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22 19:36최종 업데이트 22.01.22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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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찬바람에 손끝이 아린 걸 보니 제대로 겨울 한복판에 들어섰습니다. 지구가 점점 뜨거워져 큰일이란 말이 와닿지 않을 만큼 공기가 냉랭합니다. 추우면 옷을 껴입으면 되지만 더운 날 벗는 덴 한계가 있으니 차라리 겨울이 낫다는 사람도 있고, 더운 건 그래도 버틸 만한데 난 도저히 추위는 못 참겠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폭염과 혹한 둘 다 재해에 가까운 기상이변이라, 어느 쪽이 더 가혹하다 말하기 힘듭니다. 지구 온난화가 갈수록 심해져 추위보다 더위의 고통지수가 더 높다고도 하지만, 겨울은 그 자체로 시련의 계절입니다.


더는 듣기도 힘든 구공탄(九孔炭)이란 말은 연탄을 뜻합니다. 말 그대로 탄에 뚫려 있는 구멍의 개수가 9개란 뜻입니다. 초창기 9개였던 구멍의 수가 19개, 22개를 거쳐 현재는 25개 뚫려 있으니, 엄밀히 보면 현재 쓰이는 연탄은 이십오공탄(二十五孔炭)인 셈입니다.

탄에 구멍을 많이 뚫을수록 공기가 잘 통해 화력은 높아지지만, 상대적으로 빨리 타버립니다. 또 구멍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적절한 압력으로 누르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지나치게 센 힘을 가하면 성형되는 과정에서 터지기 쉽고, 또 너무 약하게 눌러 만들면 이동 중 살짝만 닿아도 연탄 끄트머리가 깨지고 맙니다. 밀도가 낮아지면 그에 비례해 내구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구멍의 개수를 점차적으로 늘여 탄의 화력은 높이되, 잠들 무렵부터 새벽녘까지 열기가 지속돼야 합니다. 그러니 연탄 한 장에 뚫린 25개의 구멍은 과학이고 전략입니다. 화력과 지속시간, 그리고 내구성과의 상호 절충점을 찾은 셈입니다.

'트위스비(Twsbi)'는 자타공인 대만을 대표하는 만년필 브랜드입니다. 초창기 플라스틱 장난감 부속을 생산하던 글로벌 OEM 업체가, 50년 세월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것 없다는 옛말이 있지만, 항상 맞는 말은 아닙니다. 잘 되는 집엔 사람이 줄을 서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만을 대표하는 만년필 브랜드, 트위스비
    

데몬펜이란 틈새전략으로 나름의 입지를 굳힌 트위스비(Twsbi) ⓒ 김덕래

   
만년필 제조사마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핵심 모델이 있습니다. 파카가 듀오폴드를 얼굴로 하고, 워터맨이 엑스퍼트를 내세우는 것처럼, 트위스비의 대표 라인은 바로 '다이아몬드(Diamond)' 580 입니다.

이름처럼 배럴 외형을 무수히 각지게 깎아 기능적인 장점과 시각적인 아름다움 두 가지 요소를 다 잡았습니다. 매끈해 보이지만 각이 져 있어 책상 위에서 굴려도 몇 바퀴 구르다 멈춥니다. 또 어떤 컬러의 잉크를 채우느냐에 따라 마치 다른 펜처럼 변모합니다.
  

트위스비 다이아몬드 580 스모크 로즈골드 M촉 ⓒ 김덕래

   
노포(老鋪)의 정취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음식점은 일단 위생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또 조명도 적당해야 음식을 먹기 전 식욕이 돋습니다. 예외적인 모델도 있지만, 트위스비의 주축이 되는 만년필들은 모두 속이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데몬펜 계열입니다. 딱 한두 자루 갖고 있는 만년필이 투명한 경우는 드물지만, 여러 자루 들이다 보면 그중 적어도 한 자루쯤은 데몬펜이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옷장에 똑같은 단색 셔츠만 걸려 있는 것만큼 지루한 게 또 있으려고요.

또 잘 되는 가게는 친절해야 합니다. 차진 욕이 정겨워 간다는 욕쟁이 할머니네도 있지만, 그것도 연륜과 내공이 있는 이의 입에서 나와야 통하는 얘기입니다. 어설프게 흉내내다간 금세 어처구니없는 가게란 소문이 퍼져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트위스비는 펜촉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으로 사용자의 선택폭을 넓혔습니다. 대부분의 만년필 브랜드는 펜촉을 몇 종류만 제한적으로 생산합니다.

가장 표준인 F촉을 기준으로, 조금 가늘게 나오는 EF촉과, 약간 굵게 나오는 M촉 정도에서 타협을 봅니다. 그런데 트위스비는 기본이 되는 촉들은 물론, B촉을 넘어 캘리촉에 해당하는 1.1mm, 1.5mm 촉까지 생산합니다. 만년필계 강자 중 하나인 독일 라미(Lamy)의 사파리 같은 모델이나, 캘리용으로 알려진 로트링(Rotring)의 아트펜 정도를 제외하면 보기 드문 케이스입니다.

