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9.09 19:15최종 업데이트 21.09.09 19:15
  • 본문듣기
8월 23일, 저녁 설거지를 하는데 온수가 이상했다. 미적지근해졌다 싶었는데 곧 찬물만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가 없었기에 설마하며 물탱크가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눅눅해진 나무문을 밀어젖히니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쓰러진 자전거, 부유하는 청소용품, 스티로폼, 페인트통. 역류해 들어온 시커먼 물속에서 물탱크와 보일러가 머리를 내놓고 있다. 허리케인 헨리(Henry)가 지하실을 수영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 밤새 물을 퍼내고 선풍기를 돌려 지하실을 말려야 했다. 나흘 만에 온 배관공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물에 잠겨버린 집 지하 ⓒ 최현정

 
"루이지애나에 상륙한 허리케인 아이다(Ida)는 열대성 저기압으로 약화돼 약간의 비를 뿌리며 동부지역을 빠져나갈 것입니다."

9월 1일 아침, 분명 이런 일기예보를 들었다. 그런데 물탱크 수리 후 사흘도 되지 않아 지하실이 또 잠겼다. 보일러와 물탱크와 기껏 말려놓은 물건들이 다시 침수됐다. 일주일 전보다 더 심하다. 대목 맞은 배관공과 수차례 통화를 시도하며 9월을 심란하게 시작해야 했다. 
 

허리케인 아이다 미국 뉴욕 강타 ⓒ 연합뉴스/EPA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폭우

"난 소리쳤어요. 저스틴, 나 물에 빠졌어. 구해줘 빨리.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1일 밤, 뉴욕 퀸스에 사는 리베라는 비가 거세지자 걱정이 돼 지하방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지하실에 발을 디딘 순간 단 몇 초 만에 빗물이 천장까지 차 올랐다. 위층으로 올라갈 방법이 없어진 리베라는 천장에 달린 창문을 열고 아들을 불렀다. 시각장애인인 아들은 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와 엄마를 창문 밖으로 끌어냈다. 그녀의 온몸은 멍들고 천장까지 물이 들이친 지하는 엉망이 됐지만 그녀는 살았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는 용감한 아들을 영웅이라고 자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모두가 리베라같이 운이 좋진 않았다. 

같은 날 퀸스 우드사이드에 살던 토레스씨 일가족 3명은 사망했다. 2살 아기도 함께였다. 가족이 머물던 지하방에 갑자기 물이 들이닥쳤고, 빠져나갈 틈도 없이 변을 당한 것이다. 같은 지역에 살던 달린씨는 아파트 철창과 유리문 사이에서 숨졌다. 쏟아진 급류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손 쓸 새 없이 변을 당했다. 사망자 중엔 엄마와 아들도 있고 80대 독거노인도 있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요. 마치 폭포수처럼 물이 들이차고 있었어요." 
"어떤 대비도 할 수 없었어요. 여기에 오래 살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곤 짐작조차 못했습니다." 


이상은 <뉴욕타임스> 등 언론에 소개된 사연들이다. 뉴욕 퀸스 사망자 13명 중 11명이 지하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목숨을 잃었고, 뉴저지 주 엘리자베스에선 일가족 포함 4명의 주민이 2.4m 물이 범람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사망했다. 서머싯 카운티 주민 4명 등 뉴저지에서만도 23명이 숨졌다. ​

필라델피아에서 코네티컷에 이르는 북동부 지역에 150-200mm의 비를 뿌린 열대성 저기압 아이다는 1주일 전 이곳을 훑었던 허리케인 헨리의 기록을 깼다. 맨해튼은 시간당 80mm의 폭우가 쏟아져 기상 관측 이래 최대 강수량을 기록했다. 뉴욕 뉴저지 부근 4개 주 약 17만 명의 가정은 전기가 나갔다.

9월 8일 현재, 아이다로 인한 동부지역 사망자 수는 46명이다. 이는 여전히 찾지 못한 6명의 뉴저지 실종자를 제외한 숫자다. 
 

허리케인 아이다가 동반한 기록적인 폭우로 홍수가 발생한 미국 뉴저지주 맨빌의 주택가에서 주민들이 카누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하에 살고 있는 ​뉴요커 10만 명

9월 2일 ​<뉴욕타임스>는 퀸스 지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배달기사인 올리비아 크루즈는 사촌에게 지하방을 소개받았다. 그는 그곳이 불법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건설 일을 하는 리카르도 그라시아는 친구에게 소개받아 이곳에 왔다. 방값으로 한 달에 500달러를 지불한다. 그들과 함께 살았던 로베르토 브라보는 페인트공이다. 브라보는 1년 전부터 창문 없는 지하방에서 살았는데 지난 수요일 쏟아져 들어온 물에 방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숨졌다. 그는 에콰도르에서 군인이었다. 이웃이 들은 그의 마지막 말은 "아유다 메(도와줘요)"였다. 
​ ​
​취약한 환경에서 사는 이들에게 화재나 일산화탄소 중독은 전보다 덜 위협적이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저지대 주택들은 더 위험해졌다. 폭우로 인한 물 벽이 탈출 수단을 막게 되는 이번과 같은 경우다.

​뉴욕시 규정에 따르면,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지하실의 높이는 ​182-213cm 이상이어야 하고 천장과 창문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2011년부터 현재까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하실의 불법 전환에 대한 신고가 뉴욕시에서만 15만 7천 건에 달한다. 이들 신고의 절반 이상이 이번에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퀸스 지역이다. 신고 주택의 59%는 조사관들이 접근하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고 한다. 세입자와 주인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강제 조사권이 없어 자연스레 종결되었던 것.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도시 전체에 5만 채의 불법 지하 아파트가 있을 수 있으며 이곳에 1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고 예상한다. 부수입을 얻으려는 집주인과 싼 주거지가 필요한 세입자의 수요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주택시장인 뉴욕에 10만의 지하 거주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 다수는 불법 이민자들로 뉴욕 곳곳의 식당과 호텔,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제 우린 지하에 살고 있는 취약한 이들을 위해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재해가 닥쳤을 때, 취약한 이들이 날씨나 속보에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9월 3일, 뉴욕시장은 브리핑을 통해 지하에 사는 이들을 안전하게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지만 그의 임기는 4개월이 채 남지 않은 상태다.  
 

9월 2일자<뉴욕타임스>는 퀸스 지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 뉴욕타임스 캡처

 
​Banjiha
 
한국의 수도 서울엔 수천 명이 사는 반지하(Banjiha)라는 곳이 있습니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고 비좁은 곳입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방 안을 훔쳐볼 수도 있고, 여름엔 습기, 더위와 싸워야 합니다.

작년 2월 영화 <기생충> 속 반지하를 소개한 BBC의 기사는 2021년 9월 뉴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의 뉴욕엔 10만 명이 사는 베이스먼트라는 곳이 있습니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고 비좁은 곳입니다. 여름엔 습기, 더위와 함께 언제든 물이 들이쳐 익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영화 <기생충>은 지금 여기 뉴욕의 이야기였다 싶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