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5 06:12최종 업데이트 22.04.05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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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4월 1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각군 대항 연식야구대회가 열렸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중앙정보부 다섯 팀이 출전한 그 대회를 앞두고 최고회의로부터 하달된 지침은 '각 군 서열 20위 이내의 고급 간부들로 팀을 구성할 것'과 '각 군 최고지휘관이 선발투수로 출전할 것'이었다. 그날 시구는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었고, 개막경기는 김종오와 김신, 두 참모총장을 선발투수로 내세운 육군과 공군의 대결이었다.

5.16 군사정변이 채 1년이 되지 않은, 그 시점에 한국사회에서 군부의 힘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 시기에 각군 참모총장들을 직접 마운드 위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경기가 꽤 흥미로웠던지, 그 정점의 권력자는 얼마 뒤 직접 그라운드에 나섰다. 그 해 11월 24일, 역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정부기관 친선야구대회'였다.

그날 출전한 팀은 최고회의, 내각, 대법원, 군 등 4개였고, 최고회의팀의 2번 타자와 2루수로 출전한 박정희 의장은 대법원과의 1회전에서 안타 2개를 기록했다. 최고회의 팀의 선발투수는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었다. 
 

타석에 선 박정희 최고회의 팀 2번 타자 박정희가 타석에 서있다. 상대팀은 대법원으로서, 선수들은 대법관과 주요 법원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 대한뉴스 캡쳐

 
그날 경기에서 다소 무리했던지 경기 직후 허리에 통증을 느낀 박정희 의장은 비밀리에 온양 온천으로 내려가 하루 요양한 뒤 공관에서 이틀을 더 쉬었는데, 이유에 대한 설명 없이 예정된 공식 일정이 취소되거나 부의장에 의해 대행되면서 기자들의 항의가 이어지는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고위 공직자들의 친선 경기는 간혹 있는 일이지만, 한국의 최고권력자가 직접 선수로서 야구경기에 출전한 것은 아직까지는 그날이 유일하다.

쿠데타 세력의 야구 사랑

실제로 야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와는 별개로, 집권 초기 박정희가 의식적으로 야구와 가까운 모습을 보이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최고회의 의장 때는 스스로 '장훈과 백인천 선수의 팬'이라고 소개하기도 했고(경향신문, 1962년 6월 12일 자), 대통령 후보로 나선 1963년에는 부인 육영수가 신문 인터뷰에서 '가끔 남몰래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라고 말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63년 8월 30일 자).


그 혹은 그들 부부가 언제, 또 어떤 경로로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박정희는 야구부가 있는 학교를 다닌 적은 없으며 만주국이나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야구를 가까이 접했던 흔적은 없다. 다만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내던 1960년에 지역의 고교야구대회에 내빈 자격으로 참관했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 있던 군사정변과 집권 초기 핵심인물들 중 야구를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거쳐 최장기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이 '어릴 적 야구선수를 했었다'라고 회고한 적이 있으며, 초대 공화당 사무총장을 거쳐 문교부 장관을 지낸 윤천주는 서울대와 공군팀 소속으로 대학 대회와 실업 대회에서 뛴 야구선수 출신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군사정변의 실질적인 기획자와 재정 담당으로 활약한 김종필-김종락 형제가 공주중학(현 공주고)을 거쳐 각각 서울사범대와 일본 니혼대를 다니면서 야구를 접한 인물들이었으며, 특히 군사정변 직후 한일은행 대리에서 전무로 벼락 승진한 김종락은 시중 은행들의 실업야구팀 창단을 주도한 데 이어 3공과 5공에 걸쳐 무려 20여 년이나 야구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지역 명문고 중심의 야구 문화

1960년대까지도 한국에서 야구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종목이 아니었다. 지역적으로는 서울, 인천, 부산, 대구 정도에서만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며, 그 지역에서도 각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학교의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지금도 세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야구는 매우 편중된 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향유되는 문화에 속하며, 그 때문에 올림픽 정식종목 편입과 배제가 반복되기도 한다. 야구가 가지는 종목으로서의 특성 때문인데 경기 방식과 규칙이 난해하고, 경험하기 어렵고 위험하며, 비싸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선 상대 진영을 향해 달려가서 공을 골대에 넣으면 되는 축구에 비하면, 주자가 세 개의 베이스를 돌아 홈으로 돌아와 점수를 올리는 야구의 경기 방식은 직관적이지 못하고 규칙도 난해하다.

그리고 야구 경기를 직접 경험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수의 선수들이 모여야 하고,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 필요하며,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공으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들이 필요하다. 또 글러브와 배트와 공과 포수 장비들을 비롯한 전문적이고 값비싼 장비들도 갖추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야구가 대중화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대중화된 사회나 시대에 오히려 특별한 사연과 맥락이 있다고 봐야 한다.

식민지기에 일본인 학생들이 주로 다녔던 학교들은 야구부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학교들 중 상당수는 해방 이후 그대로 명문학교의 위상과 야구부의 전통을 물려받은 경우가 많았으며, 그것은 각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학교 동문들을 중심으로 야구문화가 이어진 주된 이유였다. 그리고 해방 직후 대규모 미군 부대들의 주요 주둔지였던 도시들에서는 주변 청년이나 학생들이 미군 부대 야구팀의 연습 상대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미군 부대로부터 흘러나온 야구 물자도 풍부했으며, 그런 도시들 중심으로 야구문화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주된 이유가 됐다.

권력과 야구,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닌

박정희와 야구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교적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가장 즐겼던 운동은 만주군 장교 시절부터 배운 승마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통치권자로서 벌였던 체육 정책들은 한편으로는 태릉선수촌, 다른 한편으로는 격투기(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로 상징되어 왔다.

하지만 최소한 그의 집권 전반기에 해당하는 1960년대 내내 가장 큰 규모의 지원이 이루어진 종목은 야구였다. 그 시기에 실업 야구 리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지방 각 도의 거점 도시에 야구장이 지어졌고, 동대문의 서울야구장에는 야외경기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야간조명시설이 설치되기도 했다.

다만 문제는 당대에 그만큼의 대중적 관심이나 국제대회에서의 성과가 야구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점이고, 반대로 관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국제무대에서 강자로 올라서기 시작한 1970년대에는 오히려 야구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소극적으로 돌변한 불협화음이 있었으며, 따라서 1980년대 프로야구 창설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시구 1958년 10월 21일 서울야구장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방한 경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관중석에서 경기구를 전달하는 미국식의 시구를 하고 있다. 한국 대통령으로서 첫 번째 시구였지만, 그 날 외에 이승만 대통령이 야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다. ⓒ 국가기록원

 
최소한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군대의 힘을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대통령들의 통치기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정부의 영향력은 유별나게 강했으며,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구 역시 박정희와 전두환 두 군인 출신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 속에서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집중적인 지원을 했지만 기억되지 못한 박정희와 상대적으로 적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상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된 전두환의 사례를 통해 야구의 발전과 권력이 맺어온 관계의 단순하지 않은 맥락을 엿볼 수 있다. 이어질 이 연재 기획을 통해 정치 권력의 동향과 더불어 선수와 팬의 변화 그리고 경제, 문화, 외교 등등의 영역들을 두루 살펴보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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