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폐막한 인디포럼의 '우리는 느릿느릿 걷자 걷자' 섹션은 하나의 '공간'을 중심으로 한 다섯 편의 단편영화를 모은 것이다. 시골길, 서울의 변두리 등의 공간에서 진행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공간을 우리는 느릿느릿 걸어야 한다. 빨리 지나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천천히 걸으며 기억 속에, 마음 속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느릿느릿 걸어야 하는 공간을 보여주는 다섯 편의 영화 이야기로 시작한다.

조용한 시골 분위기로 채운 <가지 않은, 모든 것들>

 시골의 풍경을 그린 <가지 않은, 모든 것들>

시골의 풍경을 그린 <가지 않은, 모든 것들> ⓒ 인디포럼


한 여자가 헌책방에서 지도를 보고 버스를 탄다. 시골 정류장에 내린 여자는 버려진 소파를 무심히 바라본다. 시골길을 걷는 여자, 하룻밤 묵을 민박집을 찾아가고 남자 주인은 오랜만에 온 손님과 한 잔 술을 나눈다. 다음날 아침, 여자는 주인과 함께 작은 암자를 찾고 거기서 여자는 주인에게 담배 한 대를 청한다.

윤강로 감독의 <가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용은 이게 다다. 그리 큰 줄거리도 없고 극적인 상황도 펼쳐지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일상적인 대화와 주인공이 내려간 시골의 풍경, 그리고 아침에 찾은 암자의 고즈넉한 분위기만이 관객에게 전해질 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공간'이 중요한 영화다. 주인공이 왜 시골 여행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왜 남자에게 담배를 청하는 지는 공간이 전하는 분위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시골의 풍경과 친절한 남자의 모습은 때묻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여주는 것같아 반갑기까지 하다. 공간의 중요성을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빠져나오기 어려운 달동네 이야기

 달동네를 공간으로 한 <남의 속도 모르고>

달동네를 공간으로 한 <남의 속도 모르고> ⓒ 인디포럼


이정아 감독의 <남의 속도 모르고>의 공간은 서울 성북동의 달동네다. 주인공 송희는 매일 술에 취하면 행패를 일삼는 아버지를 피해 남자친구 영태와 다른 곳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영태는 송희와 같이 살려 하지 않고 새로 이사온 여인 재경은 계속 송희를 따라다닌다. 송희는 그 모든 것이 짜증나고 귀찮기만 하다.

이 영화 속 달동네는 빠져 나가고 싶어도 빠져 나가기 어려운 공간이다. 송희는 두 번이나 짐을 싸고 영태 집으로 가려 했지만 한 번은 자리를 비운 사이 영태가 짐을 송희 집으로 가져가고 두 번째는 영태의 집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송희는 가방을 싸들고 나가지만 갈 곳이 없다. 찜질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동네 길로만 가는 마을버스를 타야 할 뿐이다.

이 영화의 장점은 억지를 부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영리하게 자연스런 웃음을 유도하는 것이다. 특히 재경에게 송희가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장면의 경우 자칫 억지스러울 수도 있는 화해를 조그만 반전을 통해 보여준 부분은 탁월하다.

문경, 그 곳으로 시작하는 짧은 주소

 문경을 배경으로 한 <경북 문경으로 시작하는 짧은 주소>

문경을 배경으로 한 <경북 문경으로 시작하는 짧은 주소> ⓒ 인디포럼


문경을 떠나려는 소녀가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로 가려는 소녀.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소녀를 말리고 할머니는 가고 싶은 곳을 적으라는 어린 남동생의 말에 '제주도'로 시작하는 정확한 주소를 적는다.

소녀가 서울에 가던 날, 할머니가 갑자기 죽고 소녀는 다시 내려온다. 몸은 떠나있지만 여전히 마음에 제주도를 향한 그리움을 갖고 있던 할머니를 생각하며 소녀는 운다. 그리고 소녀가 다시 서울로 떠나던 날, 소녀는 문경의 자기 집 주소를 가지고 있는 남자를 만난다.

<경북 문경으로 시작하는 짧은 주소>. 이경원 감독은 경북 문경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와 함께 소녀의 성장을 잔잔하게 풀어낸다. 가족간이지만 문경이라는 곳은 누구에게는 터를 계속 잡고 싶은 곳이며 누구에게는 떠나고 싶은 곳이며, 그리고 누구에게는 그리운 곳을 떠나 살아가야하는 곳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구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작은 공간, 짧지만 강한 이야기

 도시에 둘러싸인 '그의 자연'

도시에 둘러싸인 '그의 자연' ⓒ 인디포럼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사내가 유유자적하게 낚시를 즐긴다. 자연의 향취를 맘껏 즐기는 사내. 그러나 화면이 점점 멀어지는 순간 관객은 그곳이 한강 도심 속에 있는 작은 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저리 감독은 거대한 도시 속에 잠식되어가는 자연의 모습을 4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담아낸다. <그의 자연>이라는 제목처럼 조그만 땅이 결국 '그의 자연'에 머물고 마는 모습은 아찔하기까지 하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는 어떤가? 교실에 설치된 스크린 사이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불과 1분 47초만에 보여지는 이야기. 스크린 안 인물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지, 아니면 문 앞에 스크린을 설치해놓고 장난(?)치는 건지. <스크린플레이>라는 제목의 최영태 감독이 만든 장난스런(?) 실험영화는 마지막까지 흥미를 놓치지 못하게 만든다.

 스크린이라는 상상의 공간에서 선보인 <스크린플레이>

스크린이라는 상상의 공간에서 선보인 <스크린플레이> ⓒ 인디포럼


시골 마을, 지방 도시, 서울의 달동네, 도심 속의 섬, 그리고 가상의 스크린. 다양한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영화 속에 묻어있다. 누구에게는 안식이, 누구에게는 그리움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탈출하고 싶어하고 바꾸고 싶어하는 공간. 언젠가는 남에 의해 잠식당할 지도 모르는 공간.

이 공간을 인디포럼은 느리게 걷자고 한다. 언젠가는 없어질지도 모르는 그 곳을 느리게 걷자는 이야기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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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솜씨는 비록 없지만, 끈기있게 글을 쓰는 성격이 아니지만 하찮은 글을 통해서라도 모든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글쟁이 겸 수다쟁이로 아마 평생을 살아야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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