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8 11:48최종 업데이트 23.12.0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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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닝쇼벤 수도원 전경 ⓒ 윤한샘


"웃음은 악한 것이야." <장미의 이름> 중

<장미의 이름>이나 <다빈치 코드> 같은 영화에 나오는 수도원은 신비롭고 엄숙한 곳으로 묘사된다. 그곳의 수도사는 세상의 비밀을 풀고 인류를 구원할 열쇠를 쥔 존재다. 유럽 문화가 생경한 이들은 영화 속 이미지에서 종교 코드를 배우곤 한다. 수도원 생산 제품에 프리미엄 라벨이 붙은 이유도 이런 코드에서 연유하는 고귀하고 한정된 가치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맥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맥주는 가격이 낮고 접근이 쉬운 대중 상품의 대표 주자였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이런 맥주 세계에 빛을 내고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수도사들이 수도원 양조장에서 맥주를 만든다는 진정성이었다. 트라피스트 맥주에 붙은 프리미엄은 향미와 품질이 아닌, 주체와 장소에 있었다.

유럽 젊은이들은 더 이상 수도의 삶에 투신하지 않는다. 남은 수도사는 점점 늙어갔다. 이런 수도원의 현실은 그동안 지켜왔던 진정성에 물음을 남기며 실존적 문제를 야기했다. 다시 말해, 트라피스트 수도원 맥주가 점점 수도사들의 손에서 멀어지고 있다. 

수도사 감소에 직면한 트라피스트 맥주
 

라 트라페 양조장 전경 ⓒ 윤한샘


유럽 트라피스트 맥주 기행의 마지막 방문지 코닝쇼벤 수도원(Koningshoeven Abbey)은 수도원 맥주의 실존적 문제를 좋은 방향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틸부르크에 있는 코닝쇼벤은 준데르트 수도원과 더불어 개신교 중심 국가 네덜란드에서 유이하게 트라피스트 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1881년 프랑스 몽-데-까(Mont-des-cats) 수도사들이 프랑스 혁명가들의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 브라반트 틸부르크로 피신했다. 이들이 머문 곳은 작고 허름한 양우리였다. 여러 어려움에도 수도사들은 그곳을 수도원으로 개척했고 자신들을 받아준 네덜란드 왕 빌렘 2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코닝쇼벤, 즉 왕의 농가라는 이름을 붙였다. 

맥주 양조장은 수도원 건립과 운영 자금을 위해 1884년 지어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94년 새로운 수도원이 증축됐고 코닝쇼벤 트라피스트 맥주도 꾸준히 성장했다. 맥주에 큰 변화가 생긴 건 1969년이었다. 수도원이 스텔라 아르투아와 협력을 결정한 것이다. 다양한 라거 맥주들이 등장했지만 수도원 맥주라는 정체성은 흐려지고 말았다. 

1979년 스텔라 아르투아와 관계가 종료되고 수도사들이 다시 양조장에 복귀하면서 코닝쇼벤 맥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라 트라페라는 브랜드를 붙이고 두벨과 트리펠 같은 트라피스트 맥주 스타일을 출시한 것이다.

라 트라페(La Trappe)는 트라피스트가 태동한 프랑스 라 트라페 수도원에 대한 헌정이었다. 이후 라 트라페 블론드, 엥켈, 위트 같은 다양한 맥주들이 선보였고 1991년에는 쿼드루펠(Quadrupel)이라는 최고의 맥주를 출시했다. 

쿼드루펠은 불투명한 짙은 갈색에 알코올 10%를 품은 벨기에 스타일 맥주다. 우아한 건자두, 블랙베리, 제비꽃 향속에 뭉근한 쓴맛과 단맛이 이루는 밸런스는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깊고 묵직한 바디감은 부드럽게 올라오는 알코올 향과 어울려 기품어린 자태를 뽐낸다. 라 트라페 쿼드루펠은 벨기에 수도원 맥주 스타일의 명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며 독보적인 위치로 올라섰다. 

