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05 05:28최종 업데이트 22.07.05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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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 15일 한국야구위원회 이사회가 열렸고 미리 다짐하고 다짐하며 전열을 가다듬은 8개 구단 대표이사들은 수년간 별러왔던 일을 밀어붙였다. 사무총장의 이사회 의결권을 박탈하고 나아가 사무총장 직위를 사무처장으로 격하한다는 안건을 상정한 것이다.

1981년 12월 11일, 6개 구단으로 창설된 한국야구위원회는 최고 의결기구로 이사회를 두고 있었고, 8명의 구성원이 의결권을 가지도록 하고 있었다. 6개 구단의 대표이사 그리고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와 사무총장이 그 구성원이었다.

각 구단의 이해관계와 의견이 상충할 때 리그 전체 운영을 담당하는 사무국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중심을 잡는 형태라고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기업들의 공통적인 요구나 이해관계와 사무국의 의지가 엇갈릴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 표면적으로는 모두 6장의 의결권을 가지는 기업들이 의결권 2장에 불과한 사무국을 압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단순한 표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사무국의 의지란 곧 정부 혹은 청와대의 의지를 반영해왔기 때문이다.
 

한국야구위원회 창립총회 1981년 12월 11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KBO 창립총회. 당시 명칭은 '한국프로야구위원회'였다. 테이블 앞쪽에 서종철 총재(오른쪽에서 두번재)와 이용일 사무총장(왼쪽)이 앉고, 그 뒤로 각 구단 대표들이 앉아있다. 서종철 총재는 국방부 장관을 지낸 군 원로로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내던 시절 부관으로 인연을 맺은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총재로 낙점했다. ⓒ 한국야구위원회

 
한국야구위원회가 청와대와 맺어온 관계는 역대 총재의 면면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전두환 정권에서 서종철(전 국방부 장관)과 이웅희(전 MBC 사장, 문공부 장관)가 총재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노태우 정권의 이상훈(전 국방부 장관), 김영삼 정권의 권영해(전 안기부장), 김기춘(전 법무부 장관), 홍재형(전 재경부 장관), 김대중 정권의 정대철(여당 5선 의원) 등의 '권력 실세' 혹은 대통령의 '복심' 들이 야구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이력에도 불구하고 총재로 '부임' 했던 것이다.


의결권의 수와 관계없이 한국야구위원회 이사회에서 총재와 사무총장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쉽지 않았던 배경이다.

그리고 한국야구위원회 사무국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통해 리그 창설을 기획하고 추진한 '이용일-이호헌(이용일과 함께 프로야구 창설 계획을 만들고 KBO 초대 사무차장을 지냈다) 팀'에 뿌리를 둔 조직이었다. 프로야구 창설 초기에 사무국이 리그 운영을 주도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했다. 사무국이 기획하고 청와대의 승인을 받거나 청와대의 지침에 따라 사무국이 기획한 사안이 이사회에서 의결되는 형식을 밟으며 리그가 운영되었기 때문이다.([관련기사 : 프로야구 운명 가른 그날 회의에서 무슨 일이 http://omn.kr/1z68k)

사무국은 전체 영입 대상 선수들을 등급화하고 각 등급에 대한 연봉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각 구단에 통보함으로써 계약 내용을 막후에서 결정했고, 어린이 회원 제도를 구상하고 기본적인 운영방식을 설계해 배포했을 정도로 세밀하게 개입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각 구단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구단들이 미처 구상하거나 꼼꼼하게 기획할 여력을 갖추기 이전에 제공됨으로써 시행착오의 시간 낭비를 줄인 결과적 성공 요인이기도 했다.

민주화, 프로야구와 청와대의 연결 고리를 끊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전되고, 사회 전반에 꼼꼼히 드리워져 있던 청와대의 영향력이 조금씩 걷히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의 권한 회복을 골자로 하는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새 헌법에 의해 1987년 12월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어 1988년 2월 취임했다. 그와 동시에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 역시 마무리되었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소멸시킨 것은 민주화운동과 그 성과로서의 개헌이었다.

민주화는 자연스럽게 사회 각 분야에서 국가의 개입을 약화시켰고 그런 변화는 자연스럽게 기업의 자율성을 확대했다. 1990년 정부는 공정거래위원회를 경제기획원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감독과 규제의 통로를 분산시켰고, 방송국에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편성권 감시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과거처럼 일방적으로 정부의 지시가 관철되는 방송은 어렵게 됐다.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의 자율성이 강화된 반면 방송국을 통한 일방적인 지원은 어려워지게 된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기, 특히 유신개헌 이후 15년간 국가의 권한이 비정상적으로 크고 그 작동범위가 넓었던 만큼 민주화 이후 그것이 축소되는 속도와 규모도 매우 빠르고 컸다.

