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07 19:38최종 업데이트 22.08.07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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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간혹 주연배우보다 더 눈에 띄는 조연들이 있습니다. 엄밀히 보면 중심인물의 활약을 뒷받침하는 역할이지만, 더러 주인공보다 돋보이기도 합니다. 주연배우가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끌어간다면, 감초 조연은 맛깔나는 연기력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때로 주인공보다 조연으로 나오는 배우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보고 싶어 다음 편을 기다리게 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극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인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주연보다, 덜 주목받는 조연이 상대적으로 마음 편히 연기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바둑에서 실제 대국하는 기객보다, 한발 떨어진 거리에서 관망하는 훈수꾼이 묘수를 짚어낼 때가 있습니다. 바둑판을 코앞에 두고 한 수 한 수에 몰입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져 자칫 큰 그림을 못 보는 일이 생기는 거지요. 대국 중인 상수들보다 실제 기력이 떨어지는 하수의 눈에 기막힌 수가 보이는 건, 승패에 대한 부담을 내려놨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플래티넘의 '센츄리'를 소개합니다

일본은 동양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만년필 생산국입니다. '플래티넘(Platinum)'에서 은퇴한 장인들이 세운 '나카야(Nakaya)'같은 업체를 필두로, 소규모 수제 만년필 제작사들이 다수 포진된 형세입니다. 바둑판 위에 놓인 흑돌과 백돌이 아무리 숨죽인 듯 보여도, 착점한 수와 수 사이를 비집고 기세 좋게 솟구치는 강수는 있기 마련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만년필 제조사는 세일러입니다. 1919년 '나카타 슌이치(Nakata Shunichi)'가 세운 플래티넘은 앞선 세일러, 파이롯트와 함께 일본 메이저 3사로 불립니다. 셋 중 막내에 속함에도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갖고 있으니, 만년필 강국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습니다.
  

일본 만년필 브랜드 3사 중 하나인 플래티넘(Platinum) ⓒ 김덕래

 
어느 분야나 초창기엔 어느 정도 모방의 단계를 거치는 게 일정 부분 용인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본기를 익힐 때까지만입니다. 자리 잡은 후에도 계속 남이 디딘 곳만 딛는 것은 악수(惡手)입니다. 적절한 시기에 브랜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경쟁력을 잃고 도태되는 게 시장 생리니, 나만의 강점을 가져야 합니다. 금방 속내가 드러나는 얕은수를 꼼수라 하고, 생각하기도 쉽지 않은 기막힌 수를 묘수라 합니다. 더러 이 두 가지가 얽혀 명확히 구분해 내기 어려울 땐, 독창성을 가늠선으로 삼으면 됩니다.

기실 만년필이란 도구 자체가 서양 문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후발주자들이 아무리 재해석하려 한들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그런 의미에서 파이롯트 캡리스처럼 캡을 아예 없애버린 몇몇 모델들은 만년필계의 반골이고 이단아입니다. 펜촉의 금함량이 높을수록 무조건 좋은 제품이라 단정할 순 없지만, 비율이 87.5%인 21K 펜촉은 세일러를 표현하는 상징 중 하나입니다.

플래티넘은 펜촉에 변화를 주긴 하되, EF촉보다도 더 가늘게 써지는 UEF(Ultra Extra Fine)촉을 만들어내는 업체로 잘 알려졌습니다. F촉이 이쑤시개, EF촉이 바늘 정도의 뾰족함이라면, UEF촉은 그 바늘을 보다 예리하게 벼린 상태에 가깝습니다. 파이롯트가 한 폭의 벽화를 완성시키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고, 세일러가 비상하는 용을 그려 넣었다면, 플래티넘은 눈동자를 찍은 셈입니다. 
 

위 좌 - 파이롯트 캡리스 데시모 샴페인 핑크 F촉 위 우 - 세일러 프로기어 쿠레 아주르 21K M촉 아래 - 플래티넘 센츄리 UEF촉 ⓒ 김덕래

 
입문형부터 상위 기종까지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고 있지만, 플래티넘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모델은 이견 없이 '센츄리(Century)'입니다. 비교적 근래인 2011년 첫선을 보였으나, 해를 거듭하며 다양한 스페셜 에디션을 출시해 세를 넓혔습니다. 기본인 검은 색상부터 속이 투명해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모델에 이르기까지 다채롭습니다. 
 

데몬펜이라 내부 상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플래티넘 센츄리 니스 로제 UEF촉 ⓒ 김덕래

 
지금은 '안녕'을 말할 수 없습니다

만년필은 여러 이유로 예상 못 한 문제가 생깁니다. 잉크가 충전된 상태로 방치해 내부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건 가장 가벼운 축에 속합니다. 어지간하면 미온수와 세척툴 정도만으로도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꾹꾹 눌러쓰거나 떨어뜨려 펜촉이 살짝 휘어지면,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가장 심각한 건 펜촉이 부러진 경우입니다. 만년필 펜촉은 사람의 심장에 비견됩니다. 꽤 손상되었더라도 어떻게든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아예 부러져버리면 손을 쓰기 어렵습니다.

