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9 17:18최종 업데이트 22.12.0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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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미쓰비시근로정신대 소송 원고 양금덕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다. ⓒ 윤종은

 
지난 7월 26일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해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구제에 제동을 건 외교부가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2018년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미쓰비시 자산의 강제 집행을 신청해놓은 양금덕 할머니가 국민훈장 모란장으로 수여되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을 받는 일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할머니는 이 때문에 인권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1929년 전라도 나주에서 출생한 양금덕은 15세 때인 1944년 5월 '중학교에 진학시켜주겠다'는 일본인 교장의 감언이설에 속아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지원했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해 다음날 학교에 취소 의사를 밝혔지만 "취소하면 부모님을 체포하겠다"는 협박에 겁이 나서 아버지 도장을 훔쳐 담임 교사에게 넘겼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연행된 이 소녀는 생각지도 못하게 17개월간 강제 노역을 해야했다. 그곳에서 중노동뿐 아니라 대지진까지 경험했다. 1944년 12월 7일의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이 그가 노동하던 노역장을 덮쳤다. 담장에 깔려 쓰러진 그는 이 일로 평생을 괴롭힐 왼쪽 어깨 부상을 입게 됐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미쓰비시는 "고향집 주소를 알고 있으니 틀림없이 월급을 보내주겠다"라며 그를 빈손으로 귀국시켰다. 일본에 끌려갔다 왔다는 이유로 이상한 눈총을 받게 된 그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지만, 남편을 일찍 사별하는 바람에 생선 장사를 하며 6남매를 키워냈다.

그런 중에도 미쓰비시와 일본을 응징하기 위한 법적 투쟁에 나섰다. 1992년 그의 법정 투쟁이 시작됐다. 그 결과로 2018년 11월 29일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미쓰비시가 승복하지 않아 상표권·특허권에 대한 강제집행을 신청해놓고 대법원의 현금화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인권 말살에 맞선 그의 투쟁을 높이 평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9월 19일 그를 인권상 추천 대상자로 발표했다.

국가인권위는 홈페이지에 공개한 '2022년 대한민국 인권상 포상 추천대상자 공개 및 의견수렴'에서 "우리 사회의 인권 향상을 위해 묵묵히 헌신해온 인권단체 및 개인의 열정과 노력을 기리고, 이를 통해 인권존중 문화 향상에 기여하고자 매년 대한민국 인권상을 포상합니다"라고 한 뒤 양금덕의 공적을 "초등 6학년 재학 중 여자근로정신대로 강제동원된 피해자로, 1992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첫 소송을 시작한 이래 30년 동안 일제 피해자 권리회복 운동에 기여해옴"이라고 요약했다.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움직인 외교부

인권위는 12월 9일을 시상식 날로 잡아놓았다. 전날인 8일 국무회의에 상정해 포상을 확정한 뒤 이날 상을 수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건은 국무회의에 상정되지 않았다. 외교부의 의견 표명이 결정적 원인이 됐다. 보도에 따르면 외교부 당국자는 "서훈 수여는 상훈법상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재가하는 사안인 바, 관련 부처 간 사전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했다"며 의견 표명 사실을 인정했다.

이 개입이 국무회의 상정에 제동을 걸었다. 할머니는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공개한 동영상을 통해 "이게 뭔 짓이냐"라고 한 뒤 "사죄 한마디 들으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냐"며 불편함을 토로했다.

외교부의 개입 조치는 한국 정부가 징용 피해자에게 훈장을 주는 모습이 일본 정부와 대기업 쪽에 어떻게 비질지 우려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조치는 양금덕 개인에게만 제동을 거는 게 아니라 징용 피해자와 유족 전체에 일종의 '태클'을 거는 일이다. 크게 보면, 식민지배 문제 해결을 바라는 우리 국민 전체에 제동을 건 것이기도 하다.

이번 일의 궁극적 책임은 윤석열 정권에 있지만 이것이 외교부의 고질적 문제점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국민의 열망을 거스르는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 때마다 외교부가 끼친 부정적 영향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 국민적 저항을 낳은 외교적 사건들은 주로 한일관계에서 발생했다. 일본과 손을 잡거나 타협할 때마다 그런 저항이 일어났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체결과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사건들의 궁극적 책임은 박정희 정권과 박근혜 정권에 있지만, 정권을 대리해 실무를 주도한 외교부의 책임 역시 적지 않다. 외교부 특유의 전문성을 감안하면 정권의 책임뿐 아니라 외교부의 책임도 상당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해방 이후 최대의 반일시위 속에서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이 강행한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 체결에 대해 일본 집권당과 재계는 극도의 찬사를 보냈다. 다음날 발행된 <경향신문> 기사 '한일협정 조인과 외국 반향'에 따르면 자민당은 "이 조인은 한일관계의 역사를 찬란하게 빛내놓았다"라며 "한·일 양국 간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한·일 양국 국민들의 열망하는 바"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등이 포함된 일본 재계는 "이 조약이 가져다줄 눈으로 볼 수 있고 없는 모든 이익은 양국에 아직도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불만을 제거해주고 남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했다. 일본 재벌기업들은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이익들이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을 갖고 조약 체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한일기본조약을 격렬히 반대했다. 일본 자민당과 재벌들은 열렬히 지지했다. 일본이 원하는 쪽으로 결론이 도출된 것은 박정희 정권의 의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박 정권이 직접 하기 힘든 외교적 역할을 수행해준 외교부 때문인 측면도 적지 않다. 이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외교부가 우리 현대사에 얼마나 큰 부정적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피해자에 대한 직접 배상을 결여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역시 외교부의 실무 작업이 낳은 결과물이다. 2018년에 "위안부 합의는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합의를 파기한 문재인 정부가 2021년 1월에 합의의 효력을 인정하는 운을 뗀 뒤에 그 효력을 되살리는 일을 주도한 곳도 외교부다. 식민지배 문제가 터질 때마다 외교부가 피해자와 국민보다는 일본과 일본 재계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번에 양금덕 할머니에게 한 일 역시 마찬가지다. 양금덕과 우리 국민을 지켜줘야 할 외교부가 아니라 엉뚱한 데에 신경 쓰고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나라가 할 일 대신해온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 오로지 돈 1억 정도 때문에 싸우는 것이라면 승산도 별로 없고 국가에서도 싫어하는 대일 투쟁을 지난 30년간 변함없이 해온 이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가 무엇 때문에 불굴의 투쟁을 벌여왔는지는 2020년에 발표한 자서전 <죽기 전에 듣고 싶은 한마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에 말한다. '지난 75년간 사죄 한마디 없는 당신들에게 정말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가 하루속히 사죄하고 두 나라가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는 일본이 식민지배에 사죄하고 양심을 갖게 하기 위한 자신의 투쟁이 어중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런 투쟁의 자세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이렇게 악착같이 싸웠더니 세상 사람들이 나 양금덕을 알아주는 것이다. 만약 어영부영하다가 중간에 포기했다면, 나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지금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일본이든 어디든 쫓아가 일본의 잘못을 고발하고 싶은 마음이 한결같다.
 
세상이 양금덕을 알아가는 과정은 세상이 징용 피해자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는 징용 피해를 알리기 위해 어영부영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 그가 하는 일은 일본의 양심을 촉구하고 피해자들의 한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다.

올해 93세인 양금덕이 해온 일은 제국주의 피해를 크게 입은 한국의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나라에서 할 일을 대신해온 피해자가 최고의 훈장도 아닌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 일에 대해 우리 외교부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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