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29 06:02최종 업데이트 22.03.2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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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군인과 소방관들이 14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파괴된 건물을 수색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이 초기 예상과 달리 장기전의 조짐을 보인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양측의 협상이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현재로서는 낙관도 비관도 어렵다. 협상 의제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반면 해결 방법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협상에 임하는 두 나라 모두 수십 년간 협상 과정을 경험하면서 잘 알게 된 사실이다.

90년대 초 유럽을 동서로 나누던 장벽이 갑자기 붕괴된 후, 안보 공백을 우려한 유럽 국가들과 미국, 러시아는 수년간 대화와 협상을 이어갔다. 냉전 종식이 인류의 영구적 평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도 가졌던 당시였다. 하지만 국가마다 현안과 비전은 달랐고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는 너무나 컸다. 그렇게 미결의 협상들이 낳은 결과가 결국 현재의 전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토

그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바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처리 문제였다. 잘 알려진 대로 나토는 2차 대전 직후 소련의 팽창주의에 위협을 느낀 서방 국가들이 1949년 창설한 기구다. 창설 당시 12개국으로 시작, 소련이 해체되던 1991년 말에는 15개 회원국을 보유했으며 현재는 30개국이 가입돼 있다.


명칭이 말하듯 지리적 제한이 있는 이 동맹은 회원국의 총 군사지출비가 전 세계의 70%를 차지한다. 집단 군사 동맹 체제인 나토의 조약 내용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항목이 5조. 회원국 가운데 하나가 외부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을 경우 이를 동맹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 전체 또는 일부 회원국이 피습 동맹국을 지원하도록 규정하는 항목이다.

이런 집단 방어 원칙의 특성상 정치, 외교, 안보가 불안정한 위치에 있는 국가의 경우 가입이 쉽지만은 않다. 우크라이나를 포함 몇몇 동유럽 국가들이 수년 전부터 가입을 타진하고 있음에도 진척이 더딘 이유 가운데 하나다. 더구나 회원국 간 분쟁이 발생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2020년 프랑스-터키 갈등이 나토 내부 분쟁 가운데 가장 최근 발생한 경우다. 당시 군함 대치 상황까지 가자 나토는 회원국 간 분쟁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보다 앞서 이미 프랑스는 1966년 미국과 핵무기 보유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독자노선을 위해 나토를 탈퇴했다가 2009년 재가입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나토의 존재 이유와 당위성이 도마에 오르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유럽의 미래와 관계된 문제. 내전을 제외하면 80여년 만에 유럽 대륙을 활보하는 군홧발을 보는 유럽인들은 어느 때보다 안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에는 나토 비회원국도 많다.

냉전의 산물인 나토에는 중립국을 표방하는 스웨덴, 핀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등이 가입되어 있지 않다. 유럽의 작은 섬나라 몰타, 키프로스도 나토 회원국이 아니다. 물론 이들 가운데 일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나토 가입 여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토 회원국 ⓒ 위키커먼스

 
흔들리는 당위성

그러나 4년간 트럼프의 미국을 경험한 유럽인들은 그들의 미래를 미국 중심의 나토 연합군에 내맡기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일성으로 '미국이 돌아왔다'고 외쳤지만 트럼프주의는 여전히 미국 현실 정치에 존재한다. 때마침 유럽군 창설에 적극적인 프랑스의 목소리에 이들 나토 비회원국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다.

유럽연합(EU)도 본격적으로 회원국 가운데 나토 비회원국인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 몰타, 아일랜드의 안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실제 이 나라들 가운데 다수는 나토보다 유럽군 창설이 더 자국의 안전 보장에 현실성이 있다고 본다. 나토의 존재 이유가 점점 당위성을 잃고 있는 첫 번째 이유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나토의 존재가 도마에 오른 두 번째 이유는 유럽의 과거와 관련된다. 동유럽이 소련의 영향권에서 서서히 벗어날 무렵, 미국과 유럽, 러시아는 나토의 역할과 범위를 둘러싸고 긴 협상에 돌입했다.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있었던 미국과 소련의 암약.

독일의 통일이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당시 소련은 구 동독 땅에 나토 연합군이 진출하는 것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1990년 2월 9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미국의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고르바초프 주석(한 달 후 대통령 취임)에게 독일에 미군이 들어가도 나토 관할권은 동쪽으로는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고 안심시킨다.

