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2 05:17최종 업데이트 22.07.12 11:25
  • 본문듣기

스코틀랜드 맥주회사 브루독이 내놓은 맥주 '보리스의 거짓말'. 브루독은 영국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를 배경으로 한 이미지를 공개하고 '업무 파티에 적합한 맥주'라며 보리스 존슨 총리의 이른바 '파티 게이트'를 풍자했다. ⓒ 브루독


지난 7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보수당 대표를 사퇴한다고 발표한 날 메일링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맥주 회사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새로운 맥주가 8월 1일 출시 예정이니 관심 있으면 사전 예약하라는 내용이었다. 새 맥주의 이름은 "보리스의 거짓말"(Boris Lie-PA). 알콜 도수 5.5%에 감귤류와 이국적 과일의 풍미가 느껴지는 맥주이며 "(영국 사회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을 축하하는 사퇴 기념 맥주"라고 설명했다.  

맥주 설명 속 '다음 단계'의 시작은 보수당 대표 선출이다. 조기 총선이 없다면 보수당의 새 대표는 2025년 1월 다음 총선까지 총리직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누가 출마하든 '보리스의 거짓말'을 넘어서야 한다. 


보리스 존슨 총리의 리더십에 빨간불이 켜진 건 지난해 5월 코로나 봉쇄 기간 중 총리 관저에서 열린 파티였다. 이를 '지도력 실패'로 명시한 수 그레이 보고서가 발표된 지난 1월 존슨 총리는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며 상황을 지연시켰고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파티 게이트는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런던 경찰이 5월 존슨 총리와 내각의 2인자인 재무장관을 비롯해 파티에 참가했던 이들에게 무려 126개의 벌금 통지서를 발부하면서 공은 하원으로 넘어갔다.

영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에서 벌금형을 받은 존슨 총리의 몰락은 두 단계를 거쳤다. 하나는 6월 6일의 불신임 투표다. 지지를 재확인했지만 불신임이 40%에 달했다. 불안한 수치지만 불신임 투표는 1년에 한 번 한다는 규칙에 따라 존슨 총리는 총리직을 1년 더 연장했다.

하지만 지난 6일 '회색 정장의 남자들'을 피하지는 못했다. 당 고위직 실세를 일컫는 말로 이들이 총리를 직접 만나 물러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보수당만의 당수 쳐내기 전통이다. 가장 높은 수위의 압박으로 이것을 버틴 총리는 없다.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 총리도 이들의 방문 후 사임했다.  

'회색 정장의 남자들'이 움직인 이유는 존슨 총리가 크리스 핀처 의원의 성비위를 보고 받았음에도 위기를 모면할 요량으로 몰랐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내각의 움직임은 빨랐다. 5일 리시 수낙 재무부 장관과 사지드 자비드 보건부 장관이 동시 사임했다.

6일에는 사지드 자비드가 총리 질의 시간에 "품위, 책임, 법과 관습에 따른 사회 정의를 지키는 것은 보수당 이상의 핵심"이라며 지지를 공개 철회했다. 수십 명의 내각 사퇴가 이어진 그날 밤 '회색 정장의 남자들'이 총리를 방문했다.

다음 날 아침, 존슨 총리는 당 대표직을 사퇴하되 당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 총리직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존 메이저 보수당 전 총리까지 나서 총리직에서도 물러나야 한다고 지적한 가운데 보수당은 당 대표 선출로 들어갔다. 

보리스 존슨의 '케이키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7일(현지시간)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앞에서 보수당 대표직 사임을 발표하며 차기 총리가 선출될 때까지 일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이른바 '파티 게이트'로 민심을 잃은 그는 최근 성 비위 측근 인사와 거짓말 의혹 등으로 사임 압박을 받아왔다. ⓒ 연합뉴스


보리스 존슨 총리가 새삼스레 상기시킨 주제는 민주주의와 도덕이다. 시장 경제원리에 따라 개인의 경쟁을 우선시하는 신자유주의 질서에서 도덕은 상당히 후퇴했다. 경쟁과 도덕이 직접적으로 상반된 가치는 아니나 경쟁이 과열되고 과정보다는 결과에 따른 능력주의를 우선시하면서 도덕이란 덕목이 설 자리는 좁아졌다.  

도덕의 상실 정도를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2017년 세인트 올러브스 학교 스캔들은 의미심장하다. 공립이지만 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중고등학교로, 2015년 <이브닝 스탠더드>가 '올해의 국립학교'로 선정하기도 했다. 스캔들은 학교가 성적이 저조한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타학교 전학을 종용하면서 터졌다. 학부모들은 행동이 아닌 성적을 기준으로 전학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학교를 상대로 고소했다.

