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03 09:46최종 업데이트 22.06.03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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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인간은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나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랍니다. 성장한 후엔 새 생명을 낳아 같은 방식으로 돌보며 키워낸 다음,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이치'라 합니다. 인간의 삶이 이럴진대, 길가에 핀 꽃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씨앗에서 시작해 줄기와 가지를 뻗은 다음, 불현듯 피었다가 시나브로 꽃잎을 여기저기 흩날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지고 마는 게 꽃나무의 일생입니다.

모든 꽃이 다 수월하게 피는 것도 아닙니다. 바람과 비가 도와줘야 하고, 햇볕과 흙도 기운을 보태야 합니다. 그 하나하나의 양과 시기가 다 적절해야 합니다. 너무 많아도, 지나치게 적어도 문제가 됩니다. 볕이 필요한 절기에 하염없이 비만 내리면 싹이 움트기도 전에 썩고 맙니다. 또 물기를 담뿍 머금고 생장할 시기에 폭염이 이어지면 발육이 부진해지고, 심하면 속까지 말라비틀어집니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이미 다 나름의 시련을 겪고 태어난 만만찮은 존재입니다.


얼굴에 검정이 묻은 사람과 안 묻은 사람이 마주 보면, 지저분한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깨끗한 사람이 얼굴을 닦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치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심하게 앓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 상대방의 아픔도 헤아리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이심이 전심됩니다.

만년필계의 신예, 마를렌
 

이탈리아 만년필 브랜드 마를렌(Marlen) ⓒ 김덕래

 
'마를렌(Marlen)'은 1982년 이탈리아 남부 카세르타 지방의 산타르피노에서 '마리오 에스포시토(Mario Esposito)'와 '안토니오 에스포시토(Antonio Esposito)'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가진 만년필 제조사가 즐비한 필기구계에서 이제 40년이 되는 마를렌은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기도 전인 셈입니다. 

전략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졸(卒)로 장(將)을 잡기도 하는 게 장기판의 묘미인 것처럼, 만년필계에도 쇠락하는 백전노장이 있으면, 떠오르는 신예도 있는 게 순리입니다. 노련함이 방패라면, 기세는 창입니다. 승부를 겨루는 시합에서 더러 약자를 응원하게 됩니다. 요행에 기대야만 할 지경이라면 몰라도, 이미 저력이 알려진 기대주라면 얘기가 다릅니다. 어떤 분야나 절대강자가 시장을 독점하는 것보단, 강단 있는 차세대 주자가 여럿일 때 생기가 돕니다.

2005년 만들어진 '아델(Aderl)'은 마를렌 본사가 있는 지역의 고대도시 아텔라에서 주조한 동전의 이름입니다. 연한 갈색을 띤 배럴은 펜 제작시 나무를 즐겨 쓰는 독일의 그라폰을 연상케하나, 실제론 레진입니다. 은색의 장식부는 스털링 실버로 만들어 진중하면서도 우아합니다.
 

무게감이 느껴지면서도 올드하지 않은 마를렌 아델(Aderl) ⓒ 김덕래

 
잉크가 채워진 상태에서 한동안 방치된 펜은 내부에 잉크 잔여물이 생기곤 합니다. 평소 잘 쓰던 펜은 세척 후 보관하지만, 어딘가 문제가 생긴 펜은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아이도 관심을 받지 못하면 나를 봐달라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만년필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한번 생떼를 썼다고 내칠 수야 없지요. 잘 토닥이면 슬며시 품 안으로 들어온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춘기 자녀와 신경전을 벌인 후 관계 회복을 위해 손을 내밀듯, 만년필 내부까지 말끔히 세척하고 펜촉을 매만지면 다시 쓸 수 있습니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펜촉과 피드를 그립 섹션에서 분해해 세척한 후의 모습 ⓒ 김덕래

 
세일러의 프로기어처럼 21K 펜촉을 사용하는 만년필은 물론, 그 이상의 금함량을 가진 모델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금펜촉은 14K와 18K가 보편적입니다. 기술적으로 자동차의 최고 시속을 더 끌어올릴 수 있어도, 그런 속도로 달릴 만한 도로가 없습니다. 그러니 일상 주행용으로 무한정 빠른 차를 만드는 건 정답이랄 수 없습니다. 만년필도 이와 유사합니다. 펜촉의 탄력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계속 금함량을 높이면 펜촉은 지나치게 물러집니다.

