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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텍사스촌, 혹은 텍사스거리라는 말이 나붙은 곳은 거의 예외 없이 유흥가나 홍등가일 가능성이 높다.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미아리 텍사스촌’인데, 예전 김강자 서장이 미성년자 윤락을 근절하기 위해 지속적인 단속을 펼친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미아리는 성매매특별법이 발효되면서 대표적인 윤락가로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텍사스거리 입구
ⓒ 김대갑
우리나라 홍등가에 텍사스란 말이 붙은 이유는 당연히 미군과 연관성이 있다. 해방 후와 한국전을 통해 대거 들어온 추악한 미군들을 상대로 기지촌이 형성되었고, 이 기지촌 주변으로 이 땅의 여성들이 술과 몸을 파는 홍등가가 형성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예전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에 1층에서는 술을 팔고, 2층에서는 몸을 파는 텍사스식 술집이 크게 유행한데서 이 텍사스촌이란 말이 곧 홍등가를 지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 러시아 여인이 활보하는 텍사스거리
ⓒ 김대갑
그런데 부산의 텍사스거리는 노골적으로 몸을 파는 본격적인 홍등가가 아니라 미군들을 상대로 술과 여러 가지 생필품을 팔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초량동 텍사스 거리의 역사는 멀리는 구한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지금 부산역이 있는 곳은 원래 푸른 소나무가 우거지고 흰모래가 펼쳐진 바닷가였다고 한다. 이 바닷가를 바라보는 곳에 중국영사관이 세워졌고, 이 영사관 주변으로 중국조계지가 설치되어 청나라 상인들이 점포와 주택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 상인들이 있는 이곳을 청관거리라고 했는데, 이 청관거리 점포에서 비단, 포목, 양복지, 거울, 꽃신 등 중국의 상해 등지에서 수입해 온 상품을 판매했던 것이다.

그 후 광복과 한국전쟁이 일어나 미군이 진주하면서 이 청관거리는 자연스럽게 미군들을 상대로 한 술집과 점포로 변모했으며, 그때부터 ‘텍사스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옛 미군클럽의 흔적
ⓒ 김대갑
전쟁이 끝난 후 텍사스거리는 부산에 주둔한 미군들을 상대로 한 각종 술집과 클럽, 카페 등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미군의 거리로 되었다. 기자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텍사스거리는 미군들로 넘쳐났으며, 내국인들은 술집이나 클럽에 일체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다. 밤의 텍사스거리는 클럽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팝송의 소음과 술 취한 미군들의 행패, 길거리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미군과 시시덕거리는 한국여인들로 늘 넘쳐났다. 당시 미군들은 참 개판으로 놀았는데, 내국인들은 술 취한 미군들의 행패가 두려워 함부로 지나다니지도 못했다.

▲ 동남 아시아인들도 많이 찾아오는 거리
ⓒ 김대갑
그러나 추악한 미군들의 흥청거림은 80년대 말부터 주둔 미군의 수가 줄어들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텍사스 거리도 주 고객인 미군들이 찾아오지 않으니 한때 폐쇄의 위기를 맞을 정도로 썰렁했는데 이는 러시아인들의 방문으로 곧 극복되기 시작했다. 90년대 들어 러시아와 한국이 수교를 맺으면서 러시아 선원들이 대거 부산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 거리의 러시아인들
ⓒ 김대갑
부산역 근처의 부둣가에 정박한 배에서 내린 러시아선원들은 곧 텍사스거리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이 러시아 선원들과 제3국 보따리장수들을 상대로 한 술집과 점포가 다시 형성된 것이다. 거리의 간판들은 신속히 영어에서 러시아어로 바뀌었으며,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한 각종 물품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특히 예전에 비해 가장 큰 변화는 술집이 줄어들고 점포가 많이 늘어난 것이다. 가난한 러시아 선원들과 동남아시아의 외국인들은 한국의 질 좋은 상품을 이곳 텍사스거리에서 대거 구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큰 돈 들이지 않고 술과 안주를 즐길 수 있으니 그들에겐 머나먼 선상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소중한 거리인 셈이다.

▲ 가방 좀 사소
ⓒ 김대갑
기자의 경험에 의하면 미군과 러시아인들은 노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은 기본적으로 오만한데, 그 오만한 행동의 근저에는 ‘너희 나라를 우리가 지켜주고 있다‘라는 사고가 놓여있다. 이런 사고 하에 미군들은 마치 점령지를 유린하듯 텍사스거리의 술집들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놀았다. 미군들은 단 두 명이라도 엄청난 소음을 일으키며 술을 마시지만 러시아인들은 5,6명이 모여도 말소리를 거의 안내면서 술을 마셨다.

▲ 물건 좀 보고가지예~
ⓒ 김대갑
예전에 기자는 텍사스거리의 술집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자주 마시곤 했다. 그때 러시아인들로 가득 찬 술집에서 이국적인 기분을 즐기며 맥주를 마셨는데 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러시아인들의 조용한 술풍경이 참 인상적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이 거리는 청국인에서 미국인으로 그리고 러시아인과 동남아시아인들로 그 주체가 많이 바뀌었지만 이제는 관광상품의 명소로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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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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