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18 06:01최종 업데이트 21.10.18 06:01
  • 본문듣기
9월말로 몇 개월간 지속되었던 긴급 사태가 해제된 후 가벼운 술자리를 몇 번 가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일본인 지인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나이가 지긋한 분들과는 막 출범한 기시다 내각과 고노 다로에 대한 아쉬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아베 전 총리에 대한 이야기 등 정치 이야기가 주요 화젯거리였지만 젊은 친구들은 <오징어 게임> 이야기만 한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일본 넷플릭스에서도 <오징어 게임>이 9월 17일 공개 이래 금세 1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드라마가 넷플릭스 재팬에서 종합 1위를 기록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사랑의 불시착>이 근 6개월간 1위 자리를 지켰고, 그 외에도 심심찮게 1위를 기록하는 한국산 드라마들, 이를테면 <이태원 클라쓰><스위트홈> 등이 나왔다. 게다가 코로나 시국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을수록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를 접할 기회는 늘어난다. 아무 거나 틀어도 평타 이상의 완성도와 작품성을 보여주는 한국드라마는, 상대적으로 유치한 일본드라마들에 비해 인기를 끌 수밖에 없다.
 

영화 <오징어 게임> 포스터. ⓒ 넷플릭스

 
일본 영상 콘텐츠 시장 점령

현재 넷플릭스 재팬 종합랭킹을 보면 <오징어 게임>(1위), <갯마을 차차차>(3위), <연모>(4위), <그녀의 사생활>(6위) 등 베스트10에 네 편의 한국드라마가 올라와 있다. 재밌는 건 한국드라마를 제외한 나머지 톱10 콘텐츠들이 <귀멸의 칼날> 같은 애니메이션이란 점이다. 한국드라마가 일본 영상 콘텐츠 시장을 점령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 20여 년 전 <겨울연가>의 빅히트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드라마는 일본 방송국의 효자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재특회 및 극우세력의 혐한시위가 본격화되던 2012년 이후 아침 와이드쇼 프로그램에서 한국을 난도질하듯 비판한 후 바로 속칭 히루도라(昼ドラ)라 불리는 오전 드라마타임 대에 한국드라마를 편성하던 민영방송국들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이해가 안 돼 일본 방송국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한국드라마는 시청률이 나오거든"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당시 한국드라마의 시청률은 지속적으로 3-4%대를 기록했다.

별 것 아닌 시청률 같지만 일본은 민방 종합 채널이 5개(전국지상파 4곳과 로컬 1곳. 도쿄의 경우 TV도쿄)나 있다. 게다가 사용자들이 유튜브 등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으로 점점 이동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3-4%의 시청률은 준수한 수치라 할 수 있다. <겨울연가> 이후 20여 년간 이래 왔으니 이미 한국드라마는 일본시장에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는 문화의 한 장르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넷플릭스 재팬의 한국드라마 인기도 당연해진다. 플랫폼이 TV에서 넷플릭스 같은 OTT로 이동했을 뿐이니까. 즉 <사랑의 불시착>, <오징어 게임>의 장기독주 체제는 이미 튼튼하게 갖춰져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콘텐츠에 관한 일본 언론의 반응이 극과 극이다.
 

tvN <사랑의 불시착> 한 장면. ⓒ tvN

 
<사랑의 불시착>과 <오징어 게임>, 극과 극

<사랑의 불시착>이 히트 쳤을 땐 일본 언론에서 연일 그 현상을 다뤘다. 심지어 모테기 외무상은 작년 8월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때에도 "나도 밤새워서 다 봤다. 발상도 신선했고 북한 주민들의 생활풍경, 인간상을 제대로 구현한 러브코미디였다"라며 찬사를 늘어놔 화제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오징어 게임>은 주요 언론에선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만화 <신이 말하는 대로>와 <카이지>< GANTZ >, 그리고 영화 <배틀로얄>를 표절했다고 깎아내리는 비판이 간혹 눈에 띈다.

