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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 음식은 배를 채우는 것 정도로 생각했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와 함께 분식점에 들렀다가 나와는 사뭇 다른 그 친구에게 놀란 적이 있었다. 배가 고픈 난 그저 주린 배나 채우겠다는 생각에 양은 많으면서 값은 저렴한 라면을 시켰었다. 나의 메뉴 선택은 고민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내게는 적은 비용으로 배만 채우면 됐지 다른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친구는 메뉴판을 내려다보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것이다. 김치 볶음밥도 맛있을 것 같고, 시원한 해물 칼국수도 맛있을 것 같은 데 도대체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참 고민을 하다가 오므라이스를 시켰다. 친구는 맛을 찾아서 음식을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맛을 찾아 음식을 선택하는 친구와 달리 보릿고개를 넘어온 사람도 아니면서 양에 현혹되는 데는 나름의 아픈 과거가 있다. 아이는 많고 그 많은 애들을 남들 시키는 만큼은 배우게 하려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부모님들은 음식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양은 많으면서 가격은 싼 물미역이나 어묵(당시는 '오뎅'이라는 말이 상용어였다), 감자 등 대충 이렇게 양이 푸짐한 재료를 주로 애용해서 음식을 만들었었다. 우리 형제들은 그런 요리도 반찬 투정하지 않고 잘만 먹어치웠다. 그러다보니 은연중에 음식은 맛보다는 배를 채우는 그런 것쯤으로 인식하게 됐던 것 같다.

▲ <산사에는 특별한 식단이 있다>라는 책을 보고 만든 '현미 죽'
ⓒ 김은주
<산사에 가면 특별한 식단이 있다>는 예전의 그 친구와 마찬가지로 음식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또 한 번 흔들리게 만든 책이다. 친구가 음식은 무조건 맛있어야 한다는 주의였다면 이 책은 몸에 좋은 음식이 좋은 음식이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즉 음식 선택의 기준이 맛있는 것도,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해 양이 많은 것도 아닌 몸에 이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인 정세채씨는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수집한 자료를 근간으로 해서 책을 만들었다. 건강을 유지하면서도 정신을 맑게 유지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식사가 있을 것이라는 것에 착안해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찾아낸 식사가 바로 선식(죽)이었다.

책은 무려 36가지의 죽을 소개한다. 물론 기본적인 재료는 현미찹쌀이다. 현미찹쌀을 넣어야 영양에도 만족하면서 쉽게 배가 고파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미찹쌀에 잣을 넣기도 하고 배를 갈아서 넣기도 하고 깨죽도 끓이고 호박죽도 끓이고 녹두죽도 끓인다. 모두 현미 찹쌀과 콩이나 깨와 같은 주재료 단 두 가지만 들어갈 뿐 다른 재료는 일체 들어가지를 않는다. 주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그런 요리였다. 만드는 방법도 비교적 간단해서 나 같은 요리 꽝인 주부에게는 유용한 정보였다.

책에서 배운 대로 현미 죽을 끓여보았다. 현미찹쌀과 콩에 물을 넣고 센 불에서 끓이다가 어느 정도 쌀이 익었을 때 약한 불에서 뭉근하게 끓였다. 그렇게 끓여진 현미 죽을 남편의 아침으로 내놓았다. 빛깔은 누룽지 끓인 것 같은 색깔인데 누룽지의 구수함이나 속이 풀어지는 담백함은 별로 느껴지지가 않고 떡을 물에 불렸을 때 나올 법한 그런 형태의 죽이 됐다. 물을 좀 더 넣었어야 했는데 물이 부족해서 끈적끈적한 느낌이 강했다.

▲ 현미 죽과 궁합이 맞는 음식은 고추장아찌와 같은 장아찌류.
ⓒ 김은주
"이 죽 현미 죽인데 건강에 굉장히 좋데. 책에서 보고 만든 건데 스님들이 주로 먹는 죽인데 건강에도 좋고 정신도 맑게 하고, 또 현미 죽은 끈기가 있어서 배도 금방 고파지지 않는다고 해."

맛없는 음식을 내놓았을 때 나타나는 남편의 '이건 또 뭐야?'하는 표정이 일순간 지나갔다. 약을 팔기 위해 온갖 좋은 말은 다 하는 약장사처럼 '생쇼'를 한다고 할 정도로 '현미죽 예찬론'을 펴자 남편의 표정도 좀 바뀌었다. 맛도 없어 보이는 죽 달랑 한 그릇에 고추장아찌 한 접시와 김치 한 보시기를 내놓아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는데 말을 듣고 나니 죽에 대한 선입견이 좀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래, 우리도 올 해부터는 몸에 좋은 것 좀 먹어보자."

신통찮아 보이는 이 죽이 몸에 그렇게 좋다니까 맛이 아니라 몸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지 까다로운 남편이 기꺼이 숟가락을 들었다. 맛도 괜찮은 모양인지 숟가락의 속도가 빨라졌다.

아침은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고역이지만 먹는 사람에게도 고역이리라. 주변에서 봐도 콘플레이크를 종류별로 구입해 놓고 엄마는 아몬드, 애들은 초코맛, 아빠는 현미를 먹는 가정도 봤다. 어떤 집은 우유에 선식을 타서 먹기도 하고 이것저것 다 싫다며 굶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우리 집은 주로 전날 저녁에 끓여놓은 국에 밥을 말아 먹는 것으로 아침을 때우는 편이었다. 이럴 때 문제는 전날은 맛있게 먹었지만 똑같은 음식을 또 먹게 되면 맛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모든 음식이 그렇지만 해서 금방 먹어야 제 맛을 살릴 수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염분 농도도 짙어지고 맛도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 가족들은 맛없는 아침을 간신히 먹고 가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밥을 먹을 때마다 국을 끓여댈 만큼 부지런하지도 못한 내게 현미 죽은 좋은 대안이었다.

뭔가 물기가 있어야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우리 가족의 조건도 만족하면서 영양가도 높고 건강에는 더할 수 없이 좋고 거기다 생각보다 맛도 좋았다. 소박한 맛이었다. 어떤 맛이라고는 꼭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불편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고 숭늉처럼 편하게 다가오는 그런 자연스런 맛이었다. '자연의 맛'이라는 게 딱 어울리는 표현일 것 같다.

현미 죽은 작은 애도 좋아했다. 고구마나 밤을 비롯해 아이스크림, 과자, 빵 등의 군것질거리는 좋아하지만 밥이라면 독약 먹듯해서 밥 먹을 때마다 혼나기가 일쑤인 둘째는 뜻밖에 죽을 마음에 들어 했다. 죽에서 떡 먹을 때 느꼈던 그런 맛을 느낀 모양이었다.

"엄마, 나는 매일 이 거 줘. 밥 주면 안돼."

둘째의 죽에 대한 호응과 달리 큰 애는 죽이 별로인 모양이었다. 고기를 좋아하고 라면을 좋아하는 큰 애에게 죽은 너무 심심한 맛인지 자기는 이런 죽 먹기 싫으니까 밥을 달라고 했다. 먹고 싶은 거만 먹을 수 없고 건강을 위해서는 먹기 싫더라도 의무적으로라도 먹어야 한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가족 4명 중 세 명은 찬성하고 한 명은 거절,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현미죽'이 우리 집의 아침 식사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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