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22 05:06최종 업데이트 22.07.27 15:58
  • 본문듣기
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거울 앞에 선 알렌이 아이를 안고 있다. ⓒ 안미선

 
부천이었다. 지하철역을 나와 걸어 나가니 사원모집 간판이 눈에 띄었다. '생산직 사원모집, 사출, 조립, 코팅, 포장, 주급, 가불 가능'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재래시장으로 향하는 골목에는 베트남어로 쓰인 간판도 보였다. 안쪽 주택가에는 낡은 2~3층짜리 건물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한산한 가운데 간혹 작업하는 기계음 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층집 앞에 도착했다. 1층은 상가로 쓰고 있었고 지하는 가내 작업공간으로 세놓는다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니 좁은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으로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고, 철문 하나가 조금 열려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어서 오세요"하는 웃음기 섞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여윈 알렌이 긴 머리에 헐렁한 체크무늬 옷차림을 하고서, 기저귀 찬 아기를 안고 서 있었다.


좁은 통로 끝에 안방이 있고 침대와 화장대 사이에 매트가 깔려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와서 한국에서 오래 생활한 그녀는 한국말을 잘하는 편이었다. 격의 없이 나를 맞고서는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큰일이다"라는 말부터 꺼냈다. 아기를 낳고 키우느라 한 해 정도 일을 쉬었지만 직장 일을 다시 할 생각인데 아기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다고 했다.

"캄보디아에 있는 친정어머니를 한국에 모셔와 육아를 부탁하고 싶었는데 제가 영주권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 돼요. 엄마를 초청하면 단기방문비자(C3)로 한국에 오시게 되는데 그건 3개월밖에 한국에 못 있는 거고 연장을 못 해요. 만약에 제가 국적이 있었다면 엄마를 초청해 데려올 수 있었겠지만 영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 돼요."

알렌은 한국 국적이 없다는 말을 "국적이 없다"는 말로 표현했다. 국적 문제는 이십 대 이후 그녀의 삶에서 모든 일과 관계에 영향을 준 사안이었다. 때로 알렌은 "어떡해!"라고 소리쳤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때, 안타까울 때, 속상할 때 그렇게 외쳤다.

"어떡해! 제가 국적이 없잖아요. 국적 있으면 어린이집에 보내면 나라에서 보육료를 다 지원해줘요. 저는 안 돼요. 어린이집이 비싸요. 어린이집 원장님한테 전화로 물어보니 저는 50만 원 정도 내야 한대요. 내가 회사 다니면 월급은 200만 원도 안 될 텐데, 어린이집에 50만 원 주면 어떡해요? 부천시에 외국인등록 아동 보육료 지원이 있는데 세 살부터(누리과정 만3~5세) 28만 원 지원한대요. 지금은 지원 못 받아요.

그래서 아기를 캄보디아에 1년 정도 보낼 거예요. 그동안 제가 돈 좀 벌어서 나중에 아기를 데려올 거예요. 제가 영주권밖에 없으니 아기도 영주권밖에 없어요. 인천 출입국에 전화해 물어보니 아기가 캄보디아에 가더라도 2년 이내에 한국에 와야 한대요. 2년 안에 오지 않으면 아기 비자가 끝난대요. 그래서 잠깐 1년 정도만 보내고 그동안 열심히 돈 벌고 다시 데려와 살고 싶어요."


건넛방에서 가느다랗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간 일을 하고 돌아온 남편이 자고 있는 소리였다. 남편은 캄보디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페이스북을 통해 만나 알게 되었다. 첫아이를 보고 기쁜 남편은 아기를 캄보디아에 보내는 걸 망설였다. 야간 일에 지쳐 잠을 자다가도 낮에 잠을 깨어 아이를 돌봐주는 남편이었다.

남편은 이전에 '돈은 나중에 벌어도 되니 아기를 낳을 동안 일을 쉬어도 된다'고 알렌에게 말했다. 그래서 알렌은 한 해 동안 공장 일을 쉬면서 무사히 출산을 하고 산전후 기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렌은 이제 마음이 급해졌다. 아기를 키우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해서, 아기가 한국에서 살 수 있게 하려면 역설적으로 지금은 헤어져야 해서 그녀는 아이를 보내려 한다.

