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04 10:59최종 업데이트 22.10.0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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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회를 통해서 내가 사는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고 큰맘을 먹었지만, 여전히 내 맘 한구석에는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떠나질 않았다. 뭔 대단한 이야기라고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줄까 하는 걱정도 있었고, 애써 맘속 깊은 곳에 묻어놨던 아픈 기억들이 다시 삐져나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많은 분이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덕분에 오기가 살아났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한 번 붙어볼 생각이다.


흉기로 인한 물리적 상처보다 말로 인한 정신적 상처가 훨씬 더 심한 경우가 있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장애인 대부분이 입는 상처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장애는 되돌릴 수 없는 끝도 아니고, 모든 걸 정리하고 기다려야 할 마지막도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그저 어떤 상황일 뿐이고 그것도 얼마든지 나아질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과 의학의 혜택도 있고, 함께해 줄 '우리'도 있으니까.

그런데 우울이란 감정은 참으로 지독하다. 도무지 면역되지 않는다. 이렇게 침을 튀겨가면서 떠들고 있지만, 여전히 나도 타협의 단계에서 아주 조금만 삐끗하면 우울의 늪에 빠지고 만다. 아마도 이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거의 모든 장애인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우울의 감정과 싸우고 있다. 거기에 농담일지라도, 그저 몰라서 한 말일지라도 본인이 장애인임을 각인시키는 돌덩이 같은 말이 던져지면 그 충격은 생각보다 크다.

지난 10년을 가만히 되돌아보면, 환하게 웃고 있거나 쾌활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을 오히려 낯설게 여기는 분위기가 많은 것 같다. 단언컨대 그건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웃고 있다고 고통을 못 느낀다거나, 장애가 준 우울을 완전히 극복했다거나, 초인간적 의지를 갖추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런 장애인들은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고 있고 나름의 노력으로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뿐이다.

아무리 웃고 있어도 여전히 우리 장애인들 마음 깊은 곳에는 마치 먹잇감을 찾으려 날름거리는 독사의 혀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우울이란 감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이해해 줬으면 한다.

웃고 있는 우리 장애인을 만났다면, 그냥 환하게 웃는 비장애인들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딱 그 감정과 태도로 대해주면 그만이다. 아무리 칭찬의 말일지라도, 아무리 진심에서 우러난 말일지라도, 굳이 장애인임을 강조하는 말들은 진짜 진짜 노땡큐다. 어떤 경우든 장애인임을 일깨우는 말은 삼갔으면 한다. 아, 그렇다고 도움의 손길까지 거둬달라는 말은 절대 아님도 강조하고 싶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요청한 대로 손길을 내밀어준다면 기쁨을 느낄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걸 기억해 주면 좋겠다. ⓒ 김승재

 

"눈 X신이 왜 싸돌아다녀, 싸돌아다니길..."

단 네 마디의 아주 짧은 말이었지만 이것은 아직도 내게 가장 큰 상처로 남아 있다. 하얀 지팡이와 등산화로 용기를 내서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어머니 또래의 너무나 평범한 목소리여서 그 충격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당한 그 어떤 사고보다도 아프고 고통스럽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던데, 두려움도 아픔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마음속 두려움을 절반 또 그 절반 그리고 또 절반으로 만들고픈 욕심에서 여러분의 눈과 귀를 또 한 번 더럽혔다.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그 대신 사과하는 뜻에서 두 배, 아니 네 배도 될 수 있는 즐거운 이야기를 해 보겠다.

훈제 연어 한 접시 그리고 과메기 

몇 해 전, 고등학교 동창 모임 장소를 평소와는 달리 아주 세련된 곳으로 정한 적이 있었다. 50줄을 넘어선 아저씨들이 젊은 커플이나 가족 모임에나 적당할 것 같은 뷔페식 패밀리 레스토랑에 모였다.

별도의 방까지 예약한 총무의 자랑 섞인 인사와 더불어 왁자지껄 한바탕 떠들던 친구들이 일제히 방을 나갔다. 단 한 명 나만 빼고서. 뷔페식이라 음식을 가져오려는 것이었고,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었지만 홀로 앉은 내 모습은 여전히 초라해 보였다.

하릴없이 괜한 식탁만 두드리는데, 나갔던 친구들이 돌아오는지 방 입구에서 시끌벅적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내 앞에는 갖가지 음식이 든 접시가 하나둘 놓이기 시작했다.

고기를 좋아하는 친구는 갈비와 튀김을, 생선을 좋아하는 친구는 초밥과 생선회를, 채소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각종 샐러드를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내 앞에는 서너 개의 음식 접시가 차려졌고, 뒤늦게 들어온 친구들은 그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었다.