JB프레스 칼럼니스트 하타 마요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은 '신이 말하는 대로'와 똑같고 드라마 전체의 구성은 목숨 걸고 상금을 획득하는 '카이지'와 비슷하다, 게임 참가자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모습은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배틀로얄을 떠올리게 했다"며 "표절이라 지적받아도 어쩔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만나 본 일본 젊은 층, 그리고 트위터 등의 반응을 보면 표절 비판보다 극찬이 더 많다. 이들에겐 공통적으로 데스게임(생존게임) 장르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돼 있다. 하긴 장르를 이해한다면 표절 의혹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진다. 좀비 장르가 있듯 데스게임 장르도 있다. 설계자가 깔아둔 판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자를 죽여야 하는 플롯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 왔다. <오징어 게임>이 히트 친 이유는 이러한 장르 안에서 스토리를 끌어나가는 플롯이 엄청난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번 칼럼을 쓰기 위해 수많은 일본어 트윗과 커뮤니티를 훑어봤는데, 이들은 2화와 6화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중 구슬 게임 장면 ⓒ 넷플릭스

 
게임이 진행되는 공간 안에 계속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풀어준 후 등장인물들에게 선택권을 맡기는 설정(2화)과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구축된 인간관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게 만드는 구슬치기 게임(6화)은 일본 드라마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한국 드라마의 진면목이란 평이 자자하다. 또한 한국 배우들의 연기력을 극찬하는 코멘트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트위터에선 <오징어 게임>에 출연한 각 배우 개개인의 이름에 해시태그를 달아 그 배우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유행도 불고 있다.

일본의 유명 방송 시나리오 작가인 스즈키 오사무 역시 아에라에 기고한 칼럼에서 "비슷한 부분이 아예 없다곤 할 수 없지만, 그런 거야 장르가 그러니까 당연한 것"이라 전제한 후 "이야기가 진행되면 그런 생각 따위 하나도 안 들 거고, 무엇보다 배우들 연기가 너무 엄청나서 몰입할 수밖에 없다. 특히 6화 보면서 펑펑 울었다"라며 솔직한 감상을 전했다.

그러고 보면 '전문가' 스즈키 오사무의 이 칼럼이 실리기 전 일본에서는 <오징어 게임>의 흥행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도 많았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표절 의혹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온라인 매체를 통해 <오징어 게임>의 상찬과 넷플릭스의 한국 사랑이 눈에 띈다.

주류언론은 침묵, 인터넷은 열광
 
"히트작과 제작비가 반드시 비례하진 않지만 회당 제작비에 투입하는 예산규모를 보면 한국이 일본보다 월등하게 앞선다. 가령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을 대표하는 <킹덤>은 1화당 1억 9천만 엔의 제작비가 들었다. 반면 넷플릭스 일본 오리지널을 대표하는 <전라감독>은 회당 5천만 엔으로 만들어졌다. 유료회원 수는 2020년 말 현재 한국이 380만 명, 일본이 500만 명이다. 일본이 회원 수는 더 많지만 최근 3년간의 성장세 및 이익률을 보면 한국이 압도적이다. 넷플릭스 사란도스 대표는 '한국 작품이 글로벌 엔터테인먼트의 트렌드로 정착중'이라며 한국영상업계에 계속적으로 투자할 것이라 밝혔다."(와이어드 일본판, 2021년 8월 15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뿐만 아니라 한국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스토리의 템포가 좋다. 트윗에서 항상 접하는 감상 멘션은 '한 번에 다 봄', '멈출 수가 없어서 완주함'이다. 보는 사람을 쉬게 만들지 않는다. 극도의 몰입감을 선사하고 결말은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만 일단 다음 편은 무조건 보게끔 만든다. <오징어 게임>은 특히 다양한 사회적 해석을 품고 있다. 스토리는 매우 심플하지만 고찰마니아(考察マニア)들은 지금도 <오징어 게임>을 놓고 논쟁중이다. 복선과 상징을 찾기 위해 다시 보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세계적 히트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다이아몬드 온라인, 2021년 10월 8일)
"<오징어 게임>은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데스게임 장르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들어버린 장대한 인간드라마로 이 장르의 결정판이 되었다. 앞으로 나올 작품들에 하나의 기준이 될 것이며, 그것들은 매번 <오징어 게임>과 비교당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 크리에이터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불행이 아니다. 영상 분야에 있어 이 장르가 국경과 언어의 벽을 넘어 세계적으로 먹힐 수 있다는 엄청난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데스게임 장르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징어 게임> 신드롬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흥분을 선사하고 있다.(리얼사운드, 2021년 10월 12일)

이와 같은 인터넷 상의 극찬과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일본 주요언론들은 <오징어 게임>에 대해선 별로 보도하고 있지 않다. 원래 그런가보다 생각하면 그뿐이지만 이들이 <사랑의 불시착>에 보여줬던 애정(?)에 비한다면 너무 극과 극을 달린다.

스스로가 데스게임 장르의 발원국이라 믿고 있는 자존심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세계적 현상에는 항상 민감한 일본언론, 특히 한국에 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들도 사사건건 꼬치꼬치 다루던 방송언론이 너무 조용한 것 같아 솔직히 좀 낯설기도 하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