"한국 살면 좋아요. 아기는 앞으로 한국에 있어야 돼요. 한국에 일이 많아서. 사실 저는 전남편 아들도 한국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아기랑 한국에 살면 큰아들도 다시 보고 좋아요."

이건 무슨 얘길까?

엄마는 한국인이 아니다
 

알렌과 아기 ⓒ 안미선

 
알렌은 스물두 살 때 처음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캄보디아에 있는 중국 의류 공장에서 5년 동안 일했다. 한국에 올 때는 인생이 바뀌는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한국 올 때는 생각했어요. 열심히 돈 벌고 엄마 아빠 도와주고 행복하게 살고 집도 만들어주어야지 하고. 좋은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와 보니 다 틀렸어요. 남편이 돈도 없고 술도 먹고 너무 스트레스받았어요. 한국말도 몰랐는데 좋은 남편도 못 만났잖아요. 너무 고생이잖아요. 그 꿈이 다 깨어졌어요."

남편은 마흔네 살이었고 목수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알렌은 한국 사람이 다 자상할 거라고 막연히 꿈꾸었다. 막상 한국에 와서 반지하 단칸방에서 남편의 경제적 무능과 술로 인한 고통에 직면하자 꿈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한국에 오자마자 임신했어요. 한국말도 몰라서 밖에 나가기 무서웠어요. 그때 일도 못 하고 '안녕하세요' 말밖에 못 하니까 밖에도 못 나가요. 처음엔 한국 사람 얼굴도 다 무섭대요. 남편밖에 없잖아요. 바로 임신하고 아기 태어나서 너무 힘들었어요. 아기를 혼자 키웠어요. 좋은 남편도 못 만나고 술 때문에 계속 싸우고. 매일매일 눈물 나와요. 아, 어떻게 살았나. 인생이 어떻게 사는지 몰랐어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차올랐다. 말이 통하지 않는 곳, 반지하 방에서 혼자 울고 있었을 그 외딴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남편은 생활비를 안 줬어요. 한국 사람 좋은 사람 많다는데 외국인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남편은 술만 먹으면 이상한 말을 해요.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남편한테 그래요. '야! 너 와이프 젊으니까 나중에 너 떠날 거야, 도망갈 거야!' 그 말을 듣고 술 먹고 집에 와서 저랑 싸우죠.

나랑 같이 살고 싶으면 내 말을 잘 들어줘야 하는데. 술 많이 먹지 말아야 하고 열심히 돈 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아이 아빠는 목수 일을 해서 같이 안 살고 가끔씩 왔어요. 와서는 싸우는 거죠. 싸우다 나가고. 나가면 한 달 두 달 후에 들어오고. 들어오면 계속 싸우고."


남편이 한 달에 생활비로 주는 100만 원으로는 살 수 없어서 알렌은 일하기 시작했다. 한국말을 몰랐지만 회사에 가서 일하는 걸 눈치껏 보면서 따라 배울 수 있었다. 한 달에 150만 원을 벌었다. 한국인 관리자들은 젊은 외국인들이 들어와 일을 잘하니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가 아플 때면 알렌이 회사에서 일하는 도중에 어린이집 교사가 전화를 했다. 주임한테 말해서 조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동안 이혼하고 싶었는데 아이 때문에 말 못 했던 거예요. 아이가 불쌍해서. 아이는 엄마 아빠가 같이 살아야 하는데. 그때는 제가 10년 동안 계속 이혼하고 싶었는데 아이가 불쌍해 참았어요. 제가 회사 가면 한국 언니들이 그래요. '야! 너 그 남자랑 어떻게 계속 살아? 계속 눈물이 나오냐? 이혼해!' '어떻게 이혼해요? 제 아이가 불쌍하잖아요.' '야! 아이 버려!' '못 버려요. 저는 절대 아이를 못 버려요. 아이가 안 컸기 때문에.' 근데 나중에는 제가 같이 있어도 남편이 계속 심하게 싸움을 해왔어요.

