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15 19:48최종 업데이트 23.01.15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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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가족 사진. 앞줄 가운데가 이완용, 뒷줄 가운데가 이항구. ⓒ 이완용 평전

 
이완용은 '일본'은 얻었지만 '2천만'은 잃었다. 2009년 <한국인구학> 제32권에 수록된 박경숙 서울대 교수의 논문 '식민지 시기(1910-1945년)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에 따르면, 국권이 침탈된 1910년 당시의 호구조사 인구는 1311만 명이지만 실제 인구는 1650만 정도로 추정된다.

이완용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를 일으킨 결과로 2천만에 가까운 한국인들 대다수를 적으로 돌렸다. 이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생을 살아야 했다.


고종이 일본과 이완용 등의 압력을 받아 황제직에서 퇴위하고 1개월 뒤인 1907년 8월 23일, 철종 임금의 사위인 친일파 박영효가 고종 폐위에 찬성한 이완용 등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친일파 간에도 고종 폐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당시 이완용은 대중의 공격도 받았다. 지금의 서울 충정로역 인근인 약현(중림동)에 있는 그의 집이 방화로 불에 탔다. 또 경술국치 8개월 전인 1909년 12월 22일에는 22세인 이재명이 지금의 명동성당 앞에서 51세 된 그를 죽이려다 실패했다.

국권 침탈 뒤에도 그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1926년 2월 11일 그가 68세 나이로 사망한 직후에 '서울의 건물 미화원들이 좋아하겠구나'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대중잡지인 <개벽> 제67호는 "경성부의 착제부(搾除夫)들은 '또 이제부터는 공동변소의 벽이 깨긋해지깻스닛가 무엇보다도 조켓다고' 치하하겠지"라며 이완용의 죽음을 조롱했다. 그를 욕하는 화장실 낙서들이 사라져 청소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좋아하리라는 기사였다.

위 박경숙 논문에 따르면, 1926년의 호구조사 인구는 1861만이고 추정 인구는 1932만이다. 2천만에 가까워진 한국인 대다수가 이완용을 증오했기 때문에, 아무리 일본의 후원을 받는다 해도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이 가문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완용 집안을 지켜내는 것은 물론이고 '친일 명문가'의 명성까지 이어가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둘째 아들 이항구다. 이완용의 친일은 이항구에 의해 계승됐고 이는 이항구의 아들들에게 이어졌다. 중간에 있는 이항구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이완용 아들임을 자랑스러워해

이항구는 이완용이 23세 때인 1881년에 출생했다. 이완용의 장남인 이승구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에 사망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4권에 따르면, 이항구가 받은 최초의 관직은 18세 때인 1899년에 임명된 사직서 참봉이다. 그는 대한제국 외교권이 넘어간 뒤인 1906년에는 고종황제를 보좌하는 비서감승이 됐다.

그 뒤 그의 일제강점기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옛 한국 황실을 담당하는 이왕직 관직이다. 1911년에는 이왕직 사무관이 됐고, 1918년에는 이왕직 의식과장이 됐고, 1932년에는 이왕직 차관이 됐다. 1940년에는 이왕직 장관이 되어 죽을 때까지 역임했다.

이항구는 아버지의 활약에 힘입어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녹봉을 받으며 친일재산을 축적했다. 그는 친일파 아버지 덕에 호의호식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이력을 쌓아가며 친일 재산을 늘려갔다.

그의 친일 역시 아버지 못지않았다는 점은 1910년에 아버지가 백작 작위를 받을 때 그도 남작 작위를 받은 사실에서 나타난다. 1910년 이전에 그는 일본 왕세자(황태자)의 방한을 환영하거나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활동 외에도 한일 연대를 촉진하는 한일간친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했다. 일본 정부도 그를 인정했다는 점은 1907년에 욱일장을 수여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가 몸담은 이왕직은 일본이 옛 한국 황실을 감시하는 도구였다. 이항구는 그런 감시만 한 게 아니라 일반 청년들을 학병으로 내모는 일에도 참여했다. 전쟁범죄에까지 가담했던 것이다.

