 대해 '정치적·경제적 상황에 근거하지 않고 오로지 타이완의 안전을 위한 지원'이라고 묻지도 않은 답을 해 속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미국은 본래 75만 회 분량을 약속한 바 있지만 이보다 세 배 규모의 통 큰 지원을 했다.

이렇게 최근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은 슈퍼 파워의 영향력이 겹치는 지역 국가들이 어떻게 등거리 외교의 기술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지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앞으로 도래할 세계의 국제관계는 무력을 바탕으로 한 일방적 관계의 원시성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그 선례와 모델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국내 정치의 안정이 필수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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