남편이 핸드폰도 다 부숴버렸어요. 아이가 보는 앞에서 물건을 막 던지고 그걸 보는 아이는 어떨까... 남편이 술 먹고 싸우니까 나중에 제가 무서워졌어요. '나 죽으면 어떡해' 하고 무서워졌어요. 만약에 술 먹고 나 때리면, 나 찌르면 어떡해요, 나 죽는 거예요. 사람이 무서워. 그때는 무서웠어요. 내가 당신하고 같이 못산다고 했어요. 그렇게 이혼했어요. 마음 아파요. 사실 아이랑 같이 살고 싶었는데 남편이 아이는 자기가 키운다고 했어요. 나보고 혼자 살라고 했어요. 아이 아빠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다 힘들었는데 같이 더 못 있겠다 해서 합의 이혼했어요."


아이는 아버지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이었지만 알렌은 여전히 한국인이 아니었다. 2007년에 결혼 비자로 한국에 처음 왔는데 3년이 지나자 남편이 말했다.

"나랑 같이 계속 살고 싶으면 국적 신청은 안 해도 된다. 영주권 신청만 내가 해줄게. 국적 신청이나 영주권 신청이나 똑같아. 계속 한국에 사는 거야, 똑같아."

그 말을 믿고 그때 국적 신청을 못 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그때는 내가 몰랐어요. 생각이 없었어요. 바보라서 그래요. 남편이 하는 말을 믿은 거죠. 지금은 사회통합프로그램을 5단계까지 해야 국적 신청 자격이 생겨요. 그때 남편이 국적을 신청해줬으면 사회통합프로그램 평가 시험도 안 쳐도 됐어요. 그때 남편이 신청해줬으면 국적이 되었을 텐데.

영주권은 십 년마다 다시 재발급받아야 해요. 제가 한국에 살면서 그 후로 국적을 받아야겠다 싶어 두세 번 신청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시험을 쳐야 하는데 제가 공부를 못 했잖아요. 야간 주간 일하는데 어떻게 시간이 있겠어요? 먹고살아야 하고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공부해요? 못해요."


거울 앞의 두 아이
 

건강하게 자라라고 엄마 고향의 풍습대로 묶어준 붉은 실 띠를 손목에 찬 아기. ⓒ 안미선

  
"큰아이가 저한테 그랬어요. '엄마, 아빠랑 이혼해도 한국에 살 거지?' '엄마는 한국에 있어' 말해줬어요. '엄마가 부천에 살 테니 너 만약에 자꾸 엄마 보고 싶으면 와' 대답했어요. 다시 아이가 물었어요. '캄보디아 안 가지?' 아이가 걱정하잖아요. 만약 내가 이혼하고 캄보디아로 떠나면 엄마 얼굴을 큰아이가 다시 못 보잖아요. 그때 저한테 눈물이 나왔어요.

'엄마 안 가. 엄마는 한국 있어.' 아... 그때 내가 마음이 아파서... 큰아이가 불쌍한데 전남편이랑 같이 살면 행복할 일이 없어요. 계속 싸우고 엄마가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안 되니까. '엄마 너 사랑하잖아. 엄마 너 사랑해. 엄마 너 같이 안 살아도 너 사랑하잖아요... 엄마, 미안해, 같이 못 살아서... 진짜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큰아이는 열다섯이 되었다. 몇 년 사이에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다. 알렌과 한 달에 두 번씩 얼굴을 본다. 그녀가 아기를 안고 일어섰다. 화장대 거울에 큰아이의 어릴 때 사진 두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큰아이의 사진을 가리키며 알렌은 아기에게 말한다. "형아야, 형아. 형아 보고 싶어?" 아직 아기는 엄마의 말을 알아듣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런데도 아기가 거울을 보고 싱긋 웃었다.

"닮았지요?" 이번에 알렌은 사진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통통한 뺨이며 웃는 눈매. 알렌의 품에 안긴 아기와 정말 쏙 빼닮은 어린아이의 사진이 거울 앞에 붙어 있었다. 알렌은 아기 이름의 첫 글자를 큰아이 이름의 첫 글자와 같은 돌림자로 지었다. 아기 이름도 한국 이름이다.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이름을 알렌은 입술을 달싹이며 가만히 부른다. 이름들을 자꾸 부르며 알렌은 아기를 안고 빛바랜 사진 앞에 우뚝 서 있다.

