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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요코로 들어가는 입구. 우에노역과 오카치마치역에 걸쳐 있는 동경의 대표적인 재래시장. 우리 부부는 오카치마치로부터 들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 박철현
장면 1

6월달초에 아내 미와코와 함께 한국에 다녀왔다. 아내로서는 두번째가 되는 한국여행. 세 달에 한 번꼴로 들락거리는 나야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잠깐 다녀오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별다른 여행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데, 아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번에는 사람들도 꽤 만날 거라고 미리 말한 탓일까? 내내 어떤 선물을 사가지고 가야 할까 고민하는 아내. 누구 만나냐고 물어보길래 대강 만날 사람들의 간략한 이름과 성별들을 알려주니, 그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예의 꼼꼼함을 발휘한다. 처음엔 기특하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결정적인 것을 간과했었다. 그건 바로 아내의 '집중력'. 설마 선물사는 것에 그런 집중력을 발휘할 줄이야.

비행기표를 예약한 것이 5월 23일. 그 예약이 확인되자마자, 즉, 타카하시 미와코라는 이름의 비행기 티켓이 집으로 배달되자마자 아내는 그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여지없이 발휘한다. 잡화점 정보가 실려 있는 잡지를 몇 권 사서 뒤적이더니만, '이 사람은 이 걸 할까, 아냐 저 걸 하는 게 나을까' 혼자말을 되풀이하며 혼자 신이 났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오카에리(어서 와)"라는 인사만 하고, 바로 잡지로 눈을 돌린다. 본척 만척 하지 않는 아내의 대접(?)이 웬지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사흘째 되는 날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나는, 삐친 목소리로 아내를 타박했다.

"그냥 몸만 가도 돼. 선물 필요 없어."
"(잡지책에 눈을 둔 채) 아냐 아냐,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돈도 없잖아. 그거 다 살려면 은행에 대출신청해야 되겠는데…."

그렇다. 아내가 선물을 고르고 있는 잡지는 "바이라(BAILA, 슈에이샤 출판)"나 "방상칸(25ans, 아셋트 출판)"같은 꽤나 고급스러운 패션잡지들. 면티셔츠 한 장에 5000엔 이상은 기본인 것들이 실려 있는 그런 잡지를 보면서 선물을 고르고 있으니 얄팍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나의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반농담조로 던진 '은행 대출신청' 말을 들으니, 아내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다.

"진짜…. 우리 돈이 없구나"
"그래, 그러니까 그냥 몸만 가도 돼. 우리 돈 없는 거 전부 다 알어."

O.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속에서나 나올 법한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갑자기 신세가 처량해진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아내를 설득했다는 승리감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로 오래간만에 아내를 이겼다. 하하하!'라며 속으로 기뻐하는 나에게 아내가 말을 꺼낸다.

"그러면 우리 아메요코(アメ橫) 가자. 가만 생각해보니까, 역시 선물을 안 가지고 가는 것은 이상해. 그러니까 싸면서도 좋은 것들을 사가지고 가면 되잖아. 옷이나 그런 거 말고 벌꿀도 사가고, 참기름도 사가고…. 좋지 않아? 대신 예산은 1만엔 안으로 하고."

절묘한 타개책을 내놓는 아내. 하긴 나도 우에노를 1년 넘게 매일같이 다녔으면서도 아메요코를 제대로 가본 적이 없다. 아내는 거의 모든 물건들이 도매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동경의 남대문 시장 아메요코에서 일본적인 향기가 물씬 풍기는 것들을 사가지고 가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1만엔이라면 적당한 가격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선물을 주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7명이니까, 한 사람당 1500엔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괜찮아. 괜찮아. 1500엔이면 충분해."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는 아내. 저런 미소를 보일 때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아내를 믿고 우리는 동경을 횡단하는 조그마한 여행길에 다시 나섰다.

