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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석방은 청년들의 투쟁과 희생 덕택"

1월 2일 오후 서울 봉천동 '만남의 집'.

새해 첫 날부터 많은 장기수들과 사회단체인사들, 청년학생들이 이 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역사적인 새 천년의 시작을 '만남의 집'에서 맞이했던 신광수, 손성모씨는 몰려드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경황이 없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큼지막한 뿔테 안경을 쓴 손씨와 백발성성한 머리에 부드러운 눈매가 인상적인 신씨는 활짝 웃으며 기자를 반겨 주었다. 마침 세종대 졸업생들이 두 사람을 비롯해 방안 가득 앉아 있는 출소장기수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있었다. 곧이어 두 사람의 신년덕담이 이어졌다.

"아직도 석방이 실감나지 않네요. 밖에 나와보니 다들 새 천년의 시작으로 떠들썩하던데 우리들의 석방이 모쪼록 민족통일의 21세기를 만드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된 것은 바로 당신들의 희생과 투쟁 덕택입니다. 앞으로도 젊은 청년세대들이 앞장서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길 당부 드립니다. 그 길에 미력하나마 저희들도 함께 하겠습니다."

손성모씨는 1930년 1월 15일 전북 부안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만큼은 일등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소년시절 전북 이리 등지에서 고용살이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던 그는 1949년 순전히 혼자 힘으로 서울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듬해 6·25가 발발하자 손씨는 고학하며 모은 돈으로 출가한 누님에게 논 서마지기를 사 주면서 "어머니 환갑준비는 돌아와서 내가 할께"란 말을 남기고는 의용군에 입대했다.

결국 가족들과는 그 길로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

전쟁 당시 마산전투에서 부상을 당했던 그는 후퇴 후 동부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제대 후 북에서 김일성 종합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손씨는 함흥공과대학 교원으로 배치, 역사학을 강의했다. 그러던 중 대남사업에 소환돼 80년 전남 해남을 통해 남파된 그는 이듬해 체포되고 말았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을 당시 끊임없는 전향공작과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이를 거절하자 수사당국은 그를 6년 8개월이 지난 87년 10월에 기소, 무기형을 선고했다고 한다.

한편 전쟁통에 동생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던 그의 누나 손성례씨는 정보과 형사를 통해 동생의 생존소식을 알게 됐다. 두 남매는 백발성성한 노인의 모습으로 교도소 면회실에서 40년만에 해후했지만 당시 남쪽에 남은 가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끊임없는 수사기관의 감시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가족들 때문에 늘 고통스러워하던 손씨는 석방되고 나서도 아흔이 다 된 누나와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였다. 오랜 세월동안 궁핍한 생활을 꾸려왔던 친지들에게 마지막까지 폐가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자주 면회를 와 영치금도 넣곤 했던 친척형제들 역시 그와 함께 지낼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손씨는 현재 북에 부인과 자식을 두고 있다.

한편 신광수씨는 1929년 6월 27일 일제시대 때 징용으로 끌려간 아버지와 남편을 쫓아 현해탄을 건넌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신씨는 48년 2·7 구국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단신으로 서울땅을 밟았다. 6·25 당시 서울보성중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그는 의용군에 지원 입대한 뒤 인민군 하사관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종전 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과대학에 유학하여 기계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귀국 후 북한과학원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65년 이후 일본에 파견돼 대외연락부 소속 정보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85년 서울로 들어왔다가 하루만에 안기부에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형집행 대기 중이던 그는 88년 12월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의 김성만, 양동화씨(98년 8월 출소)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될 당시 함께 감형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현재 남쪽에는 친척이 없고 평양에 부인과 의대를 졸업한 가족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특히 북측의 고위직 정보원 신분이었던 신씨는 관계당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정보제공과 전향공작에 시달렸다고 한다. 안기부의 이러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그는 4년 가까이 사형수의 신분으로 생활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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