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22 06:36최종 업데이트 21.07.22 06:36
  • 본문듣기
"비키세요."

동네 마트에 갔을 때다. 물건을 고르는 중에 직원이 쏘아붙이듯 말해서 깜짝 놀랐다. 쳐다보지도 않고서 '비켜주세요'도 아닌 '비키세요'라니? 순간 마음이 뾰족해졌다.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비켜서 있는데, 그분이 또 다가와 "비키세요"하는 것이 아닌가. 나갈 때 계산대 직원에게 불쾌한 티를 팍팍 냈다. 사과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계산대 직원은 뭔가 안다는 듯이 싱글 웃었다. 마트에서 나오자 곁에 있던 반려인이 말했다. "저 분 그냥 어디가 불편하신 분인 것 같아." 아차, 싶었다.


'불친절하게 들리는 말투'는 곧 '불친절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투'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개인의 신체적 요인이 작용할 수도 있고 경미한 정신장애 때문일 수도 있다. 친절한 말투와 표정이 서비스직의 미덕이지만, 사회구성원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은 아니다. 점검하고 수정하지 않는 전제는 때로 폭력적이다. 남도 아닌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 ADHD를 가지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일까?
 

'닫힌사회'는 장애 당사자의 고립을 심화한다 프랑스 철학자 H.베르그송이 말한 닫힌사회(morale fermee)는 정지된 관습이나 제도에서 오는 사회적 의무에 따라 안으로는 개인을 구속하고 밖으로는 배타적인 폐쇄사회이다. 한편 열린사회(morale ouverte)의 결합 원리는 관습과 제도라는 비인격적인 힘이 아닌, ‘인류애’다. 열린사회는 가족, 도시, 국가 등 영역을 설정하여 타자를 만들어내는 폐쇄성에 대항해 전인류를 포용하려 노력한다. ⓒ pixabay(mohamed_hassan)


당사자가 알리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장애를 '보이지 않는 장애(invisible disability)', 혹은 '숨겨진 장애(hidden disability)'라고 한다. 주목 받는 SF소설가이자 3급 청각장애인이기도 한 김초엽 작가는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이렇게 썼다.
 
보이지 않는 장애에는 심리적인 문제, 내부장애, 만성 통증, 타인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동장애, 발달장애, 정신장애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가시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는 다른 결의 곤란함에 처한다. 장애가 일상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지만, 주위 사람들이 그의 장애를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없어 필요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변인들이 그의 장애 상태를 까맣게 잊기도 하고, 당사자가 경험하는 고통에 둔감해지기도 한다.
- 김초엽・김원영 공저,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121쪽.
 
나는 발달장애로 분류되는 성인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attention-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를 가지고 있어 의사소통 과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머릿속에는 항상 라디오 채널이 열 개쯤 켜져 있는데,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과정은 각각의 채널이 내는 크고 작은 소리를 헤치고 뚝뚝 끊기는 희미한 신호를 해독해내는 일과 비슷하다. 

ADHD에 대한 많은 오해는 이 보이지 않는 장애의 존재가 더 지워지도록 만든다. "ADHD가 있어서요"라고 말하면 상대는 높은 확률로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아아, 저도 그래요!" 농담이나 가벼운 변명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너는 그렇게 환자가 되고 싶냐?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라며 사는 게 힘들어 꾀병을 부린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의학계에서 억지로 만들어낸 병이 아니냐'는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기껏 병을 인지시키는 데 성공해도 '중증장애도 아닌데 뭘 그리 심각해?'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감추는 것이 차라리 편하고 덜 외롭다는 생각에 혼자 견디며 우울 장애 등 동반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많다. ADHD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잘 드러나지 않는 장애라면 상대에게 그것을 알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조금 불편하고 버겁더라도 감추는 것이 나을까. 상황과 개인에 따라 답은 다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이런 고민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면 그 사회가 소수자에게 열려 있는 사회는 아니라는 것. 아픈 사람이 마음 놓고 아플 수 있는 사회가 아닌 것이다.
  
'사회성' 강요하는 사회

"그 사람은 성격이 밝아서 좋아." "전보다 밝아보여서 좋네." 이런 말은 선의에서 나오지만, 나는 이 말에 '사회적 선의'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말에는 '밝지 않은 성격은 좋지 않다'는 전제가 있다. 우리는 내향적이고 신중한 사람이 외향적이며 사교적인 성격의 사람과는 다른 장점을 가지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만남에 소극적인 사람을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 '어둡고 부정적인 사람'으로 분류하고, 관계가 지향하는 가치에 맞지 않는 존재로 판단하기도 한다.

이렇게 공유되는 인식 속에서 사회성에 대한 획일적인 기준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많은 개인을 단절시킨다. 마치 "건강하세요." "건강하시지요?"라는 따뜻한 인사가 건강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소외감을 주는 것처럼. 우울을 겪는 사람은 자연히 우울을 감추게 되고, 사회적 신호 읽기에 서툰 사람은 사회생활을 더욱 꺼린다. 견뎌온 아픔을 공유하고 치료를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견고한 장벽이다. 관습적인 선량함, 당연하게 여기는 판단을 통해 우리는 '닫힌사회'의 모습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팬데믹은 관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열린사회'에 대해 더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대면 모임, 장시간 대화, 회식이나 1박 2일 워크숍 없이도 만나고 마음을 나누고 내일을 도모할 수 있음을 안다. 사람 간의 이어짐에 방식이나 절대시간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비대면 방식을 통해 전보다 자주 모임에 참여할 수 있고, 사회불안장애나 기분장애 등의 어려움을 가진 사람에게도 소통을 고려해 볼 여지가 생겼다. 비대면 소통에 서툴러 소외되는 계층도 있지만, 이 상황을 계기로 온라인 소통에 다가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나와 다른 삶에 대해 알아차리고 연대감을 갖게 된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 사회 변화를 무조건 발전이라 믿으며 희생시켜온 것들에 시선을 나누어줄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푸른색이 같지는 않겠지만
 

서로 다르게 보는 하늘 같은 도시, 같은 지점에서 올려다보는 하늘도 같은 색의 하늘은 아니다. 차이에 대한 존중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일지도. ⓒ 김나라

 
한 지인이 말했다. "이해와 공감. 이런 단어는 세상에 없는데 있다고 하는 것 아닐까요. 유니콘처럼 만들어낸 개념이요." 유니콘이라니, 정말 그런 거 아닐까 싶다. ADHD, 우울, 대인기피에 신체적 질병마저 고루 갖춘 내가 사회적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이해를 구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한다. 사람들이 색을 인식하는 스펙트럼은 엄밀히 말해 모두 다르다고 한다. 꼭 색각(色覺)이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도 말이다. 다르게 태어나 다르게 살아왔기에 서로 같은 방식으로 세상과 삶을 볼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라는 우주가 특별한 한편 타인이라는 우주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대신 우리는 잠시라도 이어질 수 있다. 서로를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가 끝없이 서로의 영역을 탐험하며 삶에 대해 깨달아간다. 그 과정에 의미가 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타인의 보이지 않는 아픔까지 알아서 찾아내는 비상한 눈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상 속 자세일 것이다.

어떤 아픔에는 이름도 없기에, 이를 굳이 '장애 감수성'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아픔을 섣부른 판단으로 재단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상상해 보자. 나의 있는 그대로를 궁금해하고 나의 취약함을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속에서 사는 삶. 살 맛이 난다. 사실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정든 병'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 않나.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