손님이 줄 서는 집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 맛일 것입니다. 제아무리 가게가 번듯하고 주인이 웃는 낯이더라도, 시각적으로 먹음직스럽지 않고 또 음식의 맛이 평범하면 줄을 설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는 맛이더라도, 값이 너무 비싸면 한끼 식사로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니 눈으로도 만족스럽고 입도 즐겁되, 가격대도 합리적이어야 즐겨 찾는 단골집이 됩니다. 트위스비는 신뢰할 수 있는 'JoWo'의 닙을 장착했고, 동급에선 보기 드문 충전 메커니즘을 채용했습니다. 피스톤 필러는 한번에 많은 양을 충전할 수 있어 필기량 많은 사용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입니다.

또 트위스비는 충전 메커니즘 분해툴과 뻑뻑해진 피스톤을 부드럽게 해주는 실리콘 그리스를 제공합니다. 피스톤 필러를 채용한 모든 만년필은 구조적인 이유로, 오래 쓰다 보면 피스톤이 뻑뻑해집니다. 사용자가 펜을 험히 사용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니, 내가 잘못 관리했다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메커니즘 자체의 특성일 뿐입니다.

분해툴을 홈에 맞춘 상태에서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풀리고, 반대로 돌리면 잠깁니다. 펠리칸 M시리즈의 방식과 같습니다.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야 풀리는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라인과는 반대인 셈입니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툴을 활용해 메커니즘을 분해했다 재조립하는 과정 ⓒ 김덕래

 
피스톤 메커니즘을 분해 후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곤란을 겪는 사용자들이 있습니다. 작은 전자기기 하나를 분해했다 재조립해도 나사 한두 개가 꼭 남곤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여느 필기구와는 달리 만년필은 제법 까다롭습니다. 빠뜨린 것 없이 다 제자리에 맞춰 꽂아도 부속 간의 간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컨디션이 달라집니다.

바벨과 덤벨을 들어올리는 동작은 신체 근력을 늘리는데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근력량이 과하게 증가하면 스피드가 떨어집니다. 마라토너 중 보디빌더처럼 근육이 두툼하게 잡힌 선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만년필도 같습니다. 잉크를 최대한 많이 충전하기 위해 메커니즘을 무리하게 세팅하면 노브가 헛돌거나, 정상적인 체결이 안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 안전 위주로 조립하면 메커니즘은 무리 없이 작동하나 채울 수 있는 잉크의 양이 줄어듭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균형인 셈입니다. 메커니즘이 잘 작동되면서도 채울 수 있는 잉크의 양은 손해보지 않는 상태가 이상적입니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용지도(中庸之道)는 만년필 한 자루에도 녹아 있습니다. 
 

같은 펜이지만 부속 간의 간격을 조정하는 것에 따라 잉크 충전량이 달라짐 ⓒ 김덕래

 
만년필은 촉 크기가 같더라도, 동서양의 풍과 제조 회사 각자의 기준에 따라 굵기가 서로 다릅니다. 트위스비의 M촉은 몽블랑, 펠리칸과 같은 독일 브랜드보다는 다소 가늘게 나오지만, 파이롯트나 세일러와 같은 일본 브랜드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미묘하게 굵습니다. 게다가 만년필이란 도구는 어떤 필기구에서도 볼 수 없는 개체 차이라는 변수가 있으니, 볼수록 꽤 성가신 점이 있습니다. 
 

좌 - 세일러 프로기어 쿠보 사쿠라 21K M촉, 우 - 트위스비 다이아몬드 580 스모크 로즈골드 M촉 ⓒ 김덕래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만년필 수리는 손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익숙해지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합니다. 밤을 새고 해가 뜰 때까지 시간을 쏟아도 해결이 안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또 손톱 끝이 패이다 갈라지는 상황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 없이 뚝딱 휘어진 펜촉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도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는 날씨입니다. 이른 새벽부터 사위가 어둠에 잠길 때까지, 사방이 냉기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선택받는 게 있으면 그 반대의 것도 있을 수밖에요. 또 상황은 수시로 바뀌니 완벽한 갑도, 영원한 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회사에서 상품을 팔 땐 판매자의 입장이지만, 퇴근길 마트에 들러 무언가를 살 땐 구매자가 되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만년필 한 자루도 선택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가 녹록지 않았다면, 나를 어필할 수 있는 무언가를 또 만들어내면 됩니다.

같은 겨울이라지만 다 조금씩 다릅니다. 초겨울에서 시작해 한겨울을 거친 다음에야 늦겨울에 이르릅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계절이 바뀝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요즘이니 가히 한겨울이랄 만한 혹한의 나날입니다. 이 고비를 넘기더라도 끝이 아닙니다. 더디게 흘러 더 서늘한 늦겨울이 버티고 있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어쩌면 삶이 공정해야 한다는 믿음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일지도요. 불평등에서부터 시작해도 좋다, 이렇게 마음 먹으면 어쩐지 주먹이 불끈 쥐어집니다.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으려고요.

하다못해 몇 만 원 안 하는 만년필 한 자루에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나름의 전략이 삼중 사중으로 있습니다. 그걸로 부족하다 싶으면 오중 육중으로 겹을 더 두를 게 자명합니다. 그러니 포기하기엔 아직 너무 이릅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닙니다.
  

실용성으로 무장한 트위스비의 만년필들 ⓒ 김덕래

    
* 트위스비(Twsbi) - 대만의 만년필 제조사.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에 피스톤 필러가 채용된 만년필을 써볼수 있고, 타 업체와 달리 만년필 관리용 툴을 제공하는 차별화 전략 구사. 대부분 만년필 제조사에선 비주류인 데몬펜을 주력화해 틈새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영리한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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