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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겪은 일화나 미담을 후일담 형식으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적장(敵將)을 베려면 적장의 말을 먼저 쳐라?

▲ 소설가 조정래·시인 김초혜 부부
ⓒ 해냄
1983년부터 2002년 봄에 이르는 20년의 시간동안 소설가 조정래(60)는 문단에서 가장 인터뷰하기 힘든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왜냐? 바로 그 20년 동안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 그리고, <한강>이 씌어졌고, 어느 기자도 소설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복원하겠다는 그의 신념과 의지를 방해하기가 어려웠던 까닭이다.

게다가 그는 아침 7시에 작업실에 들어가 식사시간과 잠깐의 낮잠 시간을 제외하고는 글이 되건 안 되건 원고지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공무원식' 작업스타일을 고집했기에 불쑥 찾아가 시간을 뺏기도 한없이 면구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기자라는 게 취재원의 사정까지 봐주면서 쉬엄쉬엄 할 수 있는 직업인가. 담당 데스크(부장)가 '까라면' 까는 시늉이라도 해야 밥을 먹는 게 이놈의 기자일이다.

100만 독자를 거느린 조정래와 그의 소설이 언론사로서는 얼마나 매력적인 기사꺼리인가. 취재지시가 안 내려올 턱이 없다.

'그 똥은 개도 안 주워 먹는다'는 기자를 하며 이래저래 밥을 벌어먹은 지 4년. 나는 어떤 사건에 대한 코멘트 부탁과 전화 인터뷰까지를 포함해 도합 네 번을 조정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네 번의 만남 모두가 아내 김초혜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한다하는 거대 신문사 기자들도 성사시키기가 쉽지 않았던 조정래 인터뷰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사시킨 데는 '적장(敵將)을 베려면 적장의 말을 먼저 쳐라'는 내 영악한 병법(?)이 적중한 탓이었다.

조정래와 김초혜는 문단안팎에 소문이 파다한 잉꼬부부. 1961년 동국대학교 국문과 캠퍼스 커플로 만난 이들은 지나온 42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도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며 살고 있다. "조정래는 아내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준다"는 말이 동료문인들 사이에서는 정설로 굳어질 정도다.

99년 김초혜와의 인터뷰... 낯뜨거운 기억

이순(耳順)의 나이를 잊어버리고 아직도 "우리 김초혜"를 연발하는 조정래나, 40년 동안 단 한 번도 남편의 저녁식사 차리는 걸 빼먹지 않았다는 김초혜이고 보니 서로를 소 닭 보듯 살아가는 부모만을 봐온 나로서는 신기할 정도였다.

김초혜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노동일보> 문화부에서 일하던 99년이다. "김초혜를 인터뷰하라"는 데스크의 지시가 떨어졌다. 남편의 문학적 후광에 가려있지만 김초혜 역시 시집 '사랑굿'을 출간, 100만부의 판매실적을 올린 당당한 문인.

갓 수습딱지가 떨어진 아들 또래의 어린 기자가 인터뷰 내내 영양가 없는 질문을 던지며 좌불안석하다가, 사준다는 점심도 못 먹고 찔찔 땀 흘리며 지하철역으로 뛰어가던 모습이 안 됐던지 인터뷰 기사가 실린 날 김초혜가 전화를 해왔다.

"잘 봤어요. 언제 신세 갚을 날이 있겠죠."

아무리 초짜기자가 허겁지겁 썼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형편없는 졸문(拙文)에 틀림없었을 괴발개발의 기사를 보고 직접 연락해 격려해준 그녀가 엄마처럼 느껴졌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조정래 인터뷰는 내게 '쉬운 일'이 됐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때는 전화인터뷰를 해 '통일이 되면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를 물어 기사화 했고, 이듬해 봄에는 서초동 예술의 전당 인근 찻집에서 자그마치 3시간30분의 마라톤 대면인터뷰를 통해 조정래의 삶과 문학을 <오마이뉴스> 지면에 옮길 수 있었다. 이런저런 사건에 관한 코멘트도 받았다.

위에서 언급된 일련의 인터뷰가 성사되기까지는 '귀찮다'는 남편을 설득해주고, "내 기사를 써준 고마운 사람인데 야박하게 거절하지 말아요"라며 지원해준 김초혜의 도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정작 신세를 갚아야할 사람은 난데 몇 번이나 다시 신세를 진 것이다. "조정래는 아내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준다"는 말은 풍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이제 나는 인터뷰 성사자에게 신세를 갚은 것일까

지난해 8월. 만해상 시상식이 열린 설악산 백담사에서 조정래·김초혜 부부를 다시 만났다. 아침상을 물린 둘은 부슬부슬 비 내리는 산사의 오솔길에서 우산을 함께 받친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있었다.

젊을 적에는 사랑으로 가난을 이기고, 늙어서는 서로를 이해해주는 동지로 40년을 지내온 노부부의 뒷모습이 참으로 보기가 좋았다. 나도 그들처럼 늙어가고 싶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교사가 읊어준 레이몽 라디게의 시를 아직도 암송하는 소녀적 감수성의 소유자이자, 보통 사람은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가 이적혐의를 받고있는 남편의 저서를 가리키며 "<태백산맥>이 좋은 책이긴 하나보네요, 여기서도 3질씩이나 사준 걸 보면"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여장부이기도 한 김초혜.

이 글은 그녀가 내게 베푼 은혜에 대한 작은 선물로서 씌어진 것이다. 이제 나는 김초혜에게 진 신세를 갚은 것일까?

턱없어 보인다. 어쨌건, 문학담당 기자를 하는 동안은 만나야 할 그녀에게 다시 한번 보험을 들어두자.

"김초혜 선생님. 또 다시 조정래 선생님과 인터뷰할 경우가 생긴다면 그때도 도와주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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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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