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13 10:08최종 업데이트 22.07.1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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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SF를 친밀하게 느끼도록, 은밀하게 접근해 진입장벽을 슬그머니 무너뜨립니다. 이를 위해 SF 읽는 모습을 생활밀착형으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기사 보강] 2022년 7월 13일 오후 1시 23분

인공임신중절을 둘러싼 논의에 관해서는 형법 제269조 제1항 등의 위헌소원에 대한 헌법재판소 2017헌바127 전원재판부 결정(2019. 4. 11. 선고)의 헌법불합치 부분을 참고해주세요.


내게는 안 쓸 말 목록이 있다. '낙태'는 약 5년 전 목록에 올랐다. 나는 낙태 대신에 인공임신중절 또는 임신중절이라는 말을 쓴다. 태아의 죽음보다 임신한 사람의 결정권을 강조하는 말이다. 여자는 '아기 캐리어'가 아니며 뱃속의 세포가 증식하여 생명체가 되도록 둘지 말지는 배의 주인이 선택할 일이다.

다만 임신중절로 말을 고친 후에도 나는 몇몇 단어는 여전히 낙태라고 부르고 있다. 낙태죄 폐지, 여아낙태, 선별낙태, 성감별낙태 등이다. 사실 뒤의 세 가지는 같은 말이다. 성별을 감별해 여아이면 선별적으로 낙태하던 일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선별낙태는 지금 젊은 세대의 성비 차이에 크게 기여했다. 1990년생의 성비는 115:100이다. 여아가 100명 태어났다면 남아는 115명이 태어났다. 그 차이만큼 남성이 출석부 목록이 길고, 자리를 차지하고, 목소리가 크게 모이며, 투표권이 많다. 남아가 부자연스럽게 많이 태어나는 현상은 전 세계에서도 동아시아에 심각하게 일어났다.

동아시아의 성비 그래프는 1990년을 중심으로 급격히 휘어진다. 여기에는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이 만만찮게 공헌했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내밀자 사람들은 둘 중 하나 이상이 남자이길 선호했다. 시간이 흘러 표어가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변하자 그 하나가 남자이길 선호했다.

국가가 나서서 임신중절을 권장하던 시대, 불임시술을 해주던 시대, 산부인과에서 태아의 성별을 임신 초기부터 알려주던 시대였다. 얼마나 심각했던지 1987년 의료법에는 태아의 성감별행위를 금지하는 조문이 생겼다. 그러자 산부인과에서는 '여아', '남아' 대신 '분홍색', '파란색'이라는 표현을 썼다. 의사가 아이 옷을 분홍색으로 준비하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임신중절 또는 영아살해를 준비했다.

갑자기 사라진 여자아이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책 표지 ⓒ 문학과지성사

 
가끔 생각한다. 그때 사라진 태아들은 어디로 갔을까. 천국에 갔을까. 태어나지도 못했으니 천국 출입증도 없을까. 아니면 어디론가 돌아가 다시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을까. 또 가끔 생각한다. 태아도 생명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사라진 여자아이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까?

황모과의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난 세계>(문학과지성사)는 선별낙태가 극심했던 1990년 백말띠 여자아이들이 살아 있는 세계를 그린다. 일종의 평행세계다. 평행세계는 하나의 세계에서 뻗어나온 별개의 세계로, 둘은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다. 여기서는 우연히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저기서는 우연히 폭탄이 불발되어 전쟁이 없는 식이다.

SF에는 종종 평행세계와 교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우리가 다시 만난 세계>에서는 여자들이 살아서 태어난 세계가, 선별낙태가 일어난 평행세계와 뒤섞인다. 세계가 바뀌자 멀쩡히 살아있던 여자들은 갑자기 '없는 사람'이 된다. 전학 간 학생, 이사 간 집, 없는 전화번호가 된다.

한두 명씩 없어지다가 나중에는 뭉텅이로 사라진다. 기록도 기억도 남지 않는다. 정말로 원래부터 없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인공 채진리는 사라진 단짝 친구를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손바닥에 유성펜으로 친구 이름을 쓴다.

7만 명의 여자가 없어진 세상은 특정 사람들에게 온정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친절한 모양을 하고 있다. 남녀공학이었다가 남고로 변한 학교에서 남학생들은 큰 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루저, 변태, 시체, 좀비, 버그" 따위로 부른다.

소설은 혐오와 차별에 날을 바짝 세운다. 남을 조롱하는 성격으로 변한 남학생들은 주로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가 마땅히 자리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원래 세계의 자신을 죽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뭐랄까, 이건 그냥 시적 허용 같은 거야. 치열하게 살아남은 영웅의 대서사시 같은 거랄까. 우린 실력이 있었기에 이 삶을 획득했지. 그러니 여기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를 내 세계로 누릴 자격을 얻은 거야." (118쪽)
 
이들은 정작 타인의 권리는 손쉽게 부인한다. 휠체어 때문에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타는 계수는 뒤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 "등록금 똑같이 내고 쟤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다니, 저거 특권 아냐?"(91쪽)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장애인이 그렇게 부러우면 네가 장애인이 되든가. 당연히 통할 리는 없다. 악의 섞인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엘리베이터는 멈추고 배리어프리 구역은 사라진다.

다른 세계를 향한 가능성

반면 소설이 일부러 뭉뚱그리는 부분도 있다. 진리가 성폭행 위험에 처하는 장면, '오류'로 취급된 여자애들이 사라지는 장면, 누가 다른 세계의 자신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은 정확히 묘사되지 않는다. 이런 일관성에서 폭력을 무의미하게 재현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우리가 봐야 하는 폭력은 그보다 느리고 거대하다. 진리는 "약한 존재를 혐오하는 사람들", "자신의 비정함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편협한 사람들"(111-112쪽)을 보며 몸서리친다.

진리는 세상이 이상하다며 몸을 떨고, 세상을 바꾸겠다며 힘껏 달리는 주인공이다. 진리가 고등학생이기에 소설의 눈높이도 청소년에 맞춰져 있다. 진리의 무력감은 아빠와 같은 어른들 때문에 극대화된다. 하지만 진리가 도움을 청하는 대상도 어른들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또래만이 아니라 어른들까지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못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가 온 힘을 다해 부딪치면 가만히 있던 사람도 한 발을 내딛게 된다. 눈물이 전염되듯 움직임도 전염된다. 진리는, 소설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믿는다.
 
"세계가 고정되지 않은 것처럼 사람 역시 확정되지 않은 존재라 믿는다. 우리는 요동치는 존재이다. 조금씩 바뀌기도 하고 갑자기 바뀌기도 한다. 어떻게든 함께 사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무엇보다 혼자만의 세상이 아닐 때 이곳은 가능성만으로 이뤄진 세계가 아니라 진짜 세계가 될 거였다." (249쪽)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황모과 (지은이), 문학과지성사(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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