새 정부에서도 스포츠의 정책적 위상은 여전했다. 새 대통령의 임기 첫해인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치러졌고, 전두환 정부에서 초대 체육부 장관으로서 올림픽 준비를 총괄했던 노태우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이후에도 체육진흥에 대한 국가적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야구는 올림픽 정식종목이 아니었고, 특히 프로야구는 전임 대통령의 업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리고 1987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심각하게 대두된 물리적 충돌과 극심하게 편중된 지역별 득표율로 인해 부정적인 면이 두드러진 지역주의와 겹치는 이미지를 가진 것도 프로야구의 곤란한 점이었다.

전두환 정권과 차별화하는 동시에 지역주의적 대결 의식의 완화를 지향해야 했던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중 한 번도 프로야구장을 찾거나 시구를 하지 않았고, 프로야구를 진흥하기 위한 정부 기관의 특별한 지시나 협조 당부도 없었다.

프로야구에 대한 국가 개입이 줄어들면서 청와대의 영향력이 야구계에 전달되는 창구 기능을 하던 사무국의 권한도 자연스럽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넓어진 권력의 여백으로 기업들의 적극적 발언들이 채워지며 리그 운영의 주도권도 이사회로 점점 넘어가기 시작했다.

1988년,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리자마자 KBO 이사회에서는 이미 몇몇 구단의 대표이사들이 사무총장의 의결권 회수를 주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용일 총장의 수완은 여전했고, 새 정부의 의지도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전임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이기도 한 신임 노태우 대통령의 차별화 행보가 어느 정도의 보폭으로 이어질지는 속단하기 어려웠다. 그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7개 구단의 뜻이 하나로 모이기가 쉽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실제로 정권 핵심층에서 총재를 선임해 내려보내는 일은 1990년대 후반까지도 계속되면서 사무국의 권한은 어느 정도 유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영향력이 소멸된 이후 정치권력과 사무국의 연결 고리가 약화되는 추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사무총장 이용일 이용일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1950년대 국내 최강이던 육군 야구부의 핵심 실무자였고, 1970년대 고교야구 열풍의 진원지였던 군산상고 야구부의 배후인물이었으며, 프로야구의 설계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청와대와의 교감 속에서 9년간 KBO 사무총장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민주화 이후 청와대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밀려나고 말았다. ⓒ 전주방송(영상 캡쳐)

  
사무국의 상징, 이용일 사무총장의 퇴장

1990년 12월 이사회에 상정된 안건은 그런 의미에서 3년 이상 계획하고 준비한 정변이었고, 이미 생각보다 더 진전된 사회변화는 그것을 거스를 수 없게 만들었다. 이사회에서 사무총장의 의결권 박탈을 넘어 직제 격하까지 제안되자 창설 준비 단계부터 프로야구 운영을 주도해온 사무총장 이용일도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의결권 박탈은 피할 수 없더라도 사무총장 직제만은 유지해달라는 조건을 내걸고 사표를 제출했고, 그 마지막 타협안은 이사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프로야구 창설 계획을 작성하고 기업들에 창단을 제의하기 위해 뛰어다니기 시작하던 시절로부터 9년 만의 퇴진이었다.

사무국의 상징적 존재였던 이용일의 퇴진 이후 한국야구위원회의 힘의 중심은 급격히 이사회 쪽으로 넘어갔다. 여전히 정권의 핵심부에서 결정된 총재들이 내려오고 있었고 기업들이 함부로 그 총재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까지 이사회가 청와대의 지침 혹은 의지를 접수하고 실행 방안을 논하는 자리였다면, 이후에는 각 구단이 의사 진행을 주도하고 총재는 구단들 사이의 이견이나 구단들과 정부 사이의 온도 차이를 중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1998년 직접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던 이사회의 한 축인 두산그룹 박용오 회장이 제12대 총재에 취임해 2005년까지 연임(13대, 14대)하면서 KBO 운영의 중심은 더욱 기업들에 쏠렸다. 그리고 박용오 총재가 그룹 내부의 분란에 휘말리며 불명예 퇴진하면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정치인 출신 신상우 총재가 재임하긴 했지만, 그 뒤로는 다시 유영구, 구본능, 정운찬, 정지택, 허구연 등 정부의 입김과 거리가 있는 민간 출신 총재들이 구단 사장들의 합의에 의해 선임되고 있다.