▲ 오후내내 이렇게 비좁았다. 이 사진을 촬영한 시각이 오후 5시. 집에 갈 생각들을 안한다. 사진 가운데, 오토바이 헬멧을 쓴 채 쇼핑에 나선 여성이 흥미롭다.
ⓒ 박철현
▲ 호객 행위를 하고 있는 아메요코의 베테랑 가게 주인들. 어찌나 목소리들이 크던지. 가운데 보이는 런닝 차림의 아저씨는 아메요코에 들어온 지 20년이 된다고 한다.
ⓒ 박철현
▲ 각종 건강식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가게. 아메요코에는 이런 가게들이 숱하게 널려 있다.
ⓒ 박철현
장면 2

"우와! 진짜 사람 많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나는 아메요코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기겁을 한다. 끝이 보이지 않은 혼잡함. 과연 오늘의 쇼핑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이 샘솟는다. 이런 나에게 아내는 팔짱을 낀다.

"남대문 시장에 사람 없으면 그게 남대문 시장이야? 재밌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하긴 재래시장에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생동감이 빠진다면 그건 재래시장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관광지의 사람많음과 재래시장의 사람많음을 분리해서 생각하길 요구하는 아내. 혼잡함 자체를 싫어하는 나에게, 그 혼잡함에도 종류가 있다고 아내는 설명한다. 음, 인정하긴 싫지만, 일리가 있다.

그렇게 아메요코의 중심가를 들어선 우리는, 아니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모든 게 쌌다. 집 근처의 대형할인마트 이나게야의 약 1/3 가격. 대파 한 단에 50엔. 오이 5개들이 한 봉지가 80엔. 꽁치 한 마리가 40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싸다. 이렇게 싸게 팔아서 남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너무 쌌다. 도무지 이해가 안되어서 물어보자 주인이 활기넘치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거 정말 40엔이에요?"
"응. 40엔이야 40엔. 더 싸게는 안돼. 단 스무 마리 구입하면 한 마리 공짜로 준다."

설마, 이 가격을 깎자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주인아저씨 말이 그렇지가 않다.

"식당에서 오는 사람들은 다 깎자고 해서, 식당에는 30엔에 팔고 있어."

30엔. 한국돈으로 300원이다. 300원에 팔리는 꽁치. 갑자기 꽁치 인생이 불쌍해진다. 주인아저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한국에 살고 있는, 결혼한 친구녀석의 부인이 "요즘 한국은 10만원으로 음식재료 살려고 돌아다녀봐도 별로 살 게 없어요"라고 투덜거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차라리 한국에서 싼 비행기 끊어서 아메요코로 와서 한 보름 정도 먹을 거 다 사가는 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물론 세관통관에 걸릴 만한 품목은 사면 안 되겠지만. 아무튼 눈이 휘둥그레진 채 "우와! 진짜 싸다"만 연발하고 있는 나를 보던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저기… 오빠… 우리도 빨리 선물할 거 사야 되지 않을까?"
"(아참, 선물 사야 되는구나) 어, 선물 대강 사고 우리 먹을 거를 많이 사자."

아! 물론 말은 이렇게 했어도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물용으로 가지고 갈 만한 물건들을 아주 신중하게 골랐다는 것은 믿어달라. 정말이니까.

그런 신중한(?) 생각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꿀이 눈에 들어온다. 2500g짜리가 단돈 1050엔. 한국에서는 얼마에 팔고 있는지 정확하게 몰라서 비교가 되진 않지만, 감각적으로는 엄청 싸다는 느낌이 든다. 꿀이 전시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니 가게 양 벽면의 대형 진열대에 오만가지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참기름, 참깨도 있고, 여러 종류의 말린 멸치도 보인다. 멸치종류가 이렇게 많았었나?

