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동경 시내에서는 느낄 수 없는 드넓고 푸른 하늘. 높아봐야 3층자리 건물밖에 없는 시골의 풍경은 언제나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 박철현

미와코와 미와코의 친구들이 예전에 만든 인터넷 게시판 “토모100게시판”이라는 곳이 있다. 처음에 이 게시판의 존재를 알았을 때 사실 좀 놀랬었다.

물론 아직도 모뎀을 사용해서 인터넷을 접속하는 인구가 30%나 되는 일본의 인터넷 환경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바타, 태그를 사용할 수 있는 한국의 일반적인 인터넷 커뮤니티와는 달리 오직 “글”만 남길 수 있는 이 게시판은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조회수도 기록되지 않고, 답글 기능조차 없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마니아적인 커뮤니티.

처음에는 몇 명이나 글을 올릴까 하고 회의적이었던 나이지만, 요즘 매일 하나씩 간단한 근황을 적고 있다. 일상적인 이야기지만 아내의 친구들도 나의 이상한(?) 일본어 사용방식에 꽤나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나도 이젠 엄연한 아내의 '친구(とも)' 범위로 들어간 듯 하다.

이젠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린,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게시판을 클릭했던 어느 날 나는 아내의 친구인 미사코가 글을 올린 것을 발견했다. 물론 평소에 전화도 하고 메일도 보내는 절친한 친구지만, 게시판에 글을 일부러 올린 것은 생소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특히 미사코는 컴퓨터하고는 거리가 먼 아날로그 인간이라고 스스로 떠들고 다녔으니.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자, 미사코는 “휴대폰으로 올린 거야”라고 웃으며 말한다. 그렇지, 요즘엔 휴대폰으로도 충분히 올릴 수가 있구나. 어쩌면 내가 아날로그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쩝.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 그녀가 게시판에 올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와코. 요번주 일요일이 모처럼 비번인데 오빠하고 같이 3명이서 동물원에 놀러가자. 저번에 같이 같었던 하무라(羽村) 동물원. 오랜만에 가보고 싶어”

얼마전에 유산한 미와코도 이제는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는지라 쾌히 응낙을 한다. 아참, 아내는 임신 7주에 유산을 경험했다. 첫 임신이었는데, 둘이서 이름까지 지어놓고 기뻐했다가 일주일만의 정기검진에서 유산이라고 의사가 진단을 내렸다.

그때의 망연자실한 심정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혹시라도 지금 임신 초기인 아내가 있는 기혼남성이라면 각별히 신경을 써 주시길.

그래도 초기의 그 정신적 공황을 견뎌내고 한 일주일간 안정을 취하다 보니 아내는 다시 원래대로 회복이 되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강한 여인으로 돌아온 아내. 실로 존경스럽다. 보통 여성들도 다 그런가, 아니면 아내만 그런 것일까? 수수께끼다.

아무튼 안정을 취하던 시점에 미사코가 저런 글을 올린 것이다. 묘하게도 미사코에게는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슬슬 바깥 공기를 쐬어 볼까 하던 차에 저런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우리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약속날짜인 20일 아침부터 슈퍼에 들러 주먹밥과 음료수를 사고, 무덥다는 일기예보를 듣고서 아내의 몸을 생각한 기특한 나는 양산까지 준비한 후 하무라 동물원으로 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 미사코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이름모를 두 소년과 친해졌다. 그것도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은 채. 사진기를 들이대니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한다.
ⓒ 박철현

▲ 일본국민의 전국민적, 합법적 도박장(?) 파칭코. 시골의 파칭코는 역시 큼직큼직하다.
ⓒ 박철현

미타카(三鷹)에서 무려 1시간 30분이나 걸려 도착한 하무라역. 플랫폼에 내리자 찌는 듯한 더위가 우리를 습격한다. 전철역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기다리길 10여분. 미사코가 웃으며 개찰구를 나온다.

이빨이 아파서 병원을 잠시 들렀다면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개찰구에 적힌 지역의 명소 코너에 하무라 동물원이 적혀 있다. 오늘은 저길 가는구나라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들뜬다.

그런데, 아내가 동물원에 가기 전에 역 앞의 우물터로 먼저 가자고 한다. 우물이라. 일본에서 우물을 구경한 적이 없는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아내와 미사코를 따라갔다.

