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30 22:12최종 업데이트 21.07.30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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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기반이 취약했던 해방 직후의 김일성은 그 자신의 역량과 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어 신속히 기반을 구축했다. 그가 이 과정에서 항일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제쳤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제쳤다고 알려진 또 다른 인물에 관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항일 공산주의자 현준혁이 바로 그다. 해방 직후 38도선 이북에서 가장 유력한 민족주의자는 조만식이고, 가장 유력한 공산주의자는 현준혁이었다. 그 현준혁도 김일성과의 대결 구도를 버텨내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다.

항일 공산주의자 현준혁

현준혁과 김일성은 여섯 살 차이다. 나이 차이는 크지 않지만,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 1906년 5월 13일 생인 현준혁은 조선시대 혹은 대한제국시대 사람이고,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날인 1912년 4월 15일 생인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사람이다.


현준혁은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인생 자체가 극적이었다. 평안남도 개천군의 빈농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고학으로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까지 진학했다. 경성제대를 마치고 대구사범학교 교사가 된 것은 만 23세 때인 1929년이다.

빈농 자녀가 식민지 한국의 유일한 대학을 졸업하고 사범학교 교사가 됐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입지전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일본을 잡겠다는 더 큰 목표를 세웠다. 제국주의를 잡기 위해 그는 반(反)제국주의인 공산주의를 도구 삼아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겉으로는 사범학교 교사이지만 실제로는 항일 투사였다. 이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일제의 만주사변(1931년) 도발로 인해 식민지 조선 학생들의 반전운동이 활발하던 1932년이다. 경찰이 대구 지역 학생들의 반전 삐라 살포를 보안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수사하던 중에, 현준혁이라는 사범학교 교유(敎諭)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32년 2월 20일자 <조선일보> 기사 '대구사범 교유가 학생과 (함께) 공산운동'은 이렇게 보도했다.
 
현준혁이가 대구사범학교 교유로 잇스면서 사범학교 학생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고취하야 학생들은 다시 대구 내의 엇더케 비밀결사와 연락을 매저가지고 이래(그 이래로) 활동을 하여온 사건이라고 한다. 그러고 전긔(前記, 앞에 적힌) 현준혁 씨는 개천 출생으로 일즉이 시내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교육과를 재작년(3년 전의 오기)에 졸업하고 곳(곧바로) 대구사범학교에 부임하여 이래 그곳서 교육학 등을 담당 교수하여 온 금년 삼십 세 가량 되는 청년이라 한다.

아직 26세인데 30세가량으로 보도된 그는 이 사건으로 학교를 휴직했다. 그해 12월 대구지방법원은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학교 무대를 잃은 그는 농민조합을 무대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조선의 레닌' 박헌영이 체포된 이후로 와해와 재건을 반복하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운동에도 가담했다. 그런 뒤 재차 체포돼 1936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98년 1월 24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현준혁 관련 기사 ⓒ 조선일보PDF

 
해방 직후 이북 최초의 정치 테러로 사망

해방이 되자마자 새로운 과제가 떨어졌다. '조선의 레닌' 박헌영이 평안남도 조직 활동을 지시한 것이다. 2013년 <역사연구> 제25호에 실린 역사학자 연정은의 논문 '해방 직후 북한 내 반동분자 등장과 그 인식의 변화'에 따르면, 현준혁이 경성역을 출발한 날은 1945년 8월 17일이고 평양에서 활동을 개시한 날은 18일이다.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별도 조직을 꾸리기 위한 공산주의 진영의 활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38도선 이북의 정치 중심지인 평양을 무대로 해방 직후에 두각을 보인 양대 조직이 있다. 하나는 조만식의 건준 평안남도지부(평남 건준)이고, 하나는 현준혁의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평남 조공)다.

우위를 점한 쪽은 기독교·우파·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평남 건준이다. 친일적 인물들도 끼어 있었던 이 그룹은 조만식의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결집돼 있었다. 이에 비해 평남 조공은 조직 규모 면에서 상대적으로 왜소했다. 그래서 출발 당시 현준혁의 위상은 조만식보다 훨씬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 점령군의 방침에 따라 두 조직이 대등한 지분을 갖고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로 통합된 데 이어, 조만식 그룹 내의 친일적 인물들과 반공산주의 인물들이 도태되거나 월남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양쪽의 위상 격차는 빠른 시간 내에 상당부분 해소됐다.