▲ 진열되어 있는 벌꿀. 왼쪽이 "순수벌꿀"로 1100엔, 오른쪽이 "그냥벌꿀"로 1050엔. 그런데, 순수벌꿀과 그냥벌꿀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일까? 아시는 분 리플 부탁.
ⓒ 박철현
▲ 멸치의 종류. 볶는 방법, 말리는 방법에 따라 15가지 정도의 다양한 멸치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 박철현
▲ 아메요코 한복판에 위치한 메론바, 파인애플바 판매대. 하나 살려면 적어도 5분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대인기.
ⓒ 박철현
▲ 아메요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스모선수(리키시)들. 솔직히 말한다면, 귀여웠다.
ⓒ 박철현
문득문득 드는 쓸데없는 의문을 뒤로 한 채, 마구마구 골라잡았다. 정말 남대문 시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분위기. 보통 일본은 가격표시된 그대로 사고파는 것이 상식인데, 아메요코에서는 그런 상식이 깨진다. 말만 잘하면, 30% 정도까지 싸게 살 수 있다. 꿀과 참기름(2통), 참깨(3봉지)를 산 이 가게의 경우 원래 가격표시라면 4650엔을 지불해야 되는데, 4천엔만 지불했으니까 약 15% 정도 할인 받은 셈이다.

선물을 사고 다시 아메요코 거리를 돌아다녔다. 2시간을 돌아다녀도 지겨워지지 않는다. 사람구경, 물건구경, 흥정하는 재미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아메요코를 한껏 즐기는 시간.

한국인들도 꽤 눈에 띈다. 양말가게에서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한국인 관광객 아가씨 2명이 영어로 주인아저씨와 흥정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주인아저씨가 곤혹스런 표정을 짓길래, 주제넘게 끼어들어 통역을 해주었다. 2족에 500엔하는 화투짱이 새겨진 양말을 400엔에 사고 싶다는 의향을 표시하는 한국아가씨들. 거래가 성사되자 좋아하면서 "일본도 이렇게 물건값을 깍을 수 있군요"라면서 신기해 한다.

"제가 알기론 아메요코만 그래요. 딴데서는 안 깎아 줄 걸요?"라고 말하는 나에게 "그래도 우리 한번 시도해 볼 거예요"라며 깔깔거리는 두 사람. 헤어지면서 전화연락처를 주고 받자 아내가 신기해 한다.

"원래 알던 사람이야?"
"아니."
"근데, 왜 전화번호를 주고 받아?"
"어. 그냥 일본에 다시 온다니까… 와서 연락하면 또 만나면 재밌잖아."
"아니, 재미있긴 재미있지만, 그래도…."

결국 말끝을 흐리는 아내. 하긴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아내는 매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지금도 아내는 한국인들의 쉽게 친해지는, 뭐랄까 이를테면 '정(情)'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할까,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한다. 나 역시 몇 번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설명해야 잘 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을까?

어느덧 노을이 진다. 우에노에 온 김에 우에노 공원에 들렀다. 지난 4월만 하더라도 보이지 않던 연꽃잎이 호수 위에 만개해 있다. 이렇듯 세월은 흘러가고, 아내와 나 역시 나이가 들어가겠지.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언젠가는 아내가 한국인의 기질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날이 오겠지.

▲ 우에노 공원 내의 호수. 4월까지만 해도 없었던 연꽃이 한 달만에 호수를 가득 메울 정도로 성장했다.
ⓒ 박철현

아메요코는 어떤 곳?

아메요코는 JR 야마노테센 우에노 역과 JR 야마노테션 오카치마치 역까지의 선로변을 따라 위치해 있는 동경 최대의 재래시장이다. 휴일의 경우 하루 15만명이 찾는 먹거리 시장으로, 특히 연말 대(大)바겐세일을 하는 12월 30일~31일 양일간은 하루 50만명씩 찾는 유명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통의 관광명소들이 가지는 매력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메요코만의 장점.

또, 아메요코 주위에는 제주 4.3 학살 사건 당시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온 많은 제주도 출신의 재일동포와 사비유학생 제도가 정착된 85년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뉴커머들이 한국음식점을 열고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메요코 최고의 역사와 맛을 자랑하는 닭꼬치 전문점 '대통령'을 비롯하여, 2003년 TBS의 '왕자님의 아침겸점심(王さまのブランチ)' 요리경연대회에서 2위를 기록한 '아랫목' 등이 전부 재일동포 및 뉴커머가 하고 있는 식당들.

동경역에서도 불과 15분거리에 있으니, 동경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이라면 한번쯤 아메요코에서 재래시장의 활력을 느끼보는 것은 어떨까?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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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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