아버지 이완용이 세상의 적이 되어 있는 현실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대중 앞에서 자신이 이완용의 아들임을 가급적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1924년 2월 13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보도된 이항구의 모습은 상당히 여유 있어 보인다.

1910년에 남작 작위를 받은 그는 1924년에 남작 작위를 추가로 받았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 황태자 결혼 관련 및 한일관계에 대한 아버지 이완용의 공로가 인정돼 둘째 아들인 이항구가 남작에 특서(特敍)되었다"라며 "일제강점기에 '추가 수작'한 사례는 이항구가 유일하다"라고 설명한다.

위 <매일신보>에 따르면, 이항구는 자신이 이완용의 아들임을 내세우며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기사는 "이항구 씨는 벙글벙글"했다면서 "내야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의 덕이올시다" 등등의 말을 했다고 보도했다. "기쁨이 양미간에 사무쳤었다"라고 <매일신보>는 전했다.

이때는 이완용 사망 2년 전인 1924년이다. 서울 시내의 건물 미화원들이 낙서 때문에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세상이 자기 집을 증오하는 속에서도 이완용의 아들임을 자랑스러워하며 기쁨을 굳이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친일 명문가'
 

1940년 3월 14일 자 <조선일보>는 이왕직 장관 이항구가 "신임 인사차 본사를 내방했다"고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 조선일보


그는 아버지의 친일을 계승하는 바탕 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만의 친일을 쌓아갔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관민추도회 때는 제수용품을 챙기는 제수담임위원 일을 맡았다. 요시히토(다이쇼) 일왕 즉위식과 은혼식, 히로히토(쇼와) 일왕 즉위식 등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또 식민지 한국인들의 저항을 억누르고 친일파들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단체 활동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동민회와 동요회 등에 가담한 것이 그런 사례에 속한다.

그는 훈장·표창·상품 등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것을 헌납하는 데도 앞장섰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해 금전을 기부하기도 했고 금 모으기 운동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위 사전은 1939년 4월 행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같은 달 '금을 정부에 팔자'는 운동에 호응해 2000원 상당의 금잔 등을 조선군애국부에 헌납"했다고 설명한다.

지금의 국회의원과 위상이 비슷했던 중추원 참의직을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역임한 친일파 홍종국의 연봉은 1200원에서 2400원이었다. 이항구가 헌납한 금잔의 가치는 중추원 참의 연봉과 맞먹었다.

그는 일본이 주는 녹봉으로 살면서 때마다 일본에 성의 표시를 하는 한편, 동료 친일파들의 연대를 강화해나가는 방법으로 친일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학병 독려 등으로 일반 대중을 전쟁에 내몰았다.

자기 가문에 우호적인 쪽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자기 집안에 적대적인 쪽을 전쟁으로 내모는 그의 삶은 일본을 위하는 일인 동시에 가문을 지키는 일이었다. 세상의 증오를 받은 이완용의 가문은 이항구의 그 같은 활동에 힘입어 명맥을 유지해나간 것은 물론이고 '친일 명문가'의 위상까지 이어 나가게 됐다.

이항구는 해방 5개월 전인 1945년 3월 6일 사망했다. 아버지와 자신과 자기 아들들의 선택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눈에 담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항구는 이완용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도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1932년 7월부터 1934년 6월까지 <고종태황제실록> 및 <순종황제실록> 편찬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실록 편찬을 책임졌다."
"(1940년) 8월에는 조선 사료의 수집 및 편찬과 조선사의 편수를 담당하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에 임명되는 한편,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친일파 이완용의 아들이 조선왕조실록의 일부인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해방 뒤에까지 한국사를 왜곡시킬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한민족의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일제강점기 역사교육의 주역 중 하나가 이항구였으니, 그의 손때가 묻은 역사 지식이 우리 머릿속을 일정 부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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