아! 그런데 진짜로 우물터다. 물론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나름대로 이 지역의 명소인 듯 예쁘게 치장을 해 놓았다. 우물터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어보니, 무려 73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에도 시대 만들어진 것으로는 가장 최근까지 사용되었다고 적혀져 있다. 쇼와 39년(1965년)까지 사용되었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말이 쉬워 700년이지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 에도시대의 흥망기, 메이지유신의 전성기, 태평양전쟁의 패망까지 중기·근세 일본의 역사를 경험한 역사적 유물이 되는 셈이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과연 우물의 밑바닥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지는 사람은 나뿐이었을까?

▲ 물경 700년의 세월이 흐른 우물. 지금은 우물터만 남아있다. 내려가는, 꼬불꼬불 길이 왠지 무서웠다.
ⓒ 박철현

▲ 동물원의 안쪽. 동물원에서의 에피소드는 다음 편을 기대해 주시라.
ⓒ 박철현

간단히 우물터를 둘러 본 우리는 곧 하무라 동물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처음에는 도심의 거리와는 틀린 시골 동네의 정취를 맛보자며 도보로 가는 것에 동의했으나, 이내 녹아웃. 그만큼 더웠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버스를 타자고 동시에 외칠 정도였으니. 묵묵부답 걷기에만 열중하다 보니, 저기 멀리 지평선 위로 인형의 집 같은 스타일 건축물이 보인다. 틀림없다. 인터넷에서 본 하무라 동물원의 입구다.

“우와! 이쁘다”

입구가 보이자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그러니 미사코가 물어본다.

“지금 오빠가 외친 게 한국말이야?”
“어. 그러고 보니 미사친은 오빠 한글 쓰는 거 거의 들어보지 않았겠구나.”

미와코가 거든다. 참고로 일본의 여자들을 호명할 때, 이름 뒤에 “친”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나름대로 법칙성이 있어 주로 “코(子)”로 끝나는 여성을 부를 경우 “코”를 제외하고 “친”을 넣는 사례를 많이 보았다. 즉, 아내의 경우 다른 친구들은 미와코가 아니라, 미와친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언젠가 그 이유를 아내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답한다.

“아무것도 안붙이고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것은 애인사이나 가족사이에서만 쓰는 것이고, 또 그렇다구 ‘상(さん)’을 뒤에 붙이는 것은 좀 거리감이 있으니까 보통은 ‘짱(ちゃん)’을 많이 붙이거든. 그런데, 나처럼 이름이 세자인 경우엔 ‘미와코짱’이 되니까, 긴 듯한 느낌이 있어. 그래서 줄여서 아마 미와친이라고 한게 아닐까 하는데. 물론 미와짱이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있지만.”

혹시 일본인 여성을 친구로 둔 독자들이 있다면 한번쯤 실험해 보시라. 아주 상대방이 즐거워하고 재미있어 할 듯. 아참, 물론 남자들에게는 쓰면 실례니까 이것도 명심하길.

그런데 갑자기 미사코가 한마디 날린다.

“한글, 꼭 무슨 외계어 같다”

이런, 첫 감상이 외계어라니. 물론 역경끝에 도달한 하무라 동물원의 입구를 보고 기쁜 나머지 절규(?)를 한 나도 잘못이지만, 그래도 외계어라니! 게다가 아내는 박장대소한다.

세종대왕님이 나같은 놈 때문에 고생하신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분노하실까 싶어서 전혀 한글의 훌륭함과 우수성에 대해 모르고 있는 미사코에게 한글을 설명했다. 나로서는 이곳에서 3년간 느낀 일본어와 한국에서 25년간 사용해 온 한글에 대해서 논해보라면 단연코 한글이 몇 배는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한글은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발음을 표기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원음에 가깝게 표기할 수 있어. 반면 일본어의 경우 받침이 없어서 발음이 풍부하지가 않지. 보통 일본인들이 ‘감사합니다’를 ‘가무사하므니다’라고 많이 발음하잖아. 이거 나 처음에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그러더라구. 이런 면을 본다면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지 알 수 있지”

뙤약볕(그러고 보니 이런 단어도 아마 일본어에는 없지?) 아래서 정색을 하고 설명하는 나를 미사코가 놀래서 쳐다본다.

“오빠, 엄청 열정적이네.”

오래간만에 진지모드를 발휘해 버렸다. 더워 죽겠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 쩝. 아내는 두 손을 양옆으로 치켜든다. 어쩔 수 없는 열혈남아로군 하는 투다. 그래도 내 신념엔 변함이 없다. 한글은 우수하다!!

잠시의 해프닝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빨리 하무라 동물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입장료 300엔. 얼핏 보이는 안쪽의 광경을 보니 사람이 별로 없다. 야호! 오늘의 데이트도 무사히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하무라 동물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웬지 흥미진진해지지 않는가?
ⓒ 박철현


<2편으로 이어짐>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