하지만 수도사들이라 해도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었다. 고된 양조 작업을 지속하기도 어려웠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라 트라페 인기는 높아졌고 생산량은 계속 늘어갔다. 결국 1999년 수도원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네덜란드 맥주 기업 바바리아에게 맥주 생산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맥주 생산은 원활해졌지만 다른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국제트라피스트협회(ITA)에서 라 트라페 맥주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위탁생산이 트라피스트 맥주의 가치를 훼손했다고 생각한 ITA는 트라피스트 맥주 인증 라벨 ATP(Authentic Trappist Product)를 회수하며 자격을 박탈했다.  

트라피스트 맥주로 복귀한 라 트라페

2005년 ITA는 수도사가 맥주 생산과 품질을 관리 감독한다는 조건 하에 라 트라페에게 ATP 라벨을 허용했다. ITA 또한 수도사 감소와 노령화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현재 라 트라페는 10개 트라피스트 맥주 중 유일하게 바바리아 자회사인 코닝쇼벤 NV에 의해서 생산되고 있다. 물론 최고 양조 책임자는 수도사다.  

유럽 트라피스트 맥주 기행 종착지로 코닝쇼벤 수도원을 결정한 것은 이런 라 트라페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라 트라페 한국 수입사의 도움으로 특별 초청을 받은 덕분에 수출 담당자가 직접 양조장 투어와 맥주 시음을 함께 하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코닝쇼벤 수도원은 평화 그 자체였다. 수도원에 온 것을 실감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우리에게 큰 키에 듬직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다가왔다. 자신을 디터 로월스라고 소개한 그는 턱까지 내려오는 멋진 수염을 갖고 있었다. 빙긋 웃는 그의 손에는 방문객을 위한 노란 조끼가 들려 있었다. 

디터가 먼저 데리고 간 간 곳은 테이스팅 룸 뒤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그곳에서 10분 정도 라 트라페 맥주의 정신과 가치를 담은 영상을 보며 수도원 소개를 들었다. 영상 속에서 라 트라페는 공존과 상생이라는 가치들을 강조하고 있었다. 도대체 맥주가 이런 가치들을 어떻게 전달한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양조장 투어에서 체감할 수 있었다.
 

양조용수 재활용을 위한 시설 ⓒ 윤한샘


영상을 본 후 디터가 안내한 곳은 온실 같이 생긴 거대한 건물이었다. 그곳에는 양조수 재사용을 위한 순환 장치가 있었다. 라 트라페는 양조에 사용한 물을 재생하고 있었다. 거의 90% 이상 물이 재사용되고 있다는 말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양조용수를 재활용하고 있는 한국 맥주 양조장들이 있었던가? 들어본 적이 없다. 

본격적인 투어는 양조장에서 시작됐다. 라 트라페 양조장 외관은 수도원의 모습을 꼭 닮아 있었다. 붉은 벽돌로 쌓은 건물에는 십자가를 품은 첨탑이 있었고 문 위에는 성 베네딕트가 우리를 포근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당 이런 모습일 것이라 상상만 하던 수도원 양조장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옛 양조장의 모습 ⓒ 윤한샘


첫 번째 코스는 옛 양조장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구리 당화조 옆에 맥즙의 비중을 측정하던 구식 장비가 있었다. 벽에는 수도사가 양조를 했던 시절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구리 끓임조는 격벽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양조장 규모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1989년 양조장 현대화 전까지 이 작은 곳에서 수많은 맥주들이 생산됐다니 믿기지 않았다.  

구리 끓임조 바로 위로 현대식 양조시설이 보였다. 디터는 스테인레스 스틸 양조장비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세 개의 통이 뚜껑을 닫은 채 바닥에 박혀 있었다. 벽에는 라 트라페가 세계 맥주 대회에서 받은 수십 개의 상들이 걸려 있었다. 수상 실적들을 거론하며 라 트라페 맥주의 위상을 자랑하는 디터의 눈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현재 양조장의 모습 ⓒ 윤한샘


라 트라페의 가치, 공존과 상생
 

수도원 지붕에 있는 태양광 패널 ⓒ 윤한샘


양조장을 나와 뒤뜰로 향하던 도중, 수도원 지붕에 붙은 수많은 태양광 패널이 눈에 들어왔다. 디터는 수도원과 양조장을 위한 전기를 대부분 태양광으로 충당한다고 설명했다.