이곳이 어디건, 아버지들이 누구건 상관없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녀의 아이들이다. 아버지가 한국인이어서 그 아이가 한국인이라 해도. 정작 아이를 낳은 그녀가 여전히 한국인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그녀가 여전히 외국인으로 여겨지고 새로 낳은 아이도 외국인으로 여겨져도 그렇다.

거울 앞에 선 그녀에겐 두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한국인이고, 한 아이는 캄보디아인이다. 두 아이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른다. 한 아이는 엄마가 한국을 떠날까 걱정했다. 한 아이는 엄마와 떨어져 캄보디아로 가야 한다.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나야 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그녀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두 아이 모두 자신의 아이라는 것,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알렌에게는 모두 이어진 자기 삶의 이야기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가족조차 국적에 따라 조각조각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인인 아이, 한국인이 되고 싶은 엄마, 아직 한국인이 될 수 없는 엄마와 아기로 나누어진다. "저 때문이에요." 알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아이가 외할머니가 캄보디아에서 한국에 오면 좋대요. 제가 그랬어요. '엄마가 한국 국적 없기 때문에 외할머니를 초청해도 삼 개월밖에 못 있어.' '왜? 왜? 엄마? 왜 연장 못 해?' '엄마 국적이 없으니까... 네 동생도 한국인이 아니잖아. 국적도 없고. 다 영주권자이기 때문에.' 그 말 듣고 큰아이 마음이 아팠대요."

알렌의 목소리가 떨리고 울음기가 새어 나온다. 거울 앞에서 아기가 거울 속의 엄마를 보고 방긋 웃는다. 아기가 웃는데, 사진 속 큰아이의 모습은 아기의 미래 같기도, 과거 같아 보이기도 한다. 나는 거울 앞에서 그렇게 가족이 모여 있는 사진을 찍어주었다.

거울 속 알렌은 아직 품에 있는 아기를 보고 웃고 아기는 자기를 든든하게 안아 주고 있는 엄마를 보고 웃는다. 사진 속 아이는 그 앞에 서 있었을 젊은 알렌을 보고 웃고 이제 또다시 나이 든 알렌 앞에서 변치 않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모두가 이어진 한순간이 아주 잠시, 이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아기는 다리에 힘을 주어 기운차게 뻗었다. 건강하게 자라라고 엄마가 고향의 전통 풍습대로 묶어준 붉은 실 띠를 손목에 찬 아기. 한국말도 캄보디아 말도 될 수 있는 옹알이를 하고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 모든 나라의 말에 귀를 열고 있는, 국경을 오가는 아기.

"캄보디아에 보내면 한국말이 안 될 수 있잖아요. 주위에서 한국말을 하게 하려면 캄보디아에 보내지 말라고 해요. 주변에 아는 언니들이 있는데 아이가 캄보디아에서 태어나 몇 년 후에 한국에 오면 한국말을 못 한대요. 어린이집에 가면 말도 못 하고 친구와 같이 못 논다고 해요."

아기가 입을 열 때 흘러나오는 말이 자신의 모국어일까 봐 엄마는 염려한다. 자신이 이 땅에 닿으려고 애쓴 것보다 수월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면서 엄마는 아기에게 한국어로 말을 건다.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 잠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아기는 엄마의 옷자락을 주먹으로 꼭 붙들고 엄마를 올려다본다.

"엄마 얼굴 보이지? 아직 엄마 보이지?" 알렌은 아기를 어를 때 그렇게 말했다. 엄마가 여기 있다, 아직 여기 있다고. 네 앞에 엄마가 지금 있다고. 네가 있는 곳에, 이 한국에 아직 엄마가 같이 있어서, 너를 보고 있다고. 알렌은 오래된 약속을 지키듯 아기에게 말했다. 힘줄이 불거져 나온 거친 손이 아기의 온몸을 떠받쳐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