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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1월 한통련 모임이 끝나고 난 후 곽동의 의장님(왼쪽)과 함께
ⓒ 타카하시 미와코

2001년 9월 미국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다음 다음날 한산한 도쿄 나리타 공항의 이질감을 느끼면서, 또 갑자기 엄격해진 세관을 통과하면서 공식적으로 일본땅을 밟은 나는 아내를 만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낮에는 기숙사를 청소하고 저녁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전형적인 한국 유학생이었다.

회화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시 머물던 고쿠분지 근처의 볼란티어 회화교실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결혼한 지 1년7개월, 연애시간까지 합하면 2년이 조금 넘어가는 시간 동안 나는 아내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또 배우고 있는 중이다.

나의 일본인 아내 '타카하시 미와코'는 나와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아니, 나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서투른 일본어로 열심히 한동안 떠들고 나면, 그녀는 나의 말 중에 무언가 모순이 있는 점을 짚어준다. 그 질문이 언제나 본질을 꿰뚫는다. 10분 설명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내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 그러지만, 나는 정말 아내만큼 적확한 질문을 하는,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판단될 경우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합리적인 사람은 처음 보았다.

본시 감정에 치우치고 그 현장의 분위기에 휘둘리기 좋아하는 나에게 그녀의 사려 깊고 이성적인 발언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아우라'(분위기)를 선사해 준다.

예컨대 이런 것일 테다. 작년 11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통련)의 조직 결성 30주년 기념행사의 촬영과 편집을 내가 맡게 되어 완성된 비디오 테이프를 납품한 적이 있었다. 완성본을 한통련에 납품한 1월의 어느 날이 하필이면 한통련의 회식날이라 엉겁결에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옆자리에 앉으셨던 곽동의 의장님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인은? 부인도 오라구 해."
"아! 네… 감사합니다."

이미 내 아내와 몇 차례에 걸쳐 만난 적이 있는 곽동의 의장님은 나보다 아내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유학생으로 온 한국남자와 결혼한 일본인 여성의 소외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어로 대화하는 한국인들만의 이너서클에 동화되지 못하는 본토 여성의 소외감.

그러나 이 모임은 다르다. 아내가 자리에 끼게 되면 모두들 친절하게 일본어와 우리말을 섞어가면서 말도 걸어주고 이것 저것 대화도 나눈다. 한통련의 행사에 스스럼없이 아내를 동행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것도 그런 친절한 배려에서 비롯된 것일테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5분 정도 기다렸을까? 금세 모습을 드러낸 아내. 근처 커피숍에서 혼자서 한국어 교재를 읽고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러나 그런 심정은 전혀 내비치지 않은 채, 나의 옆자리에 앉아 재일동포 1,2세분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런 모습에 안도하며 나 역시 대화에 끼어든다. 일본어와 서투른 한국어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덧 가슴 속에서 취기가 올라온다.

한참 취기가 올라올 무렵, 내가 만든 한통련 30주년 기념행사 비디오 테이프가 화제에 오른다. 잘 만들었다, 음악이 좋았다 등등 칭찬을 해주시는 한통련 분들의 격려에 기분이 붕 떴던 것일까? 당시 사회를 맡았던 송세일 사무총장에게 이런 말을 건네고 말았다.

"한참 편집할 때 제 아내가 그러던데요. 송세일 총장님의 한국어는 일본식 억양의 한국말이라 알아듣기가 쉽다고 하더라구요."

"하하! 내 한국어가 그렇죠. 대강대강 배운 거라서…."

그때 송세일 사무총장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지만, 그 안경테 너머로 살짝 비치는 어떤 위화감을 나는 느끼지 못했다. 다시 화제는 다른 곳으로 넘어가고 얼마 있지 않아 자리가 파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차 안. 아내의 얼굴표정이 그다지 밝지 못하다. 내가 취했기 때문일까? 무슨 실수를 했나? 그러고 보니 술자리를 파하고 역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전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아내는 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말문을 연다.

"오빠는 정말 바보 같아."
"왜?"

"아휴…."
"왜 그래? 설명을 해줘야 알지"

"아까 그 사회보신 분 재일동포 2세분에게 오빠가 일본식 억양으로 된 한국어라서 내가 알아듣기 쉽니 어쩌니 했잖아."
"응."

"그런 말을 왜 해? 그분이 얼마나 일본에서 생활하시면서 한글 배우기가 힘드셨겠어? 그런데 일본식 억양이 어쩌고 저쩌고 한국말 잘 못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말이 돼? 그분이 그 말 들으면서 기분이 어땠겠어? 오빤 잘 나가다 항상 그런 실수하더라."

아내의 설명을 듣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그렇다. 아내의 말은 100% 정확했다. 재일동포 2세로서, 일본땅에서 차별을 받으며 살아오면서, 우리말을 몸에 익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 그런데도 나는 가볍게 "일본식 억양"이라는 단어를 내뱉어 버린 것이다. 위화감의 정체는 그것이었구나.

아내에게 솔직하게 사과를 하면서 앞으로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물론 예전 같았으면 나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말도 안되는, 때로는 동정론에 호소하는 논리를 풀어냈겠지만 아내와 1년 넘게 같이 살다보니 나도 어느새 잘못한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습관이 들어버린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니, 아내가 살가운 웃음을 보인다.

"괜찮아. 이제부터 안 그러면 되지."

아내가 피곤했던지 어깨 위로 얼굴을 기대온다. 내가 어느 정도의 자극을 받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새록새록 잠드는 아내. 잠든 아내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왠지 눈물이 핑 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알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세상의 모든 국제결혼 커플들이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이겨내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길 기원해 본다. 우리도 힘차게 살아갈 테니까. 모두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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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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