양조장 뒤로 돌아가자 넓은 푸른 밭이 펼쳐졌다. 주말농장이었다. 디터는 지역민들에게 1유로(1400원)에 이곳을 분양한다고 했다. 그리고 주민들이 재배한 농작물을 다시 수도원에서 구매해 식재료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을 위한 주말 농장 ⓒ 윤한샘


또한 수도원에서 직접 만든 빵, 잼, 치즈, 맥주, 옷, 비누 등 식료품과 생필품은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며 지역민들과 상생한다고 했다. 양조수 재활용, 태양광 전력, 친환경 식재료, 맥주가 지역 사회에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공존할 수 있는지, 여기에 바로 답이 있었다. 

양조장을 다 둘러본 디터는 이제 만찬을 할 시간이라며 라 트라페 초입을 향해 앞장섰다. 그곳에는 오두막처럼 생긴 작은 건물이 있었다. 프로프로칼(proef'lokaal)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건물은 2008년 맥주 테이스팅과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지어졌다. 프로프로칼은 말 그대로 테이스팅 룸을 의미한다. 외관은 다름 아닌 1884년 코닝쇼벤 수도원의 시작이었던 양우리에서 가져왔다.
 

프로프로칼, 코닝쇼벤 수도원의 초기 양우리에서 외관을 가져왔다. ⓒ 윤한샘


바로 앞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맥주와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었지만 산들바람과 습하지 않은 공기 덕에 기분은 상쾌했다. 예약석에는 네덜란드 브라반트 전통 음식과  위트, 블론드, 두벨, 트리펠, 이시도르 그리고 콰드루펠, 여섯 종류의 맥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매그넘 사이즈(1리터)로 서빙된 맥주는 보기만 해도 환상적이었다. 특히 두 종류 맥주, 위트와 이시도르가 눈길을 끌었다. 

트라피스트 맥주 중 유일한 벨지안 밀맥주인 위트는 부드러운 바나나와 섬세한 향신료향이 녹아있었다. 2009년 라 트라페 125주년을 맞아 출시된 이시도르는 1884년 코닝쇼벤 최초의 브루마스터였던 이시도루스(Isidorus)를 기념하는 맥주였다. 7.5% 알코올에 앰버색을 품은 이 맥주는 캬라멜과 수지 향 그리고 섬세한 쓴맛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을 장식한 맥주는 쿼드루펠이었다. 짙은 앰버색 액체 속에 블랙베리, 제비꽃, 건자두 향이 생생한 결을 이루고 있었다. 다소 묵직한 쓴맛은 캬라멜 단맛과 어우러져 완벽한 밸런스를 만들었고 효모에서 오는 섬세한 향신료 향은 깔끔한 후미를 책임졌다. 이 맥주를 세상에 선물한 라 트라페에 박수를. 
 

라트라페 맥주들 ⓒ 윤한샘


라 트라페는 다른 트라피스트 맥주와 달리 높은 알코올을 가진 복비어, 유기농 홉을 넣은 푸어 그리고 콰드루펠을 와인 베럴에 숙성시킨 콰드루펠 오크 에이지드 같은 다양한 맥주를 갖고 있었다. 모두 마시고 싶었지만 이미 배는 용량이 초과된 지 오래였다. 마시지 못한 맥주는 라 트라페 상점, 클루스터빈켈(Kloosterwinkel)에 들러 구입할 수 있으니 아쉬워하지 말 것. 

라 트라페를 나서며 가슴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도원 맥주가 보여주는 공존과 상생의 의미를 마지막 여정에서 볼 수 있어 감사했다. 맥주를 통해 좋은 문화와 세상을 만드는 것, 이 기행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한국에서 맥주로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기를, 투스트 그리고 상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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