형식상으로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북'인민정치위원회였다. 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기는 했지만, 그 기구 안에서 조공 그룹과 현준혁은 위상을 넓혀 나갔다. 이 일이 불과 2주 만에 벌어졌으므로 현준혁의 역량은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 발휘는 거기서 갑자기 '멈춤'을 한다. 그해 10월이 되기 전에 그는 39세로 인생을 마친다.

그해 9월, 현준혁은 조만식과 함께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를 만난 뒤 승용차를 함께 타고 돌아갔다. 장규식 중앙대 교수의 <민중과 함께한 조선의 간디, 조만식의 민족운동>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자동차가 출발해 200미터쯤 갔을 때 누군가가 차를 세우더니 차창 안으로 총알 2발을 발사했다. 두 발 다 현준혁을 겨냥했다. 해방 직후 이북에서 최초의 정치 테러가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충격적인 이 사건으로 인해 그 당시에는 극우파 쪽으로 이목이 쏠렸다. 역사저술가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은 "그의 공산당 활동에 불만을 품은 극우 청년들의 행위로 추정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 뒤 남한에서는 이 사건이 김일성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는 김일성의 이미지를 한층 더 악화시키는 동시에, 조만식만큼은 아닐지라도 현준혁 역시 김일성의 경쟁자 이미지를 갖게 되는 원인이 됐다.

그런 인식을 반영하는 글 중 하나가 1977년 <북한> 제64호에 실린 '북한의 반체제운동 30년사 1: 현준혁 암살과 백색 테러'다. 소설식으로 구성된 이 글은 1945년 9월 19일 귀국한 김일성에게 곤혹스러운 존재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로서 평양에서 먼저 기반을 잡은 현준혁이었으며, 현준혁이 경성제국대학 출신이라는 점 등이 해외파 공산주의자 김일성의 경쟁심을 더욱 더 자극했다고 말한다. 그것이 현준혁 암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김일성이 조만식뿐 아니라 현준혁과도 대결했다는 이미지가 남한에서 조성됐지만, 이는 실상은 허구에 가까운 낭설이었다.

정말 김일성이 죽였나

현준혁이 암살된 날은 9월 3일 혹은 그 무렵이다. 1992년 5월호 <역사비평>에 실린 이종석 당시 경희대 강사의 기고문 '현준혁은 김일성이 죽였나?' 등에 설명된 바와 같이, 평양에 있는 현준혁 묘소에 1945년 9월 3일 사망했다고 표기돼 있는 점, 당시 경찰서장으로 수사에 관여했다가 월남한 유기선이 '9월 초에 암살됐다'고 남한 언론에 밝힌 점, 현준혁이 죽은 다음날 신문에 추도사를 쓴 안지홍이 사건 발생일을 9월 초로 증언한 점 등이 그 근거다.

암살이 9월 초에 발생했다면, 9월 19일 귀국한 김일성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해외에서도 암살을 사주할 수는 있지만, 9월 초순에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면담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이 시점의 김일성은 스탈린의 신임을 확보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9월 초에 암살당했다는 사실이 김일성 범행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이들이 쓴 글에는 암살 날짜가 김일성 귀국 이후인 9월 28일로 적혀 있다.

월남인들의 증언에 의해 9월 28일설이 나오게 됐지만, 위의 연정은 논문은 "사건 발생 후 15년 이상 지난 후에 (증언이) 기록되었다는 점, 증언자 모두 남하 후 기록한 점, 기록 자체가 지나치게 김일성의 북한 내 권력장악 과정을 입증하는 서술 방식으로 되었다는 점, 증언 자체의 사실성 논란 등을 고려했을 때, 현준혁 암살 사건은 1945년 9월 3일 발생한 사건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한다.

현준혁이 김일성 귀국 이전에 암살된 게 거의 확실하다는 점은 김일성이 현준혁에게 경쟁심을 느껴 암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매우 불확실함을 알려준다. 이는 현준혁과 김일성의 경쟁 구도 역시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게 만든다.

해방 직후 평양으로 파견된 현준혁이 단시간 내에 평남 조선공산당과 자신의 위상을 높이면서 조만식과 제휴 관계를 구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김일성과 대립할 기회가 없었다. 김일성이 북한 땅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는 유력한 가설 중 하나로 남아 있는 현준혁과 김일성의 경쟁 구도 역시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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