정말 행복했다. 큰일 날 소리 같지만, 어쩌면 안 보이는 게 더 좋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들이 가져다준 음식과 술로 잔뜩 기분이 좋아진 내 가상의 눈들은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며 요란스레 떠드는 친구들을 정말 고등학교 때의 그 모습으로 그려줬고, 나 역시 졸지에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어, 이 훈제 연어 맛있네, 누가 가져왔어, 이렇게 맛있는 걸..."

"그래? 그게 맛있어?"

"괜찮은데, 연어 샐러드도 좋고."


내게 물었던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몇 년 만에 동창회에 나와서 생각보다 나빠진 내 눈을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하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친구였다. 난 건성으로 답하고 다시 부지런히 접시를 비우면서 친구들과 잡담을 계속했다.

"야, 승재야, 훈제 연어 먹어. 많이 가져왔다. 연어 샐러드도."

"야, 너, 이거... 푸하하하."


내가 고맙다는 답을 하기도 전에 곁에 앉은 친구를 시작으로 주변 친구들의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우리가 함께하면 기쁨은 두 배, 아니 네 배도 될 수 있다. ⓒ 김승재

 
사실 내가 훈제 연어를 언급한 건 그냥 음식을 가져다준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뜻에서 그리고 기분이 좋다는 상투적인 말로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순진한 그 친구는 내 말뜻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훈제 연어 한 접시와 연어 샐러드 한 접시를 정말 수북하게 담아 왔다.

"그래그래, 고마워. 아무리 그래도 이건…,하하 너무 많다."

다른 친구들은 그 친구를 놀렸지만, 난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고 우리는 모두 그 훈제 연어를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또 다른 이야기다.

내게는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도 다정하고 친절한 B란 친구가 있다. 친구뿐 아니라 아이들에게까지 잘해 줘서 친구 아내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는데, 왜 그 친구가 아직 총각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찬바람이 꽤 매서웠던 어느 겨울, 친구 예닐곱 명과 횟집을 찾았다. 두 개의 테이블을 붙여 둘러앉았고 내 곁에는 여느 때처럼 B가 앉았다.

"자, 여기 물수건하고, 수저, 그리고..."

그곳 점원분들은 무척 친절해서 가만있어도 됐지만, B의 다정 본능은 숨길 수가 없었다. 물수건과 수저는 물론 양념장과 앞접시까지 꼼꼼하게 날 챙겨줬다.

"서비스예요. 오늘 포항에서 올라온 겁니다."

통 크게 모둠회 두 접시를 시키고 한창 술판을 벌이는데 과메기 두 접시가 서비스로 나왔다. 내 맞은편에 앉은 친구 C가 쾌재를 부르며 과메기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야, 이거 진짜 맛있다. 이거 진짜 맛있어. 먹어 봐."

자칭 과메기 마니아라는 친구 C가 다시마에 각종 채소와 과메기를 얹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다지 과메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사양의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역시 과메기 맛을 본 B가 C가 내민 것을 나 대신 받아 들었다.

"아니, 아냐. 맛있어. 자, 먹어 봐. 입 벌려. 아!"

얼떨결에 난 입을 벌렸고 B는 아주 조심스럽게 다시마에 싼 과메기를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어, 그러게. 맛있네."

내가 표정까지 바꿔가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이번에는 친구 B가 직접 배추에 과메기를 싸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친구 B는 과메기는 물론 생선회까지 채소와 함께 내 입에 넣어주었고 난 아주 맛있게 받아먹었다.
  

연인만 먹여주는 건 아니다. 때론 이런 친구도... ⓒ 김승재

 
이런 B의 행동은 흔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드문 것도 아니었다. 나는 물론 C와 다른 친구들도 그냥 그러려니 웃으며 넘어갔지만, 그곳에는 호기심이 의심으로 변하고 그건 또다시 경악으로 번져가는 눈길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B와 함께 밖으로 나왔는데, 횟집 안에서 C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의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밖으로 나온 C에게 이유를 묻자 그를 비롯한 친구 몇 명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어라? 니들 왜 그래?"

웃음을 멈춘 C가 비밀이라도 전하듯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저기 아줌마들이 아주 진지하게 묻더라. 너랑 B랑 무슨 사이냐고.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고. 혹시 너희 진짜 우리 몰래 사귀는 거 아냐?"

비록 장애로 유발된 일일지라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장애인을 그냥 사람으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부족한 걸 서로 돕듯이 필요한 걸 도와줄 수 있다면 그리고 굳이 장애인이란 걸 강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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