왜 성적이 낮은 학생을 내보내려고 했을까. 교육부가 매년 발표하는 랭킹 때문이다. 상위권에 위치할수록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더 좋은 학생들을 뽑을 수 있다. 뛰어난 학생들을 뽑아 열심히 교육시켜 좋은 입시 결과를 내면 다음 해 좀 더 상위권에 진입하는 선순환이다. 중산층의 교육열, 무한 경쟁하는 시장 경제, 경쟁을 유도하는 정부의 기획 세 박자가 맞물려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이 스캔들 즈음 영국 정계의 떠오르는 인물이 보리스 존슨이었다. 그는 자체 브랜드였다. 보수-노동당 그 어떤 이미지와도 연결되지 않았던 그는 흐트러진 머리, 뛰어난 언변, 틀에 박히지 않는 행동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청소년기부터 고전에 심취한 걸로 알려진 그는 2015년 케임브리지대 메리 비어드 고전학 교수와 '그리스 대 로마'를 주제로 1000여 명 앞에서 1시간 이상 1대 1 공개 토론을 하기도 했다.

반면 대단한 경쟁심의 소유자로 그의 여동생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존슨이 "인생을 경쟁으로 생각하고 언제나 1등을 원했다"고 증언했다. 뛰어난 지적 능력은 특권 의식으로 발전한다. 이튼 스쿨 마틴 해먼드 교장은 1982년 존슨의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리스는 우리가 자신을 단체의 규율을 따라지 않아도 되는 존재, 예외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을 무례하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권 의식 속에서 존슨의 거짓말, 언어 비틀기, 사실의 과장 및 왜곡은 그의 양심을 건드리지 않는다. 경쟁의 일부일 뿐이다. 정치 평론가들은 이를 일찌감치 위험 요소로 지적했다. 바로 '케이키즘(Cakeism)'이다. 성취하기 불가능한 두 가지를 가리키는 영국 속담으로 "케이크를 가지고 있어라 그리고 역시 먹어라"가 있다. 먹으면 없어지기 때문에 가지고 있으면서 먹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보리스 존슨은 이 속담에 대해 "가지는 것도 지지하고 먹는 것도 지지한다"며 말장난한 바 있다.

전환기의 현실에서 그의 케이키즘은 한계를 그대로 노출했다. 보트를 타고 영국 해협을 불법적으로 건넌 난민의 경우는 인류애와 반난민 정서가 충돌한다. 이들을 아프리카 르완다로 강제 이송해 돌파하려 했으나 유럽 인권 재판소에 저지당했다.

전쟁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고 있는 에너지 산업의 경우, 보수당의 친시장 정책에 따라 기업 이익을 보호해야 하나 생활비 위기와 자신이 약속한 기후 문제 해결이 걸려 있다. 양다리 거치며 버티다가 결국 노동당에 밀려 횡재세를 통과시켰고 이는 보수당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결정타는 파티 게이트다. 코로나 봉쇄 시 "사회 같은 것은 없다"는 신자유주의 선봉자 대처 총리의 말을 뒤집고 "사회 같은 것은 있다"고 선언, 다같이 위기를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사회 같은 것은 없는' 삶을 유지했다. 거짓말로 가렸으나 실체가 드러나면서 영국은 그의 허상을 봤다. 이후 여야를 초월해서 하원이 진실성과 신뢰의 문제를 되짚었을 때 그의 총리직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영국 노동당과 보수당이 직면한 과제
 

지난 8일 런던 중심부에 있는 노동당 당사에서 기자회견 하는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 그는 앤절라 레이너 부대표 등과 함께 지난해 코로나19 봉쇄 기간 선거 유세 지원 중에 방역규정을 어기고 실내에서 맥주를 마셨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이날 영국 경찰은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 ⓒ 연합뉴스

 
보리스 존슨 총리의 사임 발표 다음 날인 지난 8일,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맥주 게이트' 의혹을 해소했다. 발단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인 지난해 하틀리풀 보궐선거를 앞두고 더럼 지역구 노동당 의원 사무실에서 밤늦게 맥주를 마셨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다. 당시 스타머 대표는 파티가 아니라 먹을게 필요했다고 밝혔고 지역 경찰은 규정 위반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존슨 총리의 '파티 게이트'가 불거지자 보수당과 일부 언론이 보충 자료를 제시하며 재조사를 요구했다. 5월 초 더럼 경찰이 재조사에 착수하자 키어 스타머 대표는 벌금형을 받을 경우 당 대표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보수당) 모든 정치인들은 다 똑같다는 냉소주의를 키우려 한다. 나는 아니다. 나는 명예, 진실, 입법자가 법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믿는다. 나는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벌금형을 받으면 당 대표에서 물러나겠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영국 사회는 법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을 가질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잣대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정치인을 가질 가격이 있다."   

영국 정치가 소위 '내로남불'이라는 끊기 어려운 아수라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었다. 키어 스타머 대표는 직을 걸고 막판까지도 보수당을 압박했다. 지난 8일 더럼 경찰이 키어 스타머 대표가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최종 결정을 내리자 이렇게 말했다.

"벌금형을 받을 경우 당대표직을 내려놓겠다는 말을 했을 때 사람들은 정치적 모험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원칙의 문제였다. 법을 만든 사람이 법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논쟁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키어 스타머 대표는 조기 총선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수세에 몰린 보수당이 이 카드를 받을지는 불확실하지만 내각제에서 총선 승리 없는 총리는 힘을 갖기 어렵다. 이제 보수당은 도덕의 회복과 존슨 내각의 정책 재검토라는 이중 과제에 직면했고 노동당 역시 도덕 이상의 것, 전환기의 아젠다를 제시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