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7 11:55최종 업데이트 22.09.07 11:55
  • 본문듣기
행정부에 비해 대법원은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입장을 다소 배려해주는 편이었다. 강제징용(강제동원)과 위안부 문제가 오로지 법대로 판결됐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2012년 5월 24일과 2018년 10월 30일에 신일본제철(일본제철)을 상대로, 2018년 11월 29일에 미쓰비시를 상대로 강제징용(강제동원) 배상판결을 내린 곳은 대법원이다.

극우세력과 일본 언론들은 문재인 정부 때문에 이런 판결들이 나온 것처럼 주장하지만, 대법원 판결이 처음 나온 2012년은 이명박 집권기였다. 2018년 10월 30일 판결도 2012년 판결에 기초한 것이다. 위의 역사적 판결들은 행정부와 무관하게 사법부가 이뤄낸 결과물이다.


그랬던 대법원이 지금은 달라져 있다. 손해배상을 거부하는 미쓰비시의 국내 자산을 현금화하는 문제에 대해 8월 19일까지 결정을 내렸어야 했는데도 이 기간을 넘겨버렸다. 이 사건을 다룬 대법원 3부 주심인 김재형 대법관이 9월 2일 퇴임식을 하고 4일에 대법원을 떠나는 동안에도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기시다 후미오 내각 입장에서는, 퇴임으로 공석이 생긴 재판부를 정비하느라, 새로 구성된 재판부가 사건을 숙지하느라 현금화 절차가 좀더 지연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일 수도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8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긴급조치 9호 피해자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 관련 전원합의체 선고에 입장해 자리에 앉아 있다. 2022.8.30 ⓒ 연합뉴스

 
8월 19일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법원은 비판받을 소지가 크다. 피해자들이 이미 승소한 사건인데다가 가해자들이 합당한 사유 없이 배상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대법원이 현금화를 지연시킬 법리적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도 절차를 지연시키고 있으니, 헌법상의 평등 이념이 이 사안에 적용되고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전범기업이 압도적으로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갖고 있고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지 않다면 대법원이 이렇게까지 절차를 지연시킬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2년과 2018년에 공정한 판결을 내렸던 대법원이 평등 이념을 훼손시키면서까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떨어트리는 것은 사법부와 대법원의 내일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 반일로 돌아설 가능성"

대법원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사유는 윤석열 정부의 압력이라고 할 수 있다. 7월 26일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로 대표되는 행정부의 압력이 대법원을 주저하게 만드는 최대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강제징용 문제에 관한 윤 정부의 기류를 가장 면밀히 파악하는 곳 중 하나는 일본이다. 그런 일본의 태도를 살펴보면, 대법원이 행정부의 압력에 개의치 않고 소신껏 결정해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를 대하는 최근 일본인들의 시선에 불안감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 현금화 결정을 막아줄 수호자는 윤석열 대통령뿐이다. 일본인들은 한국이 삼권분립 국가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윤 정부가 나서주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가져왔다.
  

윤석열 대통령이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북상하고 있는 5일 오후 용산 대통령실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기관·지자체장들과 통화하며 태풍 대응 태세를 점검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신문기자, 오키나와대 객원교수, 해상보안청 정책자문위원 등을 거쳐 지금은 <코리아 리포트> 편집장으로 활동하는 재일한국인 변진일은 8월 1일 자 <야후 재팬> 뉴스에 실린 '윤석열 정권하에서 정말로 일한관계가 개선되는 것인가?(尹錫悦政権下で本当に日韓関係は改善されるのか?)'라는 기사에서 "한국의 정권이 바뀌어 대통령, 외상, 거기다가 주일대사까지 일본에 융화적인 인물로 대체"됐다고 말했다.

변진일은 윤 대통령과 박진·윤덕민 3인에 대한 일본의 기대감을 표시한 뒤 "일본으로서는 윤석열 신(新)정권의 유언실행(有言實行)을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을 반드시 이행해주기만을 바라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언급이다.

이처럼 윤 대통령을 주시하고 있으므로 한국인들 못지않게 일본인들도 윤 대통령의 기류를 잘 읽고 있으리라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을 알려면 일본을 보면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그런 일본인들이 최근 들어 윤 대통령의 이상 기류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에 대한 출판사의 영향력이 한국보다 훨씬 높은 일본에서 1909년 이후로 활동하면서 한때 잡지왕국을 형성했던 고단샤(講談社)의 <프라이데이 디지털>은 지난 8월 31일에 비관적인 기사를 업로드했다. "한국 윤석열 대통령 '빈사 정권'이 일한관계 회복을 단념하는 날(韓国·尹錫悦大統領瀕死政権が日韓関係回復をあきらめる日)"이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 기사는 "한국 신정권이 발족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빈사 상태에 빠졌다", "윤 대통령은 전 대통령인 문재인 씨와 반대로 하려는 것뿐" 등등의 평가를 한 뒤, 윤 대통령이 낮은 지지율에서 헤어나기 위해 반일로 돌아설 가능성을 지적했다. 기사는 "궁지에 몰린 윤 대통령은 반일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는 변진일의 진단을 인용하면서 "실제로 윤 대통령의 대일 자세는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고 평했다.

'윤 대통령의 지지율 급락으로 반일 카드 가능성은?(尹大統領の支持率急落で"反日カード"の可能性は?)'이란 제목으로 실린 경제·비즈니스 채널 <테레토비즈(テレ東BIZ)>의 8월 19일 자 기사는 윤 정권이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태에 빠져 있다"고 한 뒤 "위험 수역"에 들어가 있다고 평가했다.

<텔레비전 도쿄 비즈니스>의 약칭인 <테레토비즈>의 이 기사는 "윤석열, 김건희 부부는 좌우 국민 모두의 '공공의 적'"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린 사실을 보도한 뒤, 이명박 사례가 되풀이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취임 초기만 해도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이 지지율 회복을 목적으로 2012년 8월에 독도 방문을 결행했다면서, 윤 대통령이 이명박처럼 될 가능성은 낮지만 강제징용 문제를 '개선'하기는 쉽지 않다는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의 전망을 소개했다.
  

10일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1시간 10여 분 정도 독도에 머물렀으며, 헬리콥터를 타고 떠나기 앞서 기념촬영을 했다. 2012.8.10 ⓒ 청와대 제공

 
앞서 소개한 변진일의 기사에서도 독도 영유권에 관한 윤 정권의 태도가 문재인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점, 윤 정권 하에서도 독도 방어 훈련이 열리는 점, 윤 정권 하에서도 독도 해양조사가 실시되는 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에 대한 윤 대통령의 태도가 약간 달라진 점 등을 거론했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를 예리하게 관찰하는 일본인들은 윤 대통령의 태도가 처음 같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일본 언론은 윤석열의 대일정책이 지금과 반대가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는 대법원이 지금의 윤석열 정부를 보면서 입장을 정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신호가 될 수 있다. 대법원이 윤석열 정부의 현재 태도만을 근거로 강제징용 사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다면, 결과적으로 대법원의 모양새만 이상해지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