게다가 1998년 경제위기 당시부터 2006년 현대 유니콘스 사태에 이르기까지 사무국이 부실구단 문제 해결에 실패해 140억 원에 달하던 위원회 적립금이 모두 소진되면서 사무국의 경제적 토대가 소멸된 뒤로는 구단주들의 발언권은 더욱 강해졌다. 신생구단의 리그 가입비를 종잣돈 삼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립해두었던 공동자금이 모두 소진되자 리그 운영자금은 전적으로 회원사들의 회비나 회원사들이 계약의 주체가 되는 중계권료 등의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기 때문이다.

지역 연고제의 약화와 자유경쟁의 강화

리그 운영에 있어서 기업들의 주도성 강화는 지역 연고제의 약화와 자유경쟁의 강화라는 두 가지 큰 흐름으로 이어졌다. 우선 지역 연고제는 한국프로야구를 빠르게 안착시킨 요인이기도 했지만 프로야구에 참가하는 기업들 다수의 이익과는 상충되는 제도였다. 한국의 프로야구는 지역을 중심으로 영업하는 향토기업이 아닌, 전국 단위의 영업망을 가진 대기업을 단지 창업자의 고향이나 창업 장소 등의 인연으로 엮어서 연고지로 설정해 맡김으로써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 연고제는 자기 연고지에서의 영업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오히려 손해로 작용할 우려가 있었다. 창설 준비 단계에서 호남 지역의 제과시장 상당 부분을 해태에 잠식당하는 손해를 우려한 롯데가 문제제기를 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같은 제과업을 주력으로 하는 시장지배기업과 후발 기업이 영남과 호남 연고권을 양분하면서 문제점이 두드러진 예지만, 그 외에도 경기장에서의 갈등 상황 등이 상대 구단 기업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이어지거나 실제로 특정 지역에서 특정 기업 제품의 매출이 감소한 사례는 흔히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이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지역 연고제는 단계적으로 약화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1987년부터 연고지 우선 지명권이 구단별 10장에서 3장으로 축소된 데 이어 1990년에는 2장, 1991년부터는 1장으로 축소된 것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창설 첫 해 각 구단 선수단의 거의 100%를 채웠던 연고지 출신들의 비중은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대부분 20% 이하로 축소되었다. 선수 구성에서 지역적 동질성이 탈색되자 지역 연고제가 지향하던 팀과 팬의 지역적 정체성이 빠르게 약화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자유경쟁의 강화는 정부 개입의 축소와 더불어 1990년대 후반 경제위기 와중에 해태와 쌍방울이라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 도태되는 과정과 더불어 전면화되었다. 프로야구의 소비층이 안정적으로 증가하고 소비력이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야구의 문화적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대기업들은 더 많은 투자를 통해 더 많은 성과를 거두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사무국이 약화되고 사무국이 주도해온 전력 평준화 조치들의 집중적인 수혜자인 소규모 기업들이 도태되는 과정에서 전력 평준화 조치는 단계적으로 철폐되었다. 외국인 선수 영입 허용 그리고 자유계약(FA) 제도의 도입과 현금 트레이드에 대한 폭넓은 허용 등은 그 대표적인 결과였다.

 

KBO 총재 허구연 지난 3월 24일 KBO 총회에서 24대 총재로 선임된 허구연. 그의 총재 취임은 야구인 출신으로는 처음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사진은 지난 7월 2일 이천의 LG 챔피언스파크에서 열린 고양과 LG의 퓨쳐스리그 특별해설에 나선 모습이다. ⓒ 한국야구위원회

 
하지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 모두 도태되어 정리된 뒤에는, 자유경쟁은 남은 기업들에 도태되지 않기 위한 더욱 경쟁적인 투자를 강요했다. 그로 인해 한국프로야구의 성장이 더욱 가속화된 것이 그런 변화의 밝은 면이라면, 한국 프로야구가 점점 더 대기업이 아니면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로 멀어져가게 된 것은 어두운 면이라고 할 수 있다.

대기업에 프로야구단 운영을 통해 만들어지는 연간 최대 수백억 원의 적자 혹은 수십억 원의 흑자는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기 어려우며, 그것은 그 이상의 권리를 주장하기 힘든 팬들의 발언권 역시 점점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기 어렵게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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