이것이 그 유명한 '1인치' 발언. 훗날 고르바초프는 베이커 장관으로부터 1인치라는 말을 세 번 들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어떠한 문서도 작성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5년 러시아의 전 외무장관 프리마코프는 '서방 지도자들의 확약이 조약이나 법적 형식으로 구체화되지 않은 것에 유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옌스 스톨텐베르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이 지난 25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 나토 본부에서 열린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나토 영상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이처럼 미국의 부시(J.W) 행정부는 나토 무용론 또는 대안적 기구 제안을 물리치고 '나토의 확장' 방침을 굳힌 채 바통을 클린턴 정부로 넘기게 된다. 클린턴 집권 초기 미국 민주당 내부에서는 나토의 점진적 확장론 또는 나토 대안론이 급진적 확장론과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클린턴 정부의 국무장관이었던 워런 크리스토퍼는 1993년 6월 10일 나토 외무장관 회의에서 '적절한 시기에 회원국을 확대할 수 있으나 지금은 의제가 아니'라고 확언한다. 그보다 당시 미국 정부의 주 관심사는 우크라이나의 비핵화에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나토의 급작스런 확장이 자칫 우크라이나의 비핵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한 때 소련의 영토였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확장 정책에 따라 회원국이 될 경우 러시아가 과연 이를 방관하겠는가 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의 이런 입장에 변수가 없지는 않았다. 소련의 영향권에서 겨우 벗어난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속도조절론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1993년 4월 당시 폴란드의 대통령 레흐 바웬사는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 클린턴을 향해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우리는 여전히 러시아를 두려워하고 있'으며 '러시아가 다시 공격적 외교정책을 취한다면 그 대상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

나토의 동진 확장이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동유럽 국가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주장과 관련해 러시아는 어떤 입장이었을까. 결과적으로 냉전 후 서방 외교안보 정책의 가장 큰 오류라면 러시아를 안보 라인 밖으로 내몬 것이었다. 소련이 붕괴된 시점에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특히 옐친 대통령은 한 때 나토에도 가입할 의사가 있을 만큼 친 서방 행보를 보였다.

앞서 언급한 1990년 2월 베이커 장관과의 회담에서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주석은 '나토가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안보를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나토에 가입하면 되지 않겠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공화당 집권 세력은 소련 그리고 훗날 러시아를 미국과 서방의 안보 라인 밖으로 밀어내려는 듯 보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역사는 그것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어떻든 고르바초프 이후 모든 러시아의 리더들은 나토로 대표되는 서방 세력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어떤 방식으로든 가지고 있었다. 옐친 대통령은 1993년 10월 22일 미국의 크리스토퍼 장관이 나토의 확장 대신 서방 국가들과 동유럽, 구 소련 출신 모든 국가들을 아우르는 '평화를 위한 협력'(Partnership for Peace PfP) 출범을 제안했을 떄, '이것이야 말로 훌륭한 아이디어이자 기발한 한 수(This is a brilliant idea, it is a stroke of genius)'라고 호응했다.

심지어 푸틴 대통령도 그의 집권 초기에는 러시아의 나토 가입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전 나토 사무총장 안데르스 라스무센은 푸틴 대통령이 2000년에서 2001년 사이 러시아의 나토 가입에 호의적임을 시사 하는 많은 발언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일(현지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클린턴 미 대통령은 나토를 동진 확장시키는 대신 'PfP'를 활성화해 그가 옐친 대통령에게 말하듯 '민족 국가들의 탄생 이래 유럽 전체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1994년 1월 11일 첫 PfP 출범에 즈음해 체코의 하벨 대통령, 폴란드의 바웬사 대통령 등 동유럽의 민주화 인사들을 안심시키는데 전력을 쏟았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순방향으로 흐르지만은 않는다. 러시아를 평화 동반자로 만들고, 동서 유럽의 경계를 허물려던 클린턴 행정부의 노력은 2년을 넘지 못했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크게 패한 민주당은 의회권력을 공화당에 넘기고 만다. 이렇게 되면서 민주당 정부의 대외정책에서도 큰 전환기를 맞는다.

그동안 숨을 죽여 왔던 민주당 내부의 나토 확장론자들과 공화당은 클린턴 행정부의 PfP 정책에 제동을 걸고 나토의 동진 확장 정책에 날개를 달아 준다. 물론 그 정책은 G. W. 부시 행정부부터 이어져온 '러시아를 배제한' 동진 확장 정책이었다.

역사의 최대 실수?
 

3월 16일 수요일 워싱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여성폭력방지법 재인가 기념행사를 떠나면서 푸틴에 대해 "그는 전범(He’s a war criminal)"이라고 말했다. ⓒ AP=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불의와 비리, 악을 응징하기에 앞서 그것이 발생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대비시키기 위해 악을 방관한다면 그보다 최악의 정치는 없을 것이다.

푸틴의 한 측근 세르게이 카라가노프의 말처럼 '러시아의 나토 가입을 허용하지 않은 것이 정치 역사의 최대 실수'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고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군, 민간인들의 인명 피해를 보면서 역사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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