상대적으로 가격대가 낮은 스틸촉이어서 되려 득을 볼 때도 있습니다. 버텨주는 힘이 좋으니 필기하다 실수로 떨어뜨려도 펜촉이 멀쩡한 경우가 있는 거지요. 금펜촉이 장착된 모델은 만년필을 잘 모르는 친구가 손에 쥐고 한번 살짝 눌러 쓰는 것만으로도 펜촉이 어긋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러면 순간적으로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훨씬 저렴한 펜도 이 정도는 버텨주는데, 왜 몇 곱절 값나가는 펜이 이렇게 맥을 못 출까, 고개가 가로 저어집니다.

14K면 만년필 펜촉으론 부족함이 없습니다. 18K라면 차고 넘치는 정도니 그 이상을 욕심내지 않아도 좋습니다. 18K 이상의 펜촉을 마음 편히 쓰려면, 사용자가 얼마나 필압을 조절할 수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무조건 금함량이 높은 펜촉이 장착된 만년필을 쓴다고 글씨가 더 멋지게 써지는 것도, 확연히 부드러운 필기감을 보장해 주지도 않습니다.

제조사를 막론하고 자동차 회사들의 기술력이 상향 평준화된 지 오래입니다. 어떤 차를 구입하더라도 시동이 아예 안 걸리거나, 주행 중 엔진이 멈추는 일은 드뭅니다. 대형 세단이 아니어도 급가속과 급제동을 피해 정속 주행을 하면 꽤 만족스러운 승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년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상처도 만년필처럼 고칠 수 있다면
 

18K M촉이 장작된 마를렌 아델 ⓒ 김덕래

 
스트레스가 쌓일 때, 속이 뒤집힐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거나, 화면 가득 격투신과 폭발 장면이 넘쳐나는 액션 영화를 봅니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인파가 넘치는 도심보다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교외가 제격입니다.

만년필을 고를 때도 내가 원하는 바에 맞춰 선택해야 후회가 덜합니다. 수첩에 작은 글씨를 빼곡히 적기 위해선 EF촉이 합당한 것처럼, 종이와 직접적으로 닿는 펜촉 끝부분이 상대적으로 뭉툭한 M촉은 시원스럽게 술술 써져야 제대롭니다.

이 펜은 뭔가 일이 잘 안 풀려 답답할 때, 그저 입안에 맴도는 문장 몇 줄 슥슥 써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속이 개운해질 정도로 잉크 흐름이 좋아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과한 필압으로 인해 펜촉이 틀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잉크가 나오지 않으니 쓸 수가 없었던 거지요.

차체가 두 동강 나는 대형사고가 난 자동차는 폐차 말곤 방법이 없지만, 어지간히 외형이 손상되더라도 바탕이 되는 뼈대와 엔진만 멀쩡하면 다시 주행 가능한 상태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년필도 같습니다. 분해해 세척 후, 만년필의 엔진에 해당하는 펜촉을 손보면 살려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친구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식들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위중한 상태로 수십 년 긴 세월 생명의 끈 한 오라기를 부여잡고 버텨온 어머니. 그 속이 속이었을 리가 없습니다. 상주인 큰아들이 손주를 볼 만큼 나이가 들었으니 누군가는 호상이라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가당치도 않습니다.

한 생명이 나는 일이 경이로운 사건이라면, 스러지는 일은 그 자체로 견줄 바 없이 온전한 슬픔입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문득문득 우울해지고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그 친구의 말이, 남의 일처럼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마땅히 다가올 내 앞의 일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과정입니다.
  
고장난 만년필을 고쳐내는 것처럼, 생채기가 났을 친구의 마음도 흉지지 않게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재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손안의 이 만년필이 내달릴 준비를 마친 것처럼, 큰일을 치른 친구의 낯에도 하루빨리 전과 같은 생기가 돌길, 너무 오래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마를렌 아델 M촉 수리 후 시필 테스트 ⓒ 김덕래

 
* 마를렌(Marlen)
- 단색의 심플한 디자인부터, 장식문양이 양각으로 돌출된 형태에 이르기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지는 다양한 한정판 라인업을 갖춘 이탈리아의 필기구 제조사. 규모와 역사면에선 몬테그라파에서 시작해 오로라를 거쳐 비스콘티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메이저 3사에 견주기 힘드나, 어떤 브랜드보다 아름다운 펜을 만드는데 진심인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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