물론 만년필 펜촉은 여간해선 부러지지 않습니다. 일부러 혹독하게 다룰만한 이유도 없거니와, 태생이 그리 약하지도 않으니, 평생 부러진 펜촉을 한 번도 못 볼 확률이 더 높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만들어 사람이 쓰는 도구인데, 완전무결할 수는 없지요. 펜촉이 부러졌다는 건, 그 펜의 생명이 다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직 단종되지 않은 모델이라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비용만 지불하면 멀쩡한 새 펜촉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더 이상 생산하지 않을 땐 난처해집니다.

설령 단종되지 않았더라도 곤란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지인에게 선물 받았거나, 오래 써 담뿍 정이 들어버린 경우입니다. 그럴 때 시도해 볼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은, 펜촉을 사포로 갈아내는 것입니다. 평상시엔 절대 피해야 할 무리수지만, 펜촉이 부러지는 순간 이미 단수에 몰린 셈입니다. 돌을 내려놓고 물러설지, 아니면 활로 찾기에 나설지, 승부수를 띄워야 할 시점입니다.

이렇게 펜촉의 한쪽 티핑만 떨어져 나갔을 땐, 남아있는 부분까지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최대한 부러진 티핑면과 같은 선상까지 잘라냅니다. 그 후 사포의 표면이 거친 것에서 고운 것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바꿔가며 다듬어야 합니다. 사포의 거친 정도를 입도라 하는데, 숫자가 커질수록 더 부드럽습니다.

우둘투둘하고 날카로운 단면을 다듬기 위해 처음엔 400번 전후의 사포를 사용하더라도, 단계적으로 600번, 800번, 1000번... 이런 식으로 점점 고운 것을 써야 합니다. 거친 사포를 사용하면 작업 속도는 빠르겠지만, 대상을 갈아내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위험합니다. 또 처음부터 2000번처럼 매끄러운 사포를 쓰면, 거친 면을 효과적으로 연마할 수 없습니다. 솥밥을 안칠 때 처음엔 센 불을 쓰더라도, 밥 냄새가 퍼질 즈음이 되면 약불로 줄여 뜸을 들여야 맛난 밥이 지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표기된 사포의 숫자가 커질수록 표면이 부드럽습니다 ⓒ 김덕래

 
추돌사고가 난 자동차의 외형이 멀쩡할 수가 없는 것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떨어져 나간 펜촉의 단면은 거친 게 당연합니다. 마음이야 급하겠지만, 서둘다 보면 일을 그르칩니다. 펜촉을 다듬는 사이사이 손끝으로 매만져가며 연마된 정도를 살핍니다. 덜 다듬어져도 거칠어 쓸 수가 없고, 과하게 갈아내면 수명이 줄어듭니다. 부족해서도 넘쳐서도 안됩니다.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새 펜촉을 사는 게 현명하겠다, 싶을 수도 있습니다. 효율성을 우선시하면 맞는 말입니다.

현대는 시간의 가치가 중히 여겨지는 사회입니다. 누구나 전력을 다해 사는 세상이라, 조금이라도 시간을 허투루 쓰면 죄책감마저 들곤 합니다. 하지만 그저 한 자루의 필기구에 불과할 뿐인 만년필도, 나와 관계가 맺어지면 특별한 사이가 됩니다. 각별하다는 건,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름 모를 들풀 한 줌도 내 시선이 오래 머물다 보면 예사롭지 않은 존재가 됩니다. 어떤 화려한 꽃보다 귀해집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참에 신발 끈 야무지게 동여매세요. 왜 이런 불운이 닥쳤는지 모르겠다며 비관해봐야 내 속만 끓습니다. 언뜻 보면 생명선이 끊어진 것만 같아도, 그저 가늘어졌을 뿐입니다. 다시 이어주면 오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부러진 펜촉을 다듬어 되살려내는 과정 ⓒ 김덕래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이나 열정을 낭비해 곤궁한 처지에 이르거나, 무모한 투자로 금전적인 손실을 크게 본 경우,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 주로 쓰입니다. 여기에서 나락(奈落)은 불교 용어로 지옥을 뜻하며, 현재 벗어나기 몹시 힘든 상황에 놓였음을 의미합니다.

한낱 펜 한 자루도 이야말로 최악이다, 싶은 순간을 깨치고 나아갈 비장의 한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 내 생애 마지막 순간이란 생각은 잠시 접어두세요. 견줄 바는 못되겠으나, 부러진 펜촉에게도 오늘이 끝이 아닙니다. 아직 내게도 남은 여지가 있습니다.
 

누군들 마지막이 없을까마는, 오늘이 그날은 아닙니다 ⓒ 김덕래

 
* 플래티넘(Platinum)
- 1919년 탄생한 일본의 만년필 제조사. 파이롯트가 캡리스와 커스텀 시리즈를 주력으로 하고, 세일러가 프로기어와 프로피트라는 양두마차를 갖고 있다면, 플래티넘은 걸출한 중견 센츄리